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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군[통일 신라 시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08
한자 扶餘郡[統一 新羅 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김기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정 시기/일시 757년연표보기 - 부여군 제정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에 있었던 통일 신라 시대 행정 지명.

[개설]

선사 시대부터 대규모 청동기 마을을 형성한 정치 세력이 자리 잡았고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소국이 있었으며, 4세기 중엽에 백제 영토로 편입된 뒤 538년부터 백제의 새로운 왕도(王都)로 개발되어 660년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백제 시대의 이름은 소부리(所夫里), 사비(泗沘)였으며, 부여군(扶餘郡)은 통일 신라 시대인 8세기 중엽에 새로 붙인 지방 행정 단위 이름이다.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 지역은 금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굽이쳐 흐르고 금강에 연결된 작은 하천 주변에 비옥한 평야가 넓게 펼쳐진 반면 바깥으로는 사방에 높은 산들이 늘어선 지세인데, 늦어도 기원전 6세기경에는 이미 비파형동검을 사용하며 벼농사를 짓는 집단이 큰 세력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인 부여 송국리 유적[사적]에서 발견된 수십 기의 원형 및 방형 수혈 주거지가 방증 사례이다. 이후 기원 전후 무렵부터 삼한 시대에는 수천 가 규모의 마한(馬韓) 소국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군 지역은 4세기경 백제 영토로 편입되었다. 구체적으로 언제 어떻게 백제 영토로 변하였는지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으나, 4세기 중엽 근초고왕 때 이미 금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남쪽으로 더 진격하였다는 것이 통설이다.

백제 시대 부여 지역의 지명으로는 소부리(所夫里), 사비(泗沘), 가림성(加林城), 가림군(加林郡), 대산현(大山縣), 진악산현(珍惡山縣), 석성(石城), 석산현(石山縣) 등이 전한다. 백제는 한성 도읍기에 지방을 동·서·남·북 4개의 부(部)로 나누어 다스렸다. 부여는 지리적 여건상 남부(南部)에 속하였을 터인데, 지명은 전하지 않는다. 가림성은 501년(동성왕 23)에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므로 웅진 도읍기의 지명으로 볼 수 있다. 소부리·사비도 웅진 도읍기에 이미 사용한 지명인데, 소부리=사비가 신라의 서라벌과 마찬가지로 수도 ‘서울’을 가리키는 한자 이름이라면 사비 천도 이후에 새로 정리한 표기법의 이름일 수도 있다.

538년 봄에 백제 성왕(聖王)이 웅진에서 사비[소부리, 지금의 부여군 부여읍]로 왕도를 옮겼다. 이로써 지금의 부여 지역은 백제의 정치·경제·사회·문화 중심지가 되었는데, 금강 변의 부소산성부여 나성으로 둘러싸인 지역이 이른바 ‘사비 왕도’의 핵심 지역으로서 왕궁·관청 시설 및 지배층 거주 지역이었다. 도시를 둘러싼 사비성[부여 나성] 안팎에는 국가 주도로 수많은 불교 사찰이 건립되었고, 각종 시설에 쓰일 기와·벽돌 생산 가마도 곳곳에 만들어졌다. 왕릉은 사비성 동쪽 성벽 바깥 산기슭에 차례로 조영되었고, 귀족들의 무덤도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 바깥 여러 곳에 조영되었다. 백제 왕도를 지키는 군사 시설은 부여 나성과 연결된 청산성을 비롯하여 동쪽의 청마산성, 동남쪽의 석성산성, 서쪽의 외리산성·부산성·반산성·은산당산성, 서북쪽의 증산성, 서남쪽의 홍산태봉산성, 남쪽의 가림성[성흥산성] 등이 지금의 부여군 행정구역 내에 있다.

[변천]

660년 7월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백제가 멸망한 뒤 부여 지역은 당나라의 웅진도독부 소속 현(縣)으로 편제되었는데, 『삼국사기』 권37 지리지4 도독부(都督府) 13현(縣) 조에 기재된 13개 현 가운데 앞부분의 우이현(嵎夷縣)과 신구현(神丘縣)은 지금의 부여읍 및 인근 지역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670년에 나당 전쟁이 일어나자 부여 지역에서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충돌하였다. 신라는 671년 6월 신라군이 가림성, 석성에서 당군을 제압한 뒤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였으며, 676년 11월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격퇴함으로써 부여 지역을 신라의 행정 구역으로 완전히 편제하였다. 정세가 안정되자 신라는 686년 2월 사비주(泗沘州)를 군(郡)으로 조정하고 대신 웅천군(熊川郡)[지금의 충남 공주]을 주(州)로 승격시켰다. 이후 757년(경덕왕 16) 12월 신라의 지방 행정 조직을 종합적으로 개편할 때 웅천주를 웅주(熊州)로 고치고 1주(州)-1소경(小京)-13군(郡)-29현(縣)을 거느리게 하였는데, 부여 지역에는 가림군(嘉林郡)[지금의 임천면 일대]과 부여군(扶餘郡)[지금의 부여읍 일대], 한산현(翰山縣)[지금의 홍산면 일대], 석산현(石山縣)[지금의 석성면 일대] 등이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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