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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934
한자 李完植
영어공식명칭 Lee Wansik
이칭/별칭 이화중(李華仲),이국보(李菊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7년 9월 3일연표보기 - 이완식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 이완식 서울에서 독립운동 활동
활동 시기/일시 1921년 10월 - 이완식 제령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 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25년 5월 - 이완식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39년 12월 - 이완식 정감록을 인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운동을 전개
몰년 시기/일시 1943년 3월 5일연표보기 - 이완식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77년연표보기 - 이완식 건국포장 수훈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완식 건국훈장 애국장 수훈
출생지 반산리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반산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이완식(李完植)[1867~1943]은 1867년 9월 3일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반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중(李華仲), 이국보(李菊甫)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직후 3·1 운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1919년 11월 서울에서 독립운동에 뜻을 같이하는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듬해인 1920년 전국을 돌며 2,600원을 모집하였으며, 상해임시정부 연락 요원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군자금을 전달하려다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1921년 10월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고 서울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25년 5월 출옥하였다.

이완식은 출소 후에도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9년 12월 21일 『정감록(鄭鑑錄)』 비결(秘訣) 중 “왜(倭)는 호호망어선(胡胡亡於鮮)”이란 문장을 이용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활동하였다. 일본은 망하고 조선은 독립하여 동양을 지배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다 재차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금고 6월 형을 선고받고 전라북도 군산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고문으로 인한 정신질환이 심해져 출옥하였다. 1943년 3월 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이완식의 공적을 기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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