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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1498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정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2년 12월 20일 - 「석련지와 백제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 9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3년 1월 21일 - 「석련지와 백제탑」 부여 석조 보물 제194호 지정
수록|간행 시기/일시 1992년 - 「석련지와 백제탑」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석련지와 백제탑」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로 변경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석련지와 백제탑」 부여 석조 보물로 변경 지정
관련 지명 석련지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동남리 산16-1]지도보기
관련 지명 백제탑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동남리 364]지도보기
채록지 동남리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지도보기
성격 설화
주요 등장 인물 석공|소정방
모티프 유형 충신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부여 석조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

[개설]

「석련지와 백제탑」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국립부여박물관에 있는 부여 석조와 정림사지박물관에 있는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관련하여 전하는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석련지와 백제탑」은 1992년 한민에서 발행한 『여기가 부여다』에 수록되어 있다.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에서 마을 주민이 구술한 내용이 채록되어 있다.

[내용]

옛날 백제에 한 늙은 석공이 살고 있었다. 똑같은 돌이라도 석공의 손을 거치면 돋보이게 되므로 솜씨가 소문이 나서 궁궐에서도 불러 일을 맡겼다. 왕이 석공에게 자신이 연꽃을 좋아하니 침실 앞에서 항상 연꽃을 볼 수 있도록 돌못[석조(石槽)]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왕의 말을 들은 석공이 곧바로 돌못을 만들어 왕의 침실 앞에 놓은 뒤 연꽃을 옮겨 심었다. 왕은 돌못에 핀 연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그 뒤 의자왕(義慈王)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연꽃이 더욱 탐스럽게 피었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나라군이 쳐들어와서 백제가 멸망하게 되었다. 이때 사비성(泗沘城)을 점령한 장수가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라는 장수였다. 소정방이 사비성을 점령하고 나서 석공을 불러 ‘대당평제국비명(大唐平濟國碑銘)’이라는 글씨를 석련지(石蓮池)에 새기라고 하였다. 석공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집에 돌아왔고, 부소산(扶蘇山)에 올라 백제 궁궐을 바라보며 슬픔에 잠겼다.

며칠 뒤 석공은 소정방의 부름을 받아 어쩔 수 없이 궁궐로 들어갔다. 그리고 석련지를 한참 바라보다가 글씨를 새기기 위하여 망치를 들었다. 석공이 망치로 돌을 두들기는데 돌소리가 아니라 쇳소리가 나더니 망치가 튕겼다. 매우 이상하여 다시 한번 망치질을 하였는데 망치 끝에서 불꽃이 튀기더니 끌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석공은 소정방에게 돌아가 돌이 단단하여 글씨를 새길 수 없다고 전하였다. 석공의 말을 들은 소정방의 부하가 석공의 말이 사실인지 보려고 똑같이 망치를 쳤으나 불꽃이 튀며 망치가 튕겨 나왔다.

자초지종을 들은 소정방이 석공에게 이번에는 백제탑(百濟塔)에 글씨를 새기라고 명하였다. 석공은 백제탑에도 감히 글씨를 새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고, 탑 앞에 와서도 망치를 대지 않았다. 석공은 망국의 신세를 한탄하며 탑 앞에 주저앉았다. 바람이 매우 거세게 불고 비가 오기 시작하였지만, 석공은 탑 앞에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비가 세차게 퍼붓자 석공의 몸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결국 석공은 탑 앞에 앉은 채로 목숨이 끊어지고 말았다.

[모티프 분석]

「석련지와 백제탑」의 주된 모티프는 ‘충신’이다. 석공의 행동에는 백제인으로서의 망국의 한이 담겨 있으며, 옛 국가에 대한 충절을 지키고자 하는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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