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98
한자 扶餘 鄭興仁- 墓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능묘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안로7번길 20[능산리 산30-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행묵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363년 - 정흥인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436년 - 정흥인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2010년 12월 30일연표보기 - 부여 정흥인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182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정흥인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부여 정흥인의 묘 -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안로7번길 20[능산리 산30-1]지도보기
성격 능묘
관련 인물 정흥인|진씨
소유자 종중
관리자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충청남도 기념물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정흥인의 묘.

[개설]

정흥인(鄭興仁)[1363~1436]은 본관이 하동(河東)으로 고려 때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정지연(鄭芝衍)의 후손이자 조선 전기 문신 정인지(鄭麟趾)[1396~1478]의 아버지이다. 조선 태종 때 내직별감(內直別監), 석성현감(石城縣監) 겸 권농병마단련판관(勸農兵馬團練判官)을 역임하였고, 이후 충적덕보조공신(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大匡輔國崇祿)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서운관사(議政府領議政 兼 經筵書雲觀事)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추증되었다. 정흥인은 노년에 부여현에 거주하였으며, 정흥인의 묘소가 후손들의 묘와 함께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조성되어 있다. 부여 정흥인의 묘는 2010년 12월 30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8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충청남도 기념물로 변경되었다.

[위치]

부여 정흥인의 묘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능안로7번길 20[능산리 산30-1]에 있다.

[형태]

부여 정흥인의 묘는 부인과의 합장묘인데, 고려 때 분묘 형식을 따르는 조선 전기의 묘제 양식을 잘 보여 준다. 봉토 주변에는 팔각의 호석(護石)이 설치되어 있다. 호석은 잘 다듬은 판석을 80㎝ 높이로 팔각으로 둘렀으며, 분묘 주변의 석상은 장방형의 판석을 2매로 동서에 배치하여 다른 상석보다 규모가 크다. 호석을 비롯하여 사용된 석재는 모두 백제 시대의 것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묘역을 구획하기 위한 경계석과 묘 앞쪽의 석축단 역시 백제 시대의 지대석, 문하방석, 소매석, 면석 등을 재사용하였다. 무덤 앞 가장 상단에는 큰 상석과 묘표, 2단에는 지붕돌이 소실된 장명등과 문인석 2기가 배치되어 있다.

[금석문]

부여 정흥인의 묘 묘비에는 정흥인의 부인이자 정인지의 어머니 진씨(陳氏)와 합장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명문은 선명하지 않다.

[현황]

부여 정흥인의 묘 아래에는 정흥인의 6대손이자 임진왜란 시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정득열(鄭得說)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부여 정득열 묘 및 비 인근에는 묘비를 비롯하여 무인석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아래에는 정득열의 시신을 진주에서 옮겨 온 충복(忠僕) 백종(白從)의 묘가 있다. 이외에도 후손들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정흥인의 묘는 조선 전기에 조성된 분묘로 부여 지역에서 보기 드문 전형적인 사대부 집안의 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묘비나 문인석, 장명등도 보존 상태가 원형에 가까워 가치가 높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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