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638
한자 扶餘 王興寺址
영어공식명칭 Wangheungsa Temple Site, Buyeo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
시대 고대/삼국 시대/백제
집필자 홍보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577년 - 부영 왕흥사지 왕흥사 창건
문화재 지정 일시 1982년 8월 3일연표보기 - 부여 왕흥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1년 2월 5일연표보기 - 부여 왕흥사지 사적 제427호로 승격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부여 왕흥사지 사적으로 변경 지정
소재지 부여 왕흥사지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37-2 지도보기
성격 절터
지정 면적 550,402㎡
관리자 부여군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 있는 백제 시대의 절터.

[개설]

부여 왕흥사지(扶餘 王興寺址)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등의 사서에 유래와 창건 연대뿐만 아니라 왕이 강을 건너 사찰에 행차한 사실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백제 사비 시기의 중요한 사찰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1934년에는 부여 왕흥사지에서 ‘왕흥(王興)’명의 고려 시대 기와가 수습되어 왕흥사로 비정되었다. 이후 부여 왕흥사지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82년 8월 3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33호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2월 5일 사적 제427호로 승격되었고, 그 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어 사적으로 변경되었다. 지정 면적은 55만 402㎡이다.

부여 왕흥사지는 1934년의 첫 발굴 이후 모두 2023년 현재까지 15차례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져 사역의 중심 가람 대부분이 확인되었다. 조사에 확인된 건물지는 중앙 접안 시설, 목탑지, 금당지, 강당지와 동·서 회랑지, 동·서 건물지, 동·서 부속 건물지, 사역 서편 진입 시설과 서편 대지와 건물지, 경계 축대, 동편의 기와 가마 터 등이다.

[형태]

금강에서 부여 왕흥사지로 진입하는 남쪽에 있는 동서 방향으로 만든 석축 경계 축대는 길이가 110m이고, 남북 방향 축대는 길이가 11.2m이다. 경계 축대 중앙부에는 목탑지 방향으로 진입하기 위한 중앙 진입 시설이 축대와 직교되게 ‘T’자형으로 배치되었다. 진입 시설의 규모는 너비 13m, 길이 63.1m, 현존 높이 3.4m이다. 중앙 진입 시설과 경계 축대 연접부에 너비 13m의 공간이 있는데, 사찰 내부로 통하는 중문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서편 진입 시설은 중앙 진입 시설로부터 서쪽으로 55.3m, 사역 서편 경계로부터 6m 떨어진 지점에 너비 9m로 조성되었다.

중심 사역 전체를 대상으로 성토하여 평탄대지를 조성하고, 건물들을 축조하였다. 목탑지는 기단 하부만 남아 있으며, 각 변 규모가 12.2m로 평면이 방형이다. 목탑지의 기단 측면이 유실되었는데, 석재로 된 이중기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심초부는 목탑지의 기단 중앙부에 있다. 상부에 적심 시설이 있고, 그 아래에 방형의 석재가 놓여 있으며, 석재 남단 중앙부에 가로 16㎝, 세로 12㎝, 높이 16㎝ 크기의 장방형 사리공이 뚫려 있었다. 사리공은 단면 사다리꼴의 화강암재로 덮여 있었다. 사리공에서 청동제 사리합 내부에 은제 사리병이, 은제 사리병 내부에 금제 사리병이 담겨 있었다. 사리공이 뚫려 있는 방형석 상면에서 각종 금·은 장신구, 옥제품, 구슬류 등이 출토되었다. 기단의 북편·동편·서편 중앙부에 계단지가 확인되었는데, 남편 중앙부에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편의 계단지에서 북쪽의 금당으로 이어지는 보도석이 확인되었다.

금당지는 백제 사비 시기와 고려 시대의 것이 중첩하여서 확인되었다. 백제 사비 시기 금당지는 목탑지로부터 북쪽으로 7m 떨어져 있으며, 동서 22.7m, 남북 16.6m의 장방형이다. 기단토만 최대 90㎝ 남아 있고 상부 건물의 규모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기단 외측의 마감 시설은 남아 있지 않다. 고려 시대의 금당 기단 외측에 가구식 계단석이 사용되었고, 기단토의 높이 등을 고려하였을 때, 이중 기단의 가구식 기단 구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당지 남쪽 중앙부에서는 가구식 계단석이 확인되었는데, 계단지로 추정된다.

강당지는 목탑지 중심으로부터 북쪽으로 45m, 금당지 중심으로부터 22.9m 떨어져 있다. 강당지는 일부만 확인되어 내부 구조는 알 수 없다. 기단 전체 규모는 동서 46.7m, 남북 19.5m의 장방형이다. 기단은 전면과 측면을 가공한 화강암석을 가공하여 지대석과 면석 등이 결구된 가구식 구조이다. 강당지 서편에는 약 0.8~1m의 간격을 두고 나란하게 부속 건물지가 배치되었고, 동·서 건물지와는 각각 1.5m와 0.9m 떨어져 있다. 강당지 서편 부속 건물지의 기단은 동남측 모서리를 제외하고 평적식 와적 기단을 조성하였다.

서회랑지는 동서 너비 5.3m, 길이가 16.5m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단 외측은 석재와 기와를 혼용하여 조성하였고, 바깥에는 배수를 위한 구가 설치되었다. 서회랑 북편에는 서축 배수 시설이 관통하고, 그 북쪽에는 서편 건물지가 배치되었다. 동회랑지는 목탑지 중심으로부터 동편으로 24.2m 떨어져 있으며, 동서 너비 5.3m, 남북 길이 11.2m이다. 동회랑지 북측에 동서 13.7m, 남북 43.95m의 건물지가 있다.

[특징]

부여 왕흥사지는 탐-금당-강당이 남북 중심축을 기준으로 나란히 배치되고, 주위를 회랑이 둘러싼 1탑 1금당식 가람이다. 중심 사역 주위에는 각종 건물이 배치되었고, 특히 사비도성에서 금강을 건너 중심 사역과 서측의 건물로 진입하는 시설이 조성되었다. 사역 바깥의 동쪽 구릉 사면에는 같은 시기의 기와 가마군이 배치되었는데, 왕흥사의 각종 건물에 필요한 기와를 수급한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부여 왕흥사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의 사서에 의하면, 600년(법왕 2)에 짓기 시작하여 634년(무왕 35)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왔으나, 특히 2005년도의 목탑지 발굴 조사에서 출토된 창왕(昌王)명 사리기의 명문 기록을 통하여 사서의 기록보다 23년이나 빠른 577년(위덕왕 24)에 창건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목탑지에서 출토된 사리기는 현재 백제의 불교 사찰에서 가장 시기가 빠른 것으로 확인되어 백제 사리 봉안의 시작 시점과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게 되었다. 또한 부여 왕흥사지에서 확인된 가람은 사비 천도 직후에 세워진 부여 정림사지부여 군수리 사지, 부여 능산리 사지 등과도 일치하여 백제 사비 시기 가람 구조와 특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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