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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 전후부터 후삼국시대까지 충청북도 충주시의 역사와 문화. 중국의 『삼국지(三國志)』에는 3세기 한반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한반도의 중부와 남부 지역은 마한·변한·진한으로 구분되었으며, 70여 개의 소국(小國)이 있었다. 백제와 신라도 각각 백제국(伯濟國)과 사로국(斯盧國)이란 이름의 소국으로 등장하여 주변 소국들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하였다. 한국 고대사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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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사고는 1390년(공양왕 2)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나는 1592년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의 중요 전적과 조선 전기의 역대 실록 그리고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던 창고의 하나였다. 그러나 1592년 4월 28일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패하여 충주시가지가 불탈 때 시가지 내에 있던 충주사고와 그에 보관된 서책들도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역사를 기록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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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던 고구려의 지명. 국원성은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던 고구려가 한반도 남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확보한 거점 지역인 오늘날 충주 지역에 성을 쌓고 붙인 이름이다. 이 지역은 신라가 차지한 후 진흥왕 대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으로, 경덕왕 대에는 중원경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려가 건국되고 나서 태조에 의해 충주라는 명칭으로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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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설치된 행정구역. 6세기 중엽 신라의 진흥왕은 활발하게 영역을 확장하며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그 결과 동북쪽으로는 함경도의 마운령과 황초령, 서북쪽으로는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였다. 557년(진흥왕 18)에는 고구려가 장악했던 국원, 즉 충주 지역에 소경(小京)을 설치하였다. 이듬해 귀족 자제와 왕경(王京) 6부(部)의 부유한 백성을 국원소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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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3년(고종 40) 9월 충청북도 충주시 금당협에서 고려군이 몽고군을 격파한 전투. 금당협 전투는 1253년 몽고군의 제5차 침입 때 금당협 지역에 침입한 몽고군을 충주의 창정(倉正) 최수(崔守)가 매복하였다가 격퇴한 전투로, 충주산성 전투의 서전이라 할 수 있다. 금당협의 위치는 기록에 따라 차이를 보인다. 촌상우차랑(村上友次郞)이 1015년에 쓴 『최근지충주(最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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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유학산성에서 다인철소민과 몽고군 사이에 있었던 전투. 고려시대 철소(鐵所)는 생활 용구나 무기류의 제작에 필요한 철을 생산하거나 제작하는 특수민들의 집단 거주지이다. 다인철소는 지금의 충주시 대소원면 지역으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충주 서쪽 30리”에 있었다 하고,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당시 이 지역이 ‘충주목 이안면’으로 편성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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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옛 이름.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대원(大原)과 예성(蘂城)이 등장한다. 그 중 대원은 고려 성종이 정한 별호라고 명기하고 있기 때문에, 성종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충주를 대원이라 부른 사례가 너무 단편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에 유래를 확인하기는 어렵고, 다만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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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5년(고종 42)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미륵리 하늘재에서 충주 정예병이 몽고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대원령은 삼국시대는 계립령·마골재, 고려시대는 대원령, 지금은 하늘재라 불리는 고개이다. 지금의 충주시 남쪽에 있는 고개로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지리적인 요충지이다. 이 때문에 대원령 일대는 충주 및 월악산과 연결되어 몽고군과의 중요한 격전지가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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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의 명칭. ‘충주’라는 지명은 고려시대부터 사용되었다. 그 이전에는 ‘국원’과 ‘중원’이 공식 명칭으로서 삼국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충주의 연혁을 다루고 있는 주요 사료들에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이 지역을 장악하고 설치한 국원성을 언급하면서 공통적으로 “혹은 미을성이라고 한다.”는 점을 주석으로 기재하고 있다. 즉 고구려에 의해 국원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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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에 분포하는 불과 연기를 이용한 통신 수단과 시설. 봉수는 가락국의 수로왕 설화에서 보이듯이 삼국시대부터 실시되었으며, 고려시대 1149년(의종 3) 조진약(曺晋若)의 건의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비되었다. 조선시대 세종대에는 봉수대 시설, 봉군(烽軍)의 신분, 봉화 홰(炬)의 수를 다시 정하고, 봉수의 노선을 구분하여 봉수제도의 근간을 마련하였다. 18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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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 예성군에 봉해졌던 충주양씨 시조. 본관 충주(忠州). 탐라국왕 양을나(梁乙那)의 후손으로 충주양씨의 시조이다. 양능길(梁能吉)은 고려가 건국되고 후삼국이 통일될 때 공을 세워 삼중삼한대장군에 오르고 예성군에 봉해졌다. 본래 양능길은 제주양씨였으나 예성(중원소경의 별칭)을 식읍으로 하사받으면서 후손들이 양능길을 시조로 하고 940년(태조 23) 중원소경이 충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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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용장(用章). 아버지는 검교첨사(檢校詹事) 양공소(梁公紹)이며, 아들은 어사중승(御史中丞) 양문형(梁文熒(炯))이다. 양원준은 아버지의 외고조 삼한공신증대위 최영휴(崔英休)의 문음(門蔭)으로 1108년(예종3) 양온서사동정(良醞署史同正)이 되었다. 같은 해 6월 좌우위사(左右衛史)를 제수받은 뒤 상금국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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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사(高麗史)』에는 충주의 다른 이름으로 예성(蘂城)과 대원(大原)이 등장한다. 그 중 예성은 대몽항쟁의 공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별호인데, 이후부터 충주라는 공식 명칭과 함께 별칭으로 불렸다. 현재까지도 충주의 학교·단체 등의 이름에 많이 사용되고 있다. 『고려사』에는 예성에 “1255년(고종 42)에 다인철소(多仁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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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몽고군의 충주성 공격 때 충주 지역 사람들이 월악산의 산신에게 제사 지내던 사당. 1256년(고종 43년) 4월 29일에 몽고군이 충주성을 공격하자 관리들과 노약자들은 제대로 항거하지 못하고 월악신사로 올라갔다. 몽고군이 이들을 추격하는데, 때마침 구름과 안개가 끼고 비바람과 번개와 벼락이 함께 들이쳤다. 이에 몽고군은 신이 난민을 돕는 것이라 여기고 물러갔다고 한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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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남로(南老), 호는 농암(聾庵)·농객(聾客). 할아버지는 대사간을 지낸 유상재(柳尙載), 아버지는 통덕랑에 오른 유봉정(柳鳳庭), 어머니는 김징(金徵)의 딸이다. 아들로 유동휘(柳東暉)가 있다. 1694년(숙종 20) 충주에서 태어난 유수원(柳壽垣)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한성(현 서울)의 친척 집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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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로 낙향한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복원(復元). 아버지는 교위를 지낸 유자공(柳自恭)이고, 아들은 통정을 지낸 이승선(李承善)이다. 1491년(성종 22) 태어난 유정(柳貞)은 1516년(중종 11) 생원시에 급제하고, 1519년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충주로 낙향해 살았다. 1536년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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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이인정(李寅丁)은 1549년(명종 4) 4월 18일 강원도 영월에 유배 중이던 이홍남(李洪男)이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동생 이홍윤(李洪胤)과 처남 배광의(裵光義)가 편지로 역적모의를 했다고 고변한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 사건으로 다수의 충주 지역 인사들이 연루되어 체포되었으며, 이홍윤의 이복동생 이후정(李後丁)의 증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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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9년(명종 4) 4월 충청북도 충주 출신 이홍남이 이홍윤·배광의가 역모를 꾀했다고 거짓 고변한 사건.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의 외척인 소윤파 윤원형(尹元衡) 등이 실권을 잡고 인종의 외척인 윤임(尹任) 일파, 즉 대윤파를 반역죄로 몰아 숙청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났다. 1547년(명종 2)에는 전라도 양재역(良才驛)에서 “간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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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조선을 침입한 왜군과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의 전쟁 1592년 4월 13일에 일본군이 부산포에 상륙함으로써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포에 이어 동래를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진격하여, 상주 전투에서 이일(李鎰)을 격파하고 충주에서 신립(申砬)을 깨뜨린 뒤 이렇다 할 전투도 치르지 않고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선조는 의주로 피난가고, 조선은 7년 동안 일본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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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과 경상도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던 고개.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과 경상북도 문경 사이에 있는 고개로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서울과 동래(부산) 사이를 연결하는 교통로였고,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였다. 조령은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이 있으며, 이들 관문과 성벽은 1708년(숙종 34)에 축조되었다. 이 중 제3관문을 지나면 경상북도이다. 추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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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 6세기경 신라는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었던 충주 지역을 빼앗은 뒤 그곳에 국원소경을 설치하였다. 7세기에 접어들어 한반도에서는 고구려·백제·신라 3국과 중국의 당, 일본까지 관련된 격렬한 전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신라는 백제를 통합하고 한반도의 중남부 지역을 장악했으며, 고구려는 당에 의해 멸망되고 그 땅에서 발해가 건국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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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시의 별칭. 고려시대 금석문인 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와 사자빈신사지석탑(師子頻迅寺址石塔)에는 충주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중주(中州)’가 등장한다. 하지만 『고려사(高麗史)』 등의 역사서에는 중주에 대한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공식적인 명칭이라기보다는 민간에서 사용한 별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州)’는 신라 이래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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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창동리에서 발굴된 조선 전기건물지와 야철지 유적지. 충주 창동리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5년 중앙문화재연구원에서 충주 용두~금가 간 우회도로 건설공사로 인하여 실시되었다. 이곳은 본선이 통과하는 구간이 아닌 본선과 칠금~중앙탑 간 지방도를 연결하는 나들목을 만들며 확인된 유적이다. 충주 창동리 유적은 달천강과 남한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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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7년(순조 17) 충청북도 충주 출신 채수영이 일으킨 역모 사건. 1802년(순조 2) 김조순(金祖淳)의 딸이 왕비로 책봉된 뒤 1804년 정순왕후가 죽자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비변사를 비롯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였다. 이로부터 안동김씨 세력의 세도 정치가 실시되었으며, 이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뇌물 거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수령들은 백성들을 더욱 수탈하였다.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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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 초기에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조선총독부는 1914년 3월 1일을 기하여 부·군의 구역을 개편하고, 군의 수를 대폭 감축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1910년 당시 12개 부, 317개 군은 크게 감축되어 220개 군으로 줄어들어 들었고 109개 군이 폐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충청북도에서도 청풍·청안·문의·회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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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있었던 지방 행정구역. 현재 충청북도 충주 지역은 신라의 중원경에서 고려 940년(태조 23년) 충주(忠州)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충주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983년(성종 2년)에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이곳에 목(牧)이 설치되었다. 이후 고려의 지방제도 개편에 따라 부분적으로 행정 단위의 명칭이 변경되기도 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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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 왕실의 중요한 서책과 문서를 보관하였던 창고. 충주는 역사상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관방(關防)으로서 중요한 요충지이고 한강의 수운(水運)을 이용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용이하고 교통이 편리하며 내륙 깊숙이 위치한 도시인 점이 고려되어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다. 사고 관리는 충청도관찰사와 충주목사의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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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 12월 충주성에서 노군과 잡류별초를 중심으로 한 충주민이 몽고군을 물리친 전투. 몽고의 지나친 조공 요구로 고려와 몽고의 화의가 깨어지자 몽고는 저고여(箸古與) 살해 사건을 핑계로 1231년 8월 고려를 침입하였다. 1231년 8월 살리타[撒禮塔]가 이끄는 몽고군은 압록강을 건너 함신진(咸新鎭)[지금의 의주]을 함락하고,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거쳐 12월 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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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 충주시는 중부 내륙 광역권의 거점 도시로 수도권에 인접해 있고 풍부한 용수로 기업하기 좋은 산업 기반이 구축된 도시이다.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 전국 교통망의 중심이며, 남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중원 문화의 중심 도시이자, 충주호와 월악산, 수안보온천·앙성온천·문강온천이 있는 국제적인 관광 도시이다. 충주시를 상징하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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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성씨. 충주유씨는 유긍달(劉兢達)을 시조로 한다. 유긍달은 충주의 호족 세력으로 918년(태조 1) 딸 신명순성태후가 고려 태조 왕건의 제3왕비가 됨으로써 강력한 지방 세력으로서 뿐만 아니라 중앙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왕실의 외척 세력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후손들이 유긍달을 시조로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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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을 시조로 하고 충주를 본관으로 하는 충청북도 충주시 세거 성씨. 충주최씨는 최승(崔陞)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최승 이후 계보를 알 수 없어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최공의(崔公義)를 중시조 겸 1세조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주최씨는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하여 문하시중을 지낸 최옥(崔沃)을 비롯하여 문하시랑을 지낸 최백청(崔伯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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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사법·행정·군사적 권한을 지닌 종2품 관직. 조선 초기에는 일반 행정과 군정이 구별되어 있었으나, 태종 이후 감사가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순찰사를 겸하였다. 또한 감영 소재지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의 직책까지도 겸하게 됨으로써 그 권한이 더욱 확대되어 도의 행정, 사법, 군사의 전반을 통괄하고 관할구역 내의 여러 수령을 감독하는 방대한 권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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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충주 지역에서 충청도관찰사가 업무를 집행하던 관청. 충청북도 충주시에 두었던 충청감영에는 중앙의 6조를 그대로 옮긴 6방(이·호·예·병·형·공)을 설치하여 향리를 통해 감사가 도(道)의 사무를 집행하였다. 조선은 점차 국가의 기틀이 잡혀감에 따라 지방행정조직을 고려의 5도 양계에서 발전된 8도로 정비하였다. 조선의 8도는 경기·충청·전라·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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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할아버지는 증호조판서 허형(許蘅)이고, 아버지는 증이조참판 행훈련원부정 허감(許瑊)이며, 어머니는 밀양박씨이다. 허초는 1519년(중종 14)에 을묘사화 때에 은퇴하여 벼슬에 나가지 않고 충주에 살면서 학자로 활동을 하였다. 특히 1539년(중종 34) 유석이라는 자가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