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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대구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을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된 단체. 10월항쟁은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민중들이 미군정의 탄압과 실정을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사건이다.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발포하여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며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평화적 시위는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시민, 학생이 합세하여 관공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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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 13일 대구에서 열린 10월항쟁 당시 순직한 경찰을 위한 미군정 주도의 합동 위령제. 1946년 10월 대구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이 전국으로 파급되는 과정에서 관민의 희생이 컸다. 10월항쟁 당시 희생된 경찰 규모는 조사 기관마다 서로 달랐다. 10·1사건대책위원회가 1946년 10월 20일 발표한 ‘10·1사건 조사 통계표’에 따르면 대구·경상북도의 관리 사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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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항쟁으로 인하여 발생한 인적·물적 피해.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은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식량 정책의 실패 등에 항의하며 대구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발생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대구 시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고,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며 두 달간 계속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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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미군정의 실정을 비판하고 개선을 요구하며 시작된 대규모 민중 항쟁. 10월항쟁은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식량정책의 실패 등에 항의하며 대구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발생하였다. 경찰의 발포로 대구 시민 수백 명이 희생되었고, 이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며 두 달 동안 계속되었다. 농민뿐만 아니라 노동자, 학생,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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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대구에서 노동자와 학생, 시민이 미군정의 실정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항쟁. 10월항쟁은 1946년 대구에서 9월총파업의 와중에 노동자와 학생, 시민들이 미군정의 실정 개선을 요구하며 일으킨 광복 후 최초 항쟁이다. 진상규명과 명예 회복을 과제로 안고 있는 역사적 사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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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에서 발행이 추진된 다양한 잡지. 3.1운동의 영향으로 인하여 일제는 식민 지배 정책을 무단통치에서 문화 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의 한글[대체로 국한문혼용] 신문과 잡지의 발간을 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 잡지의 발행은 세계정세와 사조, 식민지 사회·경제 문제, 독립과 해방, 문학과 예술 등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식민지 조선의 실태와 전망을 제고할 수 있는 조건을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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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대구광역시 동구 둔산동에서 발생한 공동묘지 선정 반대운동. 동구 둔산동 주민들이 급수의 위생문제, 동촌유원지의 풍치문제, 교육문제, 교통문제 등을 근거로 공동묘지 선정에 대해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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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고시에 따라 1937년 5월 1일부터 시행된 대구 도시계획. 대구부는 1933년 7월부터 행정구역 조사에 착수한 이래 1937년 3월 「조선총독부 고시 제186호」에 따라 1937년 5월 1일부터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대구부는 대구 시가지 계획구역·가로망·토지 구획정리 지구 결정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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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5월 10일 대구에서 도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실시되었던 지방선거. 대구의 경북도의원 선거는 1949년 7월 4일에 공포된 법률 제32호 「지방자치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지방자치법」은 1949년 12월 15일에 개정되었다. 대구의 경북도의원 선거는 1950년 12월에 「지방자치법」에 따라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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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4월 25일 대구시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실시하였던 지방선거. 대구시의회 의원 선거는 1949년 7월 4일 공포된 법률 제32호 「지방자치법」을 근거로 하고 있다. 「지방자치법」은 1949년 12월 15일에 개정되었다. 대구시의회 의원 선거는 1950년 12월 「지방자치법」에 따라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6·25전쟁으로 연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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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대구의 각 대학에서 전개된 유신체제 반대운동. 1973년 반유신운동은 박정희 정권이 독재 기반을 강화하여 영구 집권을 꾀하였던 유신체제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하여 대구의 각 대학에서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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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28일 개최된 2·28민주운동 1주년 기념식. 2·28민주운동은 대구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여 자발적, 민주적으로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 2월 28일 당국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대구 시내 모든 초중고교생에게 등교를 강요하였다. 대구고등학교와 경북고등학교·경북여자고등학교 등 대구 지역 8개 고등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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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대구에서 개최된 2·28민주운동 1주년 기념 학생 예술제. 2·28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 자유당의 장기 집권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불의와 부패에 항거하여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자발적, 민주적으로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다.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이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의와 부정을 저지르자 대구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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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과 1961년 2·28민주운동을 역사적으로 기념하기 위하여 추진된 2·28기념탑 건립 활동. 2·28민주운동은 1960년 이승만 독재정권이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저지른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여 대구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주화운동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발생한 최초의 민주화운동인 2·28민주운동은 3·15마산의거로 이어졌고, 이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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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일어난 학생 민주운동. 2·28민주운동은 1960년 2월 28일에 예정된 민주당의 강연회에 학생들이 참여할 것을 우려한 자유당 경북도당과 공립학교 당국이 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지시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각 공립학교의 2월 28일 일요일 등교 지시는 2월 25일에 학생들에게 하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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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부터 1961년2월까지 있었던 2·28민주운동의 원인인 일요 등교 지시의 책임 소재를 밝히기 위한 진상 조사. 1960년 2월 28일 이승만 정권은 야당의 선거 유세장에 가지 못하도록 일요일인데도 대구 시내 모든 초중고교생에게 등교를 강요하였다. 대구 지역 8개 고등학교 학생들은 당국의 부당한 일요 등교 명령에 항거하여 ‘자유와 민주주의를 실천하자’, ‘학생들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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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대구에서 「국가보안법」 제3차 개정안에 반대하며 벌인 민주주의 운동. 이승만 정권 말기 여당인 자유당은 1958년 8월 11일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상정하였다. 야당은 강력히 반대하며 「국가보안법」 개악 반대 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자유당은 1958년 12월 24일 300명의 무장 경관을 동원하여 저항하는 야당 의원들을 국회에서 폭력으로 몰아내고 대공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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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구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파업 투쟁. 2·7구국투쟁(二·七救國鬪爭)[일명 2·7총파업 또는 2·7폭동]은 1948년 1월 8일 유엔조선위원단이 유엔 감시 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통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서울에 오자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일으킨 파업 투쟁이다. 1948년 2월 5일 군정장관 아서 러취(Archer L. Lerch)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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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1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개최한 통일 궐기대회. 3·1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는 3·1절 제42주년을 맞아 통일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고 대구 시민의 통일 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민족통일경북도연맹이 개최한 통일 궐기 대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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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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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대구 달성공원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위원회 주최로 열린 시민대회. 1947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대구시위원회는 광복 후 두 번째로 맞는 3·1절 기념식을 3·1운동 기념과 함께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안을 지지하는 시민대회로 개최할 계획이었다. 시민대회는 대구의 경찰 당국이 ‘3·1일 폭동설’에 대비하여 무장 경관과 기관총 부대를 대회 장소에 출동시키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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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에서 발생한 만세 시위.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는 대구에서 일어난 첫 만세 시위로,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으로 만세 시위가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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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28일 대구의 대구사범대학에서 동맹휴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열린 대회. 3대학생맹휴해결연합대회(三代學生盟休解決聯合大會)는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 강당에서 대구의과대학[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대구사범대학, 대구농과대학[현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등 3개 대학 학생들과 관계자들이 모여 국립 서울종합대학교 설립안[약칭 국대안] 반대 동맹휴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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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5일 대구 대명동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4·15 대명동 만세 시위는 1910년 8월 일제의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무단통치로 인한 폭압적 분위기와 경제 침탈 속에서 대구가 일본 우위의 전형적인 식민도시로 전락하는 가운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되어 제기된 독립선언과 3·1운동의 영향으로 발생하였다. 대구에서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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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달성군을 비롯해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주·민족 운동. 한국 전쟁 이후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이승만 단일 체제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하여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관권의 개입이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 당시 대구는 대표적 야당 도시로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민주당의 선거 구호가 대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민주당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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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4월 대구 지역 4개 대학교 학생들이 벌인 학원 민주화운동. 1979년 12·12사태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권이 학원을 정치적으로 장악할 목적으로 1960년 해체되었던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려 하였다. 경북대학교·영남대학교·계명대학교·대구대학교 등 대구 지역 4개 대학교 300여 명의 학생들은 학내 민주화 및 자율화와 민주주의 실현을 위하여 1985년 4월 10일 4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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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대구 지역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정치운동. 4·19혁명 이후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외무장관 허정의 과도정부가 1960년 4월 27일 수립되었다. 여당인 자유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제4대 국회는 해산되지 않았다. 국민들이 국회의 즉시 해산을 요구하였으나 허정 과도정부는 개헌을 단행하려 하였다. 1960년 5월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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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대구에서 발생한 5·10선거 반대 시위. 1948년 3월 3일에 행정명령 제13호에 의하여 선거위원회의 권한을 부여받는 국회선거위원회가 조직되고, 3월 13일에 남녀평등의 보통선거제를 기본 골격으로 하는 선거공보 제1호가 공포되었다. 대구는 3개의 선거구로 편성되었고, 대구와 경북 선거를 총괄할 선거 사무국은 경찰청 내에 설치되었으며, 선거 사무국 국장은 도공보실장이 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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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전개된 6·25전쟁. 6·25전쟁(六·二五戰爭)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停戰) 및 정화(停火)에 관한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우리 민족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다. 6·25전쟁은 500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와 막대한 물적 피해를 낳은 전쟁이며, 유엔[UN]과 중국 공산군의 개입으로 세계 전쟁의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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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북한]이 발발한 전쟁에 대한 달성군의 상황.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이후 7월 14일 육군 본부가 대구로 이전하였고, 7월 16일 피난 정부도 대구로 후퇴하였다. 달성군은 8월 1일부터 구축된 낙동강 방어선에 힘입어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는 크게 입지 않았다. 특히 왜관-다부동 전투, 창녕-영산 전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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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중 일 전쟁 이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관변 군사 후원 단체. 7군 연맹(七郡聯盟)은 일제가 1937년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펼치면서, 달성군 등 7개 부, 군에 군사 후원을 위해 만든 관변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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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좌우 연합으로 구성된 8·15 광복 기념행사 준비 조직. 8·15기념행사준비위원회(8·15記念行事準備委員會)는 1946년 대구에서 광복 후 첫 8·15 기념행사를 좌우 정치세력의 연합으로 치르기 위하여 구성된 일시적 조직이었다. 1946년 6월 대구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과 같은 좌익정당과 한국민주당, 한국독립당과 같은 우익정당이 미군정과의 협의 아래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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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투쟁을 목표로 비밀 결사를 조직한 사건. 1928년 4월 하순부터 신간회 대구 지회의 노차용·장택원·정대종 등은 대구 시내 문상직의 하숙에서 만나 신간회나 근우회에서 야학이나 강연회 같은 수단으로 민족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직접적인 무력 투쟁 방략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비밀 결사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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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가창소작인조합(嘉昌小作人組合)은 1923년에 결성되었다.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계승하고 있는 농민 운동 단체이다. 1923년 지주 서우순에 대한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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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단체. 가창면 농업협동회는 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을 중심으로 소작인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농민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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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달성군 수성면 주민 300여 명이 가창면 순사주재소를 습격한 사건. 1922년 6월 수성면 주민이 가창면 소재의 초장(草場)에서 풀을 베다가 그곳을 지나가던 일본인 순사 야마모토[山本]로부터 민족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것이 발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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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 강대휘(姜大徽)[1918∼?]는 1918년 경상북도 달성군 논공면 위천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위천리]에서 태어났다. 1941년 평양 기성 의학 강습소(箕城醫學講習所)에서 3년을 수료한 후, 1942년 조선 총독부 의사 시험에 합격하고 대구에서 내과 의원을 운영하였다. 6·25 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 군대에 입대하여 약 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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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통일운동가. 강신용(姜信用)[?~?]은 광복 후 언론인으로 종사하면서 평화와 자주의 민족 통일에 공감하여 경북민족통일연맹에 가입하여 교섭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61년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하여 가두시위를 전개하고, 2대 악법 반대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4·19혁명 시기에 언론 활동과 민족·민주운동을 전개한 민족통일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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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강왕수(姜枉守)[1935-?]는 4·19혁명 시기 민주주의민족청년동맹 경북도연맹 사건을 일으킨 사회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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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월 대구에서 신흥 지식인들이 독립을 전망하며 결성한 사회단체. 강유원간친회는 1913년 3월 홍주일이 윤창기 등과 함께 해외 유학생 출신 인물과 국내 학생과의 규합을 위하여 결성한 사회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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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3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된 청년 지식인 문화 운동 단체.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는 1913년 3월 달성 친목회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국내외 청년 지식층을 규합하여 조직되었으며, 문화·학술 활동을 중점적으로 전개함으로써 달성 친목회가 추구한 독립운동의 외연을 확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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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윤옥(姜潤玉)[1889~?]은 1889년에 태어났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 거주하며 제조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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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윤옥(姜潤玉)[?~?]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4월 15일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에 있는 대구부 소속 조선인 공동묘지 안 제사를 지내는 건물 창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었다. 또 동일 장소의 공동묘지 북쪽 입구에서 조선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만세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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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강증룡(姜曾龍)[?~?]은 함경북도에서 태어났다. 1940년 대구사범학교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무우원(無憂園)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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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강학봉(姜學奉)[1898~1931]은 1898년 11월 3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나 제화노동자로 일하였다. 1919년 3·8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강학봉(姜學鳳)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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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공립소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계몽운동 단체. 개진협회는 1898년 대구공립소학교 학생들이 근대적 학문 토론을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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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2일 대구에서 결성된 좌우익 연합의 건국 준비 정치단체.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建國準備慶北治安維持會)는 1945년 8월 22일 대구에서 결성된 좌우익(左右翼) 연합의 건국 준비 정치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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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 설치 되었던 소방 조직체. 1939년 7월 3일 「경방단 규칙」을 제정·공포하고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하여 경방단(警防團)으로 통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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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 당시 일제가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시행한 소방 조직체. 1939년 말 경방단의 전국 조직 상황은 경방단과 분교를 합쳐 2천7백53개 조, 단원 18만 1천2백21명 수준이었다. 이는 소방조가 해체되기 전해인 1938년 말의 소방조 1천3백93개조, 조원(組員) 6만 9천4백14명에 비하면 크게 증가한 수이다. 또한 경방단 설치와 동시에 방공 설비의 강화와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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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의 전통적인 교통로를 대체한 근대 문명의 상징 경부선과 대구역. “차마다 모두 바퀴가 있어 앞차에 화륜이 한 번 구르면 여러 차의 바퀴가 따라서 모두 구르게 되니 우뢰와 번개처럼 달리고 바람과 비처럼 날뛰었다. 한 시간에 삼사백 리를 달린다고 하는데 차체는 안온해 조금도 요동하지 않으며 다만 좌우에 산천, 초목, 가옥, 인물이 보이기는 하나 앞에 번쩍 뒤에 번쩍하므로 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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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의 지도로 결성된 혁명적 대중운동 조직. 경북고무공장그룹은 1931년 하반기 경북고무공장의 노동자로 취업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경상북도 조직의 고광륜(高光輪)이 노동자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혁명적 노동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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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에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이 일제 경찰에 탄압을 받은 사건. 1927년 8월에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 좌익운동의 지도 기관인 제3차 조선공산당의 경북도기관이 조직되었다.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은 1927년 11월 대구 달성공원에서 제4차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대회[도 간부회]를 열고 조선공산당 경북 책임비서에 장적우(張赤宇), 고려공산청년회 경북 책임비서에 이목(李穆)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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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의료계 종사자들이 결성한 의료 단체. 1928년 10월 경상북도청 회의실에서 공의(公醫)들이 회의를 열고 5,000원의 기금으로 공의 전원을 발기인으로 한 경북공중보건협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후 1928년 12월 8일 대구극장에서 경상북도 내의 공의, 개업의, 의생, 약종상 등 회원 2,600여 명이 경상북도 도민의 보건위생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창립총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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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대구를 비롯한 경상북도 지역의 과수재배 농가들이 설립한 동업조합. 경북과물동업조합(慶北果物同業組合)은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과수재배 면적이 점차 확장되면서 생산기술의 개량 및 생산 증식, 출하 과물의 검사·품질의 통일·판로 확장 등의 사업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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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해방 직후 대구에서 초등·중등·전문학교 교육자들이 결성한 교육 단체. 경북교육협회(慶北敎育協會)는 해방 직후 대구에서 교육자들이 결성한 단체로 교육활동과 함께 정치활동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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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고아를 구제하던 관변 구호단체. 경북구제회(慶北救濟會)는 고아 수용과 실업자를 구제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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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경상북도 지역 기독교 목사들로 결성된 근로봉사대. 1944년 12월 8일 일제는 침략전쟁 수행에 종교계를 이용할 목적으로 종교계를 총망라한 친일 종교 단체 조선전시종교보국회를 결성하였다.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가운데 한 단체인 경북기독교전시보국회는 대구·경상북도 지역 기독교 목사들로 결성된 근로봉사대였고, 전시 체제기에 노동력을 제공하며 침략전쟁에 부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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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1월 6일부터 1월 7일까지 이틀간 조선 사회운동의 고양과 언론 자유의 신장을 위하여 개최된 대구·경북 지역 조선인 기자대회. 경북기자대회는 ‘언론의 신장과 공정’, ‘민중의 전위에서 여론을 대표하여 투쟁하는 전위분자의 친선 도모’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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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 사회운동의 고양과 언론 자유의 신장을 위하여 결성된 경상북도 지역의 조선인 기자 연합단체. 경북기자동맹(慶北記者同盟)은 1920년대 후반 대구와 경북 각 지역의 조선인 기자 단체들이 경상북도의 도 단위의 단일한 기자 조직을 결성하여 언론 자유의 신장과 사회운동의 고양에 이바지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1927년 하반기에 경주, 영천, 영일, 영덕 등 4개 군의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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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18일 대구와 경북의 대중운동 단체 대표들이 대구·경북 지역 노동·농민운동의 확대 방안을 결정한 대회. 1925년 1월 30일 대구에서 대구의 대구노동공제회, 정오회, 용진단 등과 안동의 풍산소작인회와 화성회 등 북풍회와 화요회 계열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회합하여 경북노농운동자간친회 개최를 논의하고, 1925년 2월 18일 안동에서 경북노농운동자간친회를 개최하기로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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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된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한 노동운동 단체. 경북노동조합연합회(慶北勞動組合聯合會)는 1956년 대한방직 대구공장 쟁의 당시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연대한 노동운동 단체이다. 경북노동조합연합회는 1957년 어용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대한노총 경상북도연맹을 반대하며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하여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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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2월 8일 대구 서문교회에서 열린 기독교 교역자의 종교 간담회. 일제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1941년 12월 8일 열린 경북노회 남녀교역자 종교보국간담회는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시작된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이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선전을 펼친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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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영세 상공업자와 도시 노동자를 위하여 설립된 서민 금융기관. 상호신용계의 전 용어인 무진(無盡)은 일정한 수의 계좌를 모아 기간과 금액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납입한 사람에게 1계좌마다 추첨이나 입찰 등의 방법으로 금액을 내주는 일종의 계와 비슷한 형태의 제도이다. 1910년 일본으로부터 도입된 후 개인이 하던 무진업을 1922년 5월 11일 조선총독부가 회사 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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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대구에서 문화인과 문화단체를 망라하여 결성된 문화운동 단체. 광복 이후 대구 지역의 문화인과 문화단체들은 다양한 문화운동 단체를 단일한 조직체로 만들 필요성을 느끼고 각 문화단체 대표자로 구성된 경북문화건설연맹의 준비위원회를 발족하였다. 이후 대구공회당 대강당에서 각 문화운동 단체와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경북문화건설연맹 결성대회’를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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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대구에서 결성된 진보적 청년운동 단체. 민주민족청년동맹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2일 부산에서 설립된 진보적 청년운동 단체이다.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이종률의 지도 아래 결성된 민주민족청년동맹은 자주적 통일과 진보적 민주 체제를 지향하는 청년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되었다. 민주민족청년동맹의 지역 조직인 경북 민주민족청년동맹은 1961년 1월 7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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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 내 5본산과 말사가 연합하여 결성한 불교 단체. 경북불교협회(慶北佛敎協會)는 쇠퇴하는 조선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경상북도 내 5본산(本山)과 말사(末寺)가 연합하여 종무 및 사업을 통일시킬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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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 22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대구·경북의 서울계 사회운동단체들이 사회운동 확대와 세력 확장을 위하여 개최한 대회. 1924년 12월 28일 경상북도 예천(醴泉)에서 영주, 안동, 상주 등지의 사회운동 단체들이 회의를 열고 1925년 2월 22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를 열기로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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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서울계 사회운동의 통일 기관으로 설립된 사회운동 단체. 경북사회운동자동맹(慶北社會運動者同盟)은 1925년 2월 21일 경상북도 상주에서 대구 제4청년회를 비롯한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慶北社會運動者懇親會)에 참가할 단체들이 서울계의 대구·경상북도 지역 통일 기관이자 지도 기관으로 발기하였고, 1925년 2월 22일 경북사회운동자간친회에서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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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지역에 있었던 관변 단체. 1922년 7월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경제정책 전반을 검토하기 위하여 산업조사위원회를 설치하였다. 경북산업자문회(慶北産業諮問會)는 산업조사위원회를 지방으로 확대할 때 구성된 것으로 경상북도의 산업 자문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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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순수 조선인 자본만으로 설립된 유일한 기업. 1920년 일제가 회사를 설립할 때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한 회사령을 철폐하면서 각종 회사의 설립이 이루어졌다. 대구 지역에서 조선인 금융 자본가들이 설립하거나 경영에 참가한 회사는 대구전기회사, 계림농림주식회사, 조선물산무역주식회사, 대흥전기주식회사, 대동무역주식회사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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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대구상공회의소를 전시체제로 개편하는 정책을 강제하여 설립된 경제 단체. 조선총독부는 1944년 8월 18일 전국의 상공회의소를 전시체제로 개편하기 위하여 「조선상공경제령」을 공포하였다. 「조선상공경제령」에 따르면 도(道) 상공경제회는 “국민경제의 총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국책에 협력하고, 산업 경제의 원만한 연락을 도모하는 동시에 그 개선 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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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인 자본가들이 대구에 설립한 회사. 1936년 대구 지역 조선인 자본가들은 대구의 주택난이 점점 심화되자 경북상공주식회사(慶北商工株式會社)의 설립을 준비하였다. 1937년 6월 28일 10여 명의 자본가들이 중구 대신동에 마련한 임시 사무소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경북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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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경상북도가 대구역 광장에 상설 상품 진열을 목적으로 건축한 전시 공간. 경북상품진열소(慶北商品陣列所)는 1928년 11월 6일 신축 낙성식을 갖고 개소하였다. 경북상품진열소의 건축은 1926년부터 추진되었다. 경상북도가 대구역 앞 철도용지에 건평 1,234㎡의 이층 건물로 상품 진열소를 건립할 계획으로 철도국과 협의하여 부지 차용에 대한 동의를 얻어 공사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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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0월 안경근, 안민생, 김성달 등이 결성한 통일운동 단체. 경북시국대책위원회(慶北時局對策委員會)[이칭 시국대책위원회·경상북도 시국대책위원회]는 4·19혁명 시기 통일운동을 목적으로 안경근, 안민생, 김성달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경근은 일제강점기 김구를 보좌하면서 밀정 숙청 작업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고, 안민생은 안중근 의사의 조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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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대구의 미곡상들이 미곡 거래소 설치를 위하여 개최하려고 하였던 대회. 경북실업가대회(慶北實業家大會)는 1923년 3월 10일 대구의 미곡상들이 미곡 거래소 설치를 위하여 개최하려고 하였던 대회였다. 계기는 대구의 미곡상들이 미곡 거래소 설치를 위하여 1923년 2월 22일 결성한 미곡거래소설립기성동맹회에서 교섭위원을 선정하여 일본 도쿄[東京]로 파견하였는데, 귀국 후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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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조선총독부가 전시 식량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대구에 설치한 미곡 통제 기관. 1939년 가뭄으로 쌀값이 급등하자 조선총독부는 매점매석 행위 단속, 쌀값 대책 요강 발표, 백미 제조 금지 등과 같은 임시 조치를 취한 뒤 1940년 12월 27일 「조선미곡배급조정령」과 「미곡배급통제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본격적인 미곡 통제를 실시하였다. 1940년 쌀 수확이 여전히 평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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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와 경상북도 내의 관공리를 회원으로 하여 결성된 관변단체. 경북연구회(慶北硏究會)는 대구와 경상북도 내 관공리를 회원으로 하여 조선총독부의 시정 방침과 지방 행정, 기타 제반 상황을 숙지하고 아울러 회원 상호 간의 지식 향상을 도모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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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대구에서 발족하였던 종합대학 설립 추진 단체. 경북종합대학기성회(慶北綜合大學期成會)는 광복 후 교육 재건의 중요성을 절감한 대구의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국가와 지역사회에 필요한 인재 양성을 위하여 종합대학을 설립할 목적으로 발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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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전반기에 대구의 송두환과 최윤동이 각각 벌인 독립운동 군자금 확보 사건. 경북중대사건은 1923년 11월 최윤동(崔允東)과 이수영(李遂榮)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과정에서 일경에게 체포된 것을 계기로 발생한 사건이다. 1920년 송두환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에 덧붙여진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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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2월과 3월 무렵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청년운동 세력들이 개최한 두 개의 청년대회. 1925년 무렵 대구 지역 청년운동 세력은 전국 사회운동의 방향과 연관되어 파벌 투쟁을 벌였다. 청년운동의 비합법 영역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주도한 화요회계는 지방 청년대회를 통하여 서울계가 장악하고 있던 청년운동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조선청년총동맹을 주도하고 있는 지방 청년운동의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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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경상북도 지역 청년단체들의 연합 조직. 경북청년연맹(慶北靑年聯盟)은 1928년 1월 열린 경북기자대회를 활용하여 대구와 경상북도 각 부·군 단위의 청년 동맹들이 연합하여 중앙 집권적 도 단위 단체로 결성한 청년단체였다. 경북청년연맹은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청년운동의 지도 기관 역할을 담당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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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7일 대구에서 건국 준비를 위하여 결성된 정치단체. 경북치안유지회(慶北治安維持會)는 1945년 8월 17일 대구에서 건국 준비를 위하여 결성된 정치단체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동인동1가에 있던 대구일일신문사(大邱日日新聞社)에서 대구의 우익 성향 정치세력이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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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대구에서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가족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하여 결성한 조직. 경북피학살자유족회(慶北被虐殺者遺族會)는 1960년 5월 30일에 결성된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 위령제 준비위원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경북지구피학살자 합동 위령제 준비위원회의 활동은 1960년 6월 9일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준비위원회의 발족으로 연결되었다. 경북피학살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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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부터 1961년 5월까지 진행된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6·25전쟁 전후 대구 지역 피학살자 유해 발굴 사업. 경북피학살자유족회(慶北被虐殺者遺族會)는 6·25전쟁 전후 대구 지역에서 국가 권력에 의하여 희생된 피학살자의 유해 발굴을 주요 사업으로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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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8월 20일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3가에 있던 경북피학살자유족회가 피학살자 합동 묘비 건립을 위하여 구성한 조직.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합동묘비건립위원회(慶北被虐殺者遺族會合同墓碑建立委員會)는 1960년 8월 20일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3가에 있는 경북피학살자유족회가 피학살자 유골을 수습하여 합동 묘비를 건립하기 위하여 경북피학살자유족회 안에 구성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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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28일 경북피학살자유족회 결성 이후 최초로 열린 합동위령제.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합동위령제는 이승만 정권 시절 불법으로 자행된 대규모 학살 사건에 희생당한 원혼을 위하여 분노와 동족애를 발휘할 목적으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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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대구 지역에서 국민 보도 연맹 사건과 한국 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의 경상북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결성한 단체.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4·19 혁명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사회 분위기에서 6·25 전쟁 전후 정부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 책임자 처벌, 명예 회복, 유가족에 대한 배보상 등을 목표로 결성되었다. 긴급한 주요 사업으로 위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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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혁명 이후 6월 대구 지역에서 한국전쟁 전후 양민 학살 사건의 대구 및 경상북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결성한 단체. 경북피학살자유족회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정부 혹은 미군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학살자의 넋을 위로하고 명예 회복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목적은 결성대회에서 채택된 선언문에 잘 드러난다. 그 내용을 보면 ‘우리들은 좌익분자라는 이름으로 처형된 자의 유족이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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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20일에 대구역 광장에서 학도호국단 학생감찰부의 주최로 열린 학생 반공 집회. 경북학생반공총궐기대회는 1949년 학도호국단 결성 이후 학도호국단 학생감찰부가 개최한 첫 행사로 열린 반공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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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설립한 화물자동차 회사. 경북화물자동차주식회사(慶北貨物自動車株式會社)는 1936년 9월 25일 대구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하였다. 경상북도 내 180명 화물차 업자 중 88명이 참여하여 설립된 경북화물자동차주식회사는 자본금 30만 원으로 설립하되 한 주당 50원, 총 6,000주의 주식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경북화물자동차주식회사는 포드 차량 142대를 매입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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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5일 대구에서 결성된 지방의 정권 기구이자 인민정권의 대중적 토대로서의 민간 자치 기구. 경북도 인민위원회(慶北道人民委員會)와 같은 지방 인민위원회는 인민공화국의 지방적 체계이며, 치안 및 행정기능의 주체로서 노동·농민조합과 대중조직의 결성을 지원하는 동시에 토지 문제와 일체의 식민지 체제의 해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임무를 띠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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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대구부와 경상북도에 설치된 경상북도지사의 자문 기구. 경북도평의회(慶北道評議會)는 1920년 7월 29일 일제가 공포한 제령 15호 조선도지방비령(朝鮮道地方費令)에 따라 대구부와 경상북도에 설치한 경상북도지사의 자문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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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부가 포함되어 경상북도에서 시행된 경상북도의 의결 기구. 경북도회(慶北道會)[1933]는 1933년 4월 1일 대구부가 포함되어 경상북도에서 시행된 경상북도의 의결 기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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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7월 대구 지역에 일본인 무역업자 미야이가 설립한 보통은행. 경상공립은행(慶尙公立銀行)은 1920년 7월 대구에서 일본인 무역업자 미야이[宮井正一]가 설립한 보통은행으로, 미야이가 필요로 하는 무역 자금 충당에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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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일제가 한국 금융 지배를 위하여 대구농공은행과 진주농공은행을 합병하여 설립한 은행. 경상농공은행은 1908년 일제가 한국에 대한 금융 지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대구농공은행과 진주농공은행을 합병하여 설립한 은행이다. 1918년 10월 조선식산은행이 설립되면서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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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7월 31일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의 합병을 통하여 설립된 일반은행. 경상합동은행은 경상남북도의 대표적 한국인 은행인 대구은행과 경남은행이 은행의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하여 합병한 일반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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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대구에 있는 경상감영의 부속 건물인 객사를 철거한 사건. 대한제국 시기 일제는 경부선 철도의 부설과 을사조약을 계기로 본격적인 내륙 침탈에 나섰다. 철도 부설과 함께 대구로 들어온 일본인들은 경상북도 관찰부와 함께 대구읍성을 헐어 버리고 난 뒤 경상감영의 객사 철거를 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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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한제국 내장원이 대구와 경상북도의 광산 관리와 광세 징수를 위하여 만든 조직. 경상북도 금광위원(慶尙北道金鑛委員)은 대한제국의 내장원(內藏院)이 보유한 대구와 경상북도의 광산을 관리하고 광세(鑛稅)를 징수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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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와 경북을 관할하던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의 지역별 노동조합. 1954년 4월 8일에 종래의 대한노동총연맹을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로 개칭하고, 직종별·지역별 조합을 설치할 때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 경상북도노동연맹이 결성되었다. 1950년대 한국 유일의 전국적 노동조합인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는 노동운동 단체가 아니라 반공 투쟁에 나서거나 이승만 정권의 정치 기반으로서 역할을 한 정치단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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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대구에서 정부 주도로 결성된, 경상북도 지역의 준군사 조직. 학도호국단은 정부수립 이후 1948년 12월 반공정신을 기본 바탕으로 하는 일민주의 교육 이념 아래 문교부에 의하여 결성되었다. 학생들은 단체 훈련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고, 정신을 연마하여 학원 내에서 좌익 계열의 책동을 분쇄하며 또 민족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애국적 단결심을 함양한다는 취지에서 정부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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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28일 대구 지역에서 한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일반은행. 경일은행은 대구와 경상북도에서 상업금융 시설이 부족하여 금융기관의 설립 요구가 커지는 상황에서, 1912년의 개정 「은행령」에 따른 고금리 문제에 대처하고, 금융경색을 완화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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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대학교 학생들이 학원 민주화를 위하여 결성한 학생운동 단체. 계명대학교 학원민주화실천회위원회(啓明大學校 學院民主化實踐會委圓會)는 10·26사태 이후 계명대학교 학생들이 학원 결성한 단체이다.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율적 학생회를 구성하려는 학원민주화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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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대구 계성학교 학생들의 항일 비밀결사. 계성학교 결사대(啓聖學校決死隊)는 1942년 2월 대구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 학생 김영도(金英道)를 중심으로 광복 투쟁을 하기 위하여 15명의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비밀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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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고려공산청년회의 지역 비밀결사.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약칭 고려공청]는 조선공산당을 결성한 다음 날인 1925년 4월 18일 서울 박헌영의 집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공산주의청년동맹이다.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청년에게 사상교양을 하고 선전 훈련을 하는 예비 학교의 성격을 가졌던 고려공산청년회는 모두 4차에 걸쳐 재결성되었다. 일제의 탄압을 받아 해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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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도자기 제조회사. 고려요업주식회사(高麗窯業株式會社)는 1919년 9월 이상무(李相武)의 명의로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자본금 20만 원으로 설립된 도자기 제조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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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일제가 달성군에서 농가 갱생 계획을 목표로 설립한 조합. 공려조합(共勵組合)은 일제가 전쟁 정책으로 인해 조선의 농촌이 더욱 피폐해지자 농가 갱생(農家更生) 계획을 목표로 설립한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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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곽수범(郭洙範)[1910~?]은 1928년 10월 서울휘문 고등 보통 학교 3학년 재학 중 동맹 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했다. 그 뒤 1929년 4월 서울성봉 중등 학교 4학년에 다시 입학했으나 7월 자퇴했다. 1931년 6월 무렵 김일식(金一植)·염필수(廉弼守)·이경석(李璟錫)·김석구(金石九)·한순(韓錞)·이재우(李載雨)·김홍직(金洪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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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곽종해(郭鍾海)[1891~1946]는 1891년 2월 27일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 중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8월 초순에 달성군 최초의 청년회인 현풍 청년회의 결성을 주도하고, 창립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현풍 청년회의 주요 활동은 노동 야학을 통한 교육 기관 설립이었다. 1920년 8월 10일 무렵 상해 임시 정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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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전개된 관공리 대상 독립운동 권고 활동. 3·1 운동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 살고 있던 김달문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부당하다고 인식하며,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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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달성군을 포함하여 우리 민족이 일제에 빼앗긴 주권을 회복한 역사적 사건. 1945년 8월 15일을 해방이라고도 한다. 광복은 내외적 발전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먼저, 내적으로는 한말(韓末),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다양한 이념과 방략(方略)에 따라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의 지속적 전개에서 찾을 수 있다.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만든 것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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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대구에서 결성되어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을 대표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 광복회(光復會)[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는 무장투장을 전개하여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던 대표적인 국내 독립운동 단체이다. 광복회는 1915년 초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鎮)을 중심으로 창립한 재건 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와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채기중(蔡基中)을 중심으로 창립한 풍기광복단(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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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사립학교. 교남학교는 3·1운동 이후 교육열이 높아지는 가운데 학생들의 입학난을 도울 목적으로 홍주일·정운기·김영서 등이 설립한 사립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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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1월 대구의 3개 중고교에서 미군이 임시 주둔 시설로 사용하는 학교 건물의 반환을 요구한 운동. 교사반환운동은 대구의 대구공업고등학교, 경일중학교, 대구중학교 등 3개교에서 한국전쟁 이후 미군이 임시 주둔 시설로 사용하는 대구의 학교 건물 반환을 요구한 활동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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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에서 학생들이 교원노동조합을 지원하기 위하여 벌인 사회운동. 1960년 5월 7일 대구에서 대구초등교원노동조합과 대구중등교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이어 5월 30일 경북교원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대구지구 및 경북지구 교원노동조합연합회는 교원노동조합의 합법화를 위한 투쟁에 집중하였다. 투쟁에는 교원의 지위 향상, 교원의 사회보장제도 확립, 교원의 신분 보장 등의 내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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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대구에서 결성된 여성 계몽운동 단체. 교육부인회(敎育婦人會)는 대구에서 계몽운동을 펼친 이일우의 계수(季嫂) 김화수(金和秀)를 비롯한 100여 명의 회원이 결성한 여성 계몽운동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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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단체. 구국총력연맹 경북지부(救國總力聯盟 慶北支部)는 결성되지 않았고, 6·25전쟁 때 설립되어 활동하던 경상북도 전시대책위원회의 명칭과 구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국총력연맹 경북지부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시 상황이라 ‘전시대책위원회’를 ‘구국총력연맹’으로 전환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목적이 유사한 두 단체를 두는 것은 전시에 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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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학생 항일운동 단체. 구화회(丘火會)는 사회과학의 연구 및 선전 활동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목적으로 결성한 비밀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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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후반 대구에서 「국가보안법」 제3차 개정안에 반대하며 벌인 민주화운동. 대구의 국가보안법반대 가두시위(國家保安法反對街頭示威)는 1958년 12월 이승만 정권이 대공 사찰 강화와 언론통제를 내용으로 하는 「국가보안법」 3차 개정을 추진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대구에서는 1958년 12월 2일 민주당 경북도당이 ‘국가보안법개악반대경북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국가보안법 반대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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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26일에 대구에서 결성된 국군 준비 단체. 국군준비대경상북도사령부는 광복 후 대구 지역에서 국군 창군을 준비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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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미군정청의 국대안에 반대하기 위하여 결성된 학생운동 단체. 미군정청이 경성대학의 3개 학부와 서울에 있는 9개의 관립 학교를 통폐합하여 종합대학교를 만든다는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약칭 국대안]을 발표하자 국대안 반대운동이 격렬하게 일어났다. 대구에서도 국대안에 반대하는 동맹휴학이 대구사범대학[대구사범학교], 대구농업전문학교[현 경북대학교 농과대학], 대구의학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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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4 후퇴 당시 국민 방위군 간부들이 군 예산을 횡령한 사건. 국민 방위군은 한국 전쟁 중 1950년 11월 중국 공산군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급반전될 때, 이에 대비하기 위해 한국 정부가 1950년 12월 11일 국민 방위군 설치법을 공포하여 창설되었다. 이 법의 대상자를 ‘사병’ 혹은 ‘제2 국민병’이라고 불렀다. 그 대상은 만 17세 이상에서 40세 미만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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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대구에서 좌익 세력의 교화 및 전향이라는 명목 아래 법적 뒷받침 없이 조직된 관변단체.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은 1948년 12월 공포, 시행된 「국가보안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 성향이 있는 사람이나 좌익 단체에 가입하였던 사람들의 사상을 전향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와 함께 이승만 정권이 대국민 사상 통제를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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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좌익 인사의 전향 및 교화를 위해 조직된 반공 성격의 관변 단체. 보도 연맹은 1948년 12월 「국가 보안법」의 구체적 운용 대책에 따라 조직한 반공 관변 단체로서 정식 명칭은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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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6월 5일에 대구광역시 동구에서도 결성된 단체. 1948년 12월 27일 서울지방검찰청은 법원, 검찰청, 감독 장관 회의 석상에서 「국가보안법」의 운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교화 전향 운동을 제의했다. 교화 전향의 대상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사람 중 전향자들이었다. 제안에 따르면 국민보도연맹의 가맹 대상은 단독선거에 반대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집단 및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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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일제가 전시동원체제를 위해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도 추진한 식민지배정책. 국민정신총동원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정책적으로 추진한 최고의 정책이었다. 1937년 9월 일본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진행된 연설회에서 일본 수상 근위(近衛)는 일본·만주·중국을 일본 정치 아래 두고 동양평화를 실현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관민일치의 국민정신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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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대구 기독교계의 동향.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제정 이후 조선총독부는 1939년 신의주에서 열린 제28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 결성’을 강요하였다. 대구 지역 기독교계 목사와 장로 등 10여 명이 참석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연맹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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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친일 협력을 위하여 결성된 여성 종교 단체. 국민총력경북노회연맹여자부(國民總力慶北老會聯盟女子部)는 1941년 6월 대구에서 결성된 여성 종교 단체로 친일 협력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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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중일전쟁 이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각 면에 설치하여 운영한 훈련소. 일제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의 실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일반 민중의 황도정신 계발과 계몽을 위한 시설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전시동원체제를 적절히 운영하기 위해서는 황도정신계발 및 계몽을 위한 조직적 훈련 기관의 필요성에서 국민훈련소를 설치·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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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때 군 예산을 횡령하여 수많은 병력의 목숨을 앗아간 군 간부들을 대구 지역 야산에서 처형한 사건. 국민방위군사건은 6·25전쟁 당시 군 간부들의 예산 횡령으로 말미암아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된 병력 50만여 명 중 상당수가 사망 또는 부상한 사건이다. 당시 사망자 수는 이승만 정부의 공식 기록으로는 1,000명에서 2,000명 사이이지만, 당시 소문에 5만에서 10만 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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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 특별 회의에서 국채보상운동 모금을 위하여 김광제, 서상돈 등 10명의 공동 발기인의 이름으로 작성한 취지서. 「국채보상취지서(國債報償趣旨書)」는 국채 1,300만 환을 갚기 위하여 보상금 모금의 필요성과 방법을 제기한 문서이다.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의 특별 회의에서 사장 김광제(金光濟)[1866~1920], 부사장 서상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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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월 대구에서 발생하여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경제 주권 운동. 1907년 1월 29일 대구 광문사(廣文社) 내에 경상북도 각 군의 유지들로 구성되어 있던 문회(文會)는 특별회를 열고 대구광문사의 문회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변경하였다. 이날 열린 특별회에서 광문사 부장 서상돈(徐相敦)이 국채 1300만 환을 갚아 일제로부터 국권을 보전하자고 제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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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대구에서 박정희 군사정권이 발표한 군정 연장에 반대하며 전개된 운동.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군사정부를 수립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12월 17일 1963년 8월경에 정권을 민정으로 이양할 예정이라고 발표하였다. 다음 해인 1963년 2월 18일에는 민정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963년 3월 15일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군인 8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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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국필(權國弼)[?~?]은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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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소농을 대상으로 한 공제 조합. 권농공제조합(勸農共濟組合)은 일제가 소농(小農)의 생활을 개선하고 농촌을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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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소농구제 자금을 운용하기 위해 설립된 관변 농민 단체. 1928년부터 총독부 산하 경상북도청은 5개년 간 도내 272면에 대해 각 면 당 4개 조합에 해당하는 총 1,088 조합을 설치하고, 조합 소속 소농의 규모를 3만 2천 6백 40인에 대해 소액 생업자금 총 65만 2천 8백 원 규모의 자금을 대부할 계획을 세웠다. 이 자금은 조합 소속 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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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 출신으로 4·19혁명 시기의 민주민족청년연맹 활동가. 권달섭의 아버지는 경찰관 출신으로 시월항쟁 때 좌익에 의해 피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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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대형(權大衡)[1898~1947]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1931년 대구에서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을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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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유림 독립운동가. 권상문(權相文)[1850∼1931]은 1850년 12월 7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내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전민족적인 3·1 운동이 일어나 전국을 강타하고 있을 때, 경상북도 성주 유림 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계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 회의에 독립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였다. 독립 청원서 작성에는 곽종석(郭鍾錫)·장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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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성우(權聖佑)[1896~1980] 1896년 9월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학미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권중수(權重秀)·권중식(權重植)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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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영화(權永和)[1899~1935]는 1899년 4월 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아버지 권의윤(權義允)과 함께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권주섭(權周燮)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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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권중락(權重樂)[1908~?]은 4·19혁명 이후 대구에서 경북피학살자유족회 활동과 이대악법반대운동을 펼친 사회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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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권중식(權重植)[1892~1943]의 일본식 이름은 야마모토 시게오[山本重夫] 또는 산본승우(山本昇佑)이다. 권중식은 1892년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현 대구광역시 북구]에서 태어났다. 1913년 11월 문관 보통 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15년 4월 조선 총독부 군 서기에 임용되어 경상북도 고령군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였다. 1921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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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중윤(權重潤)[1900~1928]은 1900년 2월 3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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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청학(權淸學)[1899~1981]은 1899년 4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음리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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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권청학(權淸學)[1899~?]은 1919년 달성군 공산면 도학동에 있는 동화사(桐華寺) 부속의 지방 학림(地方學林) 학생으로 있었다. 윤학조(尹學祚)와 함께 김문옥(金文玉)에게 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3월 28일 동화사의 심검당(尋劍堂)에 모여 만세 독립운동에 관해 논의한 결과 1919년 3월 30일을 의거일로 정했다.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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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쾌복(權快福)[1921~2009]은 1921년 2월 2일 경상북도 구미시 시미동에서 권상근(權相瑾)의 아들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비밀결사 조직인 백의단(白衣團)과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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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태용(權泰鏞)[1920~1986]은 1920년 4월 23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부산리에서 태어났다. 강제 징집되어 대구 제24부대[경북방위군 제24부대]에 배치되었으나, 1944년 동지들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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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태우(權泰禹)[1909~?]는 1909년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법상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비밀결사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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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권태호(權泰鎬)[1905~1950]는 1905년 5월 22일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북지리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 재학 중 신우동맹(新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 등 항일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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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개항에서 1945년 광복까지 대구의 역사. 대구는 개항 이후 전통적 조선 사회에서 시민사회에 기초한 근대 국민국가를 수립하여야 하는 역사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 또한 대구 사회는 개항 이후 서구 근대가 파급되는 과정에서 전통사회의 질서를 어떻게 재정립할 것이냐는 과제도 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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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의 역사. 개항기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는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이었다. 근대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변혁운동은 1910년 한일병합을 계기로 식민지 민족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근대 시기 동구는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존립하지 않았다. 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의 지방행정구역은 많은 변동을 거친다. 즉 달성군에 속하기도 하고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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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된 근로인민당의 경상북도 지부. 근로인민당 경북도당위원회(勤勞人民黨 慶北道黨委員會)는 근로인민당의 친일파 배격, 통일 정부 수립과 민주 발전 등의 정치노선을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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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대구에서 결성된 근로인민당의 대구 지부. 근로인민당 대구시당위원회(勤勞人民黨 大邱市黨委員會)는 근로인민당의 친일파 배격, 통일 정부 수립, 민주 발전 등의 정치노선을 대구 지역에서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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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에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결성된 단체.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는 국채보상운동을 전담하기 위하여 1907년 2월 21일 대구에서 결성된 단체로 의연금 모금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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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 기독교인과 일본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결성한 친일 협력 종교 단체. 기독교대구연합회(基督敎大邱聯合會)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대구 지역의 조선 기독교인과 일본 기독교인이 친선 제휴를 명목으로 결성하여 황국신민으로서 보국((報國)을 실현하기 위한 친일 협력 종교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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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1일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 있는 대구공회당에서 대구의 우익 세력이 개최한 3·1절 기념식. 기미독립선언기념식은 대구에서 두 번째로 열린 3·1절 기념식이었다. 기미독립선언기념식은 좌우익 연합으로 개최되었던 1946년 3·1절과 달리 대구 지역의 우익 정치세력이 개최한 기념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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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경상북도 대구부에서 식량 부족 때문에 발생한 데모. 광복 후 우리나라는 식량문제가 최대의 현안이었다. 패망 직전 일본은 우리나라에서 식량을 남김없이 거두어 갔고 우리나라의 식량 재고는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군정 당국은 ‘미곡 최고 가격제’, ‘미곡 수집령’ 등의 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 이러한 식량 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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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형평운동가. 김경삼(金慶三)[?~?]은 1923년 조선형평사(朝鮮衡平社) 경북지사 설립을 주도하고 대구 지역의 형평운동(衡平運動)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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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김관제(金觀濟)[1886~1951]는 1886년 6월 18일 지금의 경산남도 고성군 개천면 명성리에서 태어났다.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중국 만주로 망명하여 민족계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후 국내로 돌아와 대구에 한약방을 열고 사회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건국동맹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건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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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노동운동가. 김광서(金光瑞)[1878~?]는 대구노동회 회장을 맡아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929년 원산총파업 때 어용노조 활동을 하였고, 대구노동회의 자금을 횡령·배임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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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김광제(金光濟)[1866~1920]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으며, 일제강점기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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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귀임(金貴任)[1911~?]은 1911년 9월 23일 대구부 남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경성여자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일어난 제2차 서울 연합 시위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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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벌인 독립운동가. 김기석(金基錫)[?~?]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8년 일본인 교사의 이순신(李舜臣) 폄하 발언을 계기로 김성칠(金聖七)·정소수(鄭小秀) 등과 함께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을 만들어 동맹휴교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이후 내부 의견 충돌로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이 결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동맹휴교 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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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낙형(金洛衡)[1911~?]은 1911년 11월 26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노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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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말도(金末度)[1924~1969]는 1941년 6월 일본 교토[京都]의 시마무라 토공[島村土工]에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시마무라 토공에서 일하고 있던 중에 궁진(宮津) 중학을 졸업한 전경원(全京元)과 함께 조선인의 참된 자유, 행복은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밖에 없다고 믿고 독립운동을 펼칠 것을 결의하였다. 전경원과 함께 동지 규합에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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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교육운동가. 김문심(金汶燖)[1912~1987]은 대구에서 교원노조를 결성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대악법반대운동으로 옥고를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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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문옥(金文玉)[1898~1955]은 1898년 2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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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김병순(金炳淳)[?~?]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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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병욱(金丙旭)[1920~1993]은 1920년 5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무우원(無憂園)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서원박(徐原博)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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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석구(金石九)[1910~?]는 1910년 10월 2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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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김석빈(金錫斌)[?~?]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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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에서 태어난 김석주(金錫柱)[1898~1922]는 1920년 7월 30일 무렵 대구부 전정(前町) 금구(金龜) 여관에서 지내던 김한수(金漢洙)의 방에서 장내주(張來周)를 만났다. 여기에서 독립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이를 중국상해 임시 정부 등 각 단체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독립운동 결사대(獨立運動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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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월북 역사학자. 김석형(金錫亨)[1915~1996]은 북한 사회의 역사상 정립에 크게 이바지하고 북한 역사학계에서 최고의 자리를 지킨 대구 출신의 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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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성권(金聖權)[1922~2007]은 1922년 1월 2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호는 청산(淸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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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통일운동가.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시국대책위원회와 경북민족통일연맹의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며 통일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면서, 자주적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범시민운동단체의 성격을 가진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협회의의 결성을 적극 지원하는 활동을 벌인 민족통일운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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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승한(金承漢)[1907~1935]은 1907년 1월 19일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소천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혁우동맹(革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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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도(金英道)[1928~1994]는 1928년 2월 27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계성학교(啓聖學校) 재학 중 교내 항일 비밀경사 조직인 결사대(決死隊)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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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영수(金永壽)[1905~?]는 1905년 경상북도 경산시 남천면 산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우리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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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영우(金永祐)[1885~1926]는 1885년 4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소 후에는 대구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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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용해(金湧海)[1897~1919]는 1897년 7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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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교육자. 김울산(金蔚山)[1858~1944]은 1885년 지금의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에 거주하며 교육운동과 자선사업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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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윤덕(金潤德)[1888~1952]은 1888년 11월 1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태어났다. 한약상으로 일하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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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윤섭(金潤燮)[1900~?]은 1900년 12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중대동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김홍주(金洪周)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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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은수(金恩壽)[1896~1953]는 1920년 10월 동향의 김달문(金達文)으로부터 독립운동이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조선인 관공리가 일제의 손발이 되어 그 운동을 정탐·밀고하는 데 원인이 있으므로 그들을 협박해서 사직하게 하고, 일제 통치에 장애가 되게 하면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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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교육자. 김의균(金宜均)[1884~1947]은 지금의 대구광역시의 교육가이자 법조계·종교계·교육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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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극작가. 김이식(金二植)[1915~?]은 1915년 12월 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거주하며 극작가로 활동하다가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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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이현(金而鉉)[1922~1998]은 1922년 6월 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강제 징집되어 대구 제24부대[경북방위군 제24부대]에 배치되었으나, 동지들과 함께 부대를 탈출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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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재병(金在炳)[1893~1930]은 1893년 1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에서 태어났다.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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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재소(金在炤)[1900~?]는 1900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 범어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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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재열(金在烈)[1884~1948]은 1884년 5월 20일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운수면 화암리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호는 백농(栢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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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관료. 아버지는 김종윤(金鍾潤)이며, 부인은 한정순이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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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점학(金点學)[1906~?]은 1906년 10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 옥포면[현 옥포읍] 간경리에서 태어났다. 청년 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조선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운동의 노선이 민족 협동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자 귀국하였다.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의 비밀 결사인 사회 과학 연구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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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정섭(金貞燮)[?~?]은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서부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교내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일우동맹(一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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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종만(金鍾萬)[1901~1926]은 1901년 7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이화리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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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진만(金鎭萬)[1876~1934]은 1876년 8월 2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서화가로도 활동하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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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진우(金鎭瑀)[1881~?]는 1881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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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교육운동가. 김찬수(金燦洙)[1881~1952]는 188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5년 해성학교(海星學校)를 인수하여 교육계에 뛰어든 후 교육운동과 사회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석년(石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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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관료.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서봉(西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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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치운(金致雲)[1864~?]은 1864년 3월 1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던 1919년 3월 10일 대구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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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태련(金兌鍊)[1879~1943]은 남산교회 조사로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김주현(金周鉉)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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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정치인. 김판석(金判石)[1919~1997]은 1919년 9월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1938년 대구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1949년 대한 청년단 영일군·포항시단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 의원 선거에서 대한 청년단 소속으로 영일·포항 선거구에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1년 제2대 국회에서 국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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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김현구(金鉉九)[1937~?]는 1937년 지금의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대학교 법과 3학년에 재학 중 경북피학살자유족회 대의원 및 대구유족회 청년학생위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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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한약상. 김홍조(金弘祖)[?~?]는 개성 출신으로, 1892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로 이주하였다. 일제강점기 약령시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약령시 부흥에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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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약 거상 김홍조가 운영하던 대구 약전골목의 약종 상회. 대구 약령시의 한약 거상(巨商) 김홍조(金弘祖)는 약전골목[중구 남성로]에 한약방을 열고 6개의 약재 창고와 여관까지 경영한 거상이었다. 김홍조한약방(金弘祖韓藥房)은 개성상인 출신 한약종상 김홍조의 인삼 행상에서 시작되었다. 김홍조는 개성 사람으로 대구에 들어와 약전골목에서 인삼 행상으로 큰돈을 번 뒤 김홍조한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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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홍직(金洪直)[1897~?]은 1897년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한림면 용덕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 결성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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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여성운동가. 김화수(金和秀)[?~?]는 1909년 대구에서 100여 명의 여성들과 함께 교육부인회를 결성하였다. 교육부인회는 ‘여자교육회’로도 불렸다. 김화수는 교육부인회를 통하여 이일우(李一雨)·서상돈(徐相敦) 등이 발기하여 설립한 대구사립달서여학교(大邱私立達西女學校)의 운영을 지원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화수는 여러 회원과 함께 200여 원의 기금을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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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월 대구에서 발생하여 국내외로 확산되면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경제 주권 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광문사(大邱廣文社)가 대구광문사 내 문회(文會)를 대동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꾸는 특별회에서 대구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의 제안과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金光濟)의 즉각 실행이 제의되면서 시작되었다. 대구광문사는 「국채 보상 취지서」를 만들어 주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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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나병 환자 치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던 전문 병원. 나병원(癩病院)은 1913년 3월 미국 장로교가 세운 제중원에서 영국인 의사들이 근무하는 동안 나병[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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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경상북도 달성군 각 면의 소작인들이 일으킨 소작권 반환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에서는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필두로 1925년에 이르기까지 각 면 소작인 조합이 결성되면서 지세 불납 투쟁과 소작지 반환 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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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면소작조합이 달성군 농민단체와 함께 벌인 농민운동. 일제강점기 식민지농업정책으로 인해 식민지지주제가 확대 심화됨에 따라 지주와 소작농의 마찰이 심화되어 갔다. 지주들은 소작인에게 고율소작료, 각종 세금, 공과금 등을 불법적으로 전가하는 관행을 오랜기간 해왔다. 그 가운데서 1920년대 중반 소작농들도 해안면소작조합을 결성해 지주에게 대응했다. 해안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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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8월 이후부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활동한 좌익정당의 경북조직. 1946년 11월 23일 서울[지금 서울특별시]에서 조선공산당, 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었다. 남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은 1947년 2월 14일 대구[지금 대구광역시]에서 이목·채충식·이선장·백기만·박중조·유지화·백현우·조봉석 등이 결당 준비위원회를 갖추면서 본격화되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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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1일 대구에서 창간된 경제 전문 지역 일간지.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은 조선 경제계의 자각과 각성을 느끼며 진실한 발전을 기하고, 경제 확립 운동에 매진할 목적으로 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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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금전 대부업과 부동산 유가증권 매매를 하기 위하여 설립된 금융 신탁 회사. 남선금융주식회사(南鮮金融株式會社)는 대구에서 1932년 금전 대부업과 부동산 유가증권 매매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된 금융 신탁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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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전국 차원 노농운동의 조직화를 위하여 조직된 노농운동 단체. 1924년 3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이틀간 대구의 만경관(萬慶官)에서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 개최를 함으로써 남선노농총동맹(南鮮勞農總同盟)이 조직되었다. 남선노농총동맹은 조선노농연맹회가 전국 차원 노농운동의 조직화를 위하여 1924년 1월 경남 진주의 경남노농운동자간친회, 1924년 3월 초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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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흥전기주식회사를 중심으로 6개 전기회사가 통합하여 설립된 전기회사. 1911년 설립된 대구전기회사와 함흥전기주식회사가 합병하여 1918년 8월 대흥전기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중일전쟁 이후 조선총독부가 전시체제 강화를 위하여 1937년 3월 대흥전기주식회사, 남조선전기주식회사, 조선와사전기주식회사, 대전전기주식회사, 목포전등주식회사, 천안전기주식회사 등 6개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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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기 대구에서 실시된 남조선 과도입법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이 ‘조선인화 정책’ 혹은 ‘국가기구의 현지화 정책’으로 전환되면서, 1946년 8월 24일 「군정법령」 제188호에 의거하여 과도기적으로 입법의원을 구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정원은 90명으로 하되 45명은 민선으로 선출하고, 45명은 군정장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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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설치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의 경상북도 및 대구, 달성, 경산, 고령 지역 입법 의원.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은 1946년 미군정이 군정 법령 제118호에 따라 설치한 입법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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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정권을 조선에 이관할 목적으로 대구광역시 동구에도 설치한 과도기적 입법기관.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은 1946년 8월 미군정에 설치되어 미군정이 유지되는 동안 정치·행정·경제 등 사회개혁의 기초가 될 법령 및 정책안을 마련하는 기능을 가졌다. 결국, 미군정의 한국인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과도기적 입법기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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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구에서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지방 조직. 1946년 9월 23일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조선신민당 등은 3당 합당 준비위원회를 개최하고 합당을 의결하였다. 조선인민당 대구지부의 최문식은 합당 문제에 관한 기자들과의 대담을 통하여 “중앙에서 합당이 결정되었으니 상향식 합당이 순서이며, 3당 합당에 대하여 의견 대립이 없었다”라고 밝혔다. 3당 합당과 관련하여 분열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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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대구에서 결성된 여성운동 단체. 남조선민주여성동맹 대구시위원회(南朝鮮民主女性同盟 大邱市委員會)는 1947년 2월 20일 조선부녀총동맹 대구시위원회(朝鮮婦女摠同盟 大邱市委員會)의 명칭을 변경하여 설립한 여성운동 단체이다. 명칭 변경은 1947년 2월 10일부터 11일까지 서울 천도교당에서 대구 출신 정칠성(丁七星)[1897~1958]의 사회로 열린 ‘조선부녀총동맹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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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결성한 9월총파업 추진 조직. 남조선총파업대구시투쟁위원회(南朝鮮總罷業大邱市鬪爭委員會)는 1946년 9월 27일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가 대구 9월총파업을 지도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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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 있었던 대구 내외방직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쟁의. 내외방직회사(內外紡織會社) 노동조합은 1954년 10월 22일에 노동자들의 최저생활 확보를 위하여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쟁의를 벌였다. 내외방직회사는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에 대하여 협상은 물론 노동조합의 필요까지 부인하면서, 임금인상 쟁의를 일으킨 노동조합 위원장 허금영(許根營)을 해고하고 김증도(金增道)를 노동조합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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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논공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논공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소작권 반환 투쟁,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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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농민이 권익 옹호를 위해 조직적으로 전개한 사회 경제 운동. 일제 강점기 농민 운동은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과 1920년 산미 증식 계획을 추진한 일제의 농업 정책의 결과로 나타난 식민지 지주제의 모순에서 비롯되었다. 달성군의 농민 운동은 1921년 10월에 가창면의 지이달(池二達), 서대수(徐大洙) 등이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조직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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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식민지지주제에 맞서 농민들이 일으킨 지주에 대한 저항과 항일 투쟁. 일제강점기 식민지 농업정책의 운영에서 일제는 1910년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지주의 소유권을 강화한 식민지지주제를 확립하고,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을 통해 일본 자본과 지주 중심의 식민지지주제를 확대·강화하였다. 식민지농업전쟁의 전개 과정에서 조선 농민은 토지에서 내몰려 궁박한 처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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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추진된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 1920년대 동구 지역이 위치한 달성군의 식민지지주제의 농업구조는 세계대공황 이후 1930년대 일제의 식민지농업정책인 농촌진흥운동이 벌어지던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30년대 일제는 조선에 농촌진흥사업을 실시하였다. 조선의 지주에 대해 일정하게 압박을 가하면서 피폐된 조선농촌의 구조를 개선하려는 목적에서 실시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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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옛 경상북도청 구내에 있었던 건물. 뇌경관(賴慶館)은 1917년 7월 1일 옛 경상북도청 청사 구내 동편의 대구부 상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에 일본 다이쇼[大正] 천황의 즉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신축되었다. 뇌경관은 상품 진열소로 활용하기 위하여 건축되었고 서양식 2층 석조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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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대구의 상징 능금. 대구가 사과로 유명하게 된 데에는 온도의 차이가 심한 기후 조건과 자갈과 모래가 많은 충적 분지라는 알맞은 재배 조건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토종 능금이 사라지고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사과가 ‘대구 능금’이 되었다. 능금은 능금이라는 이름 외에도 임금, 빈과, 평과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임금(林檎)은 11세기 고려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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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시인 이응창이 작사하고, 음악가 권태호가 작곡한 대구를 상징하는 사과 노래. 「능금노래」는 1947년 시인인 이응창(李應昌)[1906~1973]이 작사하고, 성악가이자 작곡가인 권태호(權泰浩)[1903~1972]가 대구를 상징하는 사과를 주제로 하여 작곡한 곡이다. 1949년 농림부가 물산장려를 위하여 건전가요로 지정하여 보급되었다. 1970년대 대구시는 「능금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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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학교. 달명의숙은 1906년 10월 경북 관찰부 관할인 낙육재(樂育齋)와 연계재(蓮桂齋) 소속의 전토를 합하여 설립한 근대 교육기관이었다. 달명의숙의 설립은 1906년 3월 새로 부임한 경북 관찰사 신태휴(申泰休)의 학교 설립에 대한 적극적 지원 정책의 결과였다. 신태휴는 경북 관찰사로 부임하자마자 대구사범학교, 측량강습소 등을 설치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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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조직된 달성친목회 결사 운동. 달성친목회는 1908년 대구에서 계몽운동 단체로 결성되었다가 한 일병합으로 활동이 중지된 것을 1913년에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리에 재건된 비밀결사였다. 대한광복회[대한광복단]와 함께 1910년대 국내 대표적 비밀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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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초중등 과정의 근대 학교. 1899년 대구의 지역 유지들이 설립한 초중등 과정의 근대 학교이다. 달성학교는 설립 취지서에서 나라를 개명시키기 위해서는 근대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점을 밝혔다. 구체적으로는 강학, 교육과 기예 양성, 학문 증진 등을 달성학교의 설립 취지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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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경 대구 달성 지역에서 백정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사회 운동 단체. 1925년경 달성군에서 백정(白丁)들의 신분 해방을 목적으로 조선 형평사 달성 분사가 설립되었으며, 부사장에는 이학술, 총무는 손사준이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철폐되었으나 사회 관습으로는 신분 차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1923년 4월 경상남도 진주에서 차별적인 봉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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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전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 신동고개의 달성1구 광산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사건. 6·25전쟁 전후 달성군 가창면 신동고개[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파동]에 있는 달성1구 광산에서 우익 반공 단체와 국가권력에 의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달성1구 광산학살 사건(達城一區鑛山虐殺事件)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구성된 양민학살 국회특별조사반 경북반의 실지 조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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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피폐된 농촌 개선을 명목으로 실시된 일제의 농업 정책. 농촌진흥운동은 1930년대 일제의 조선 지배와 세계 대공황으로 피폐된 조선 농촌을 개선시킨다는 명목으로 실시된 일제의 농업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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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6월 총독부의 종용에 따라 총후 봉사 활동을 내세우며 조직된 친일 전시 동원 선전 조직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달성군 연맹. 일본은 중 일 전쟁 이후 전쟁 동원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 동원과 협력을 능동적으로 강제할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38년 6월 중순경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조직하였다. 이 운동의 추진 목적은 “황국이 영원히 융창할 기초를 공고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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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사립 학교. 1929년 기준 달성군 내 수학 대상 인구 가운데 실제 교육 기회를 얻은 아동은 전체 지원자 769명 중 618명, 곧 80%였고 나머지 20%는 교육의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는 일제의 지배하에 조선인의 교육 기회가 평등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 달성군 인구에서 입학 지원자 수가 아니라 입학해야 할 대상자를 기준으로 그 규모를 파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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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달성군에 설립되었던 좌익 농민 운동 단체. 달성군 농민조합은 1945년 12월 전국 농민 조합 총연맹 결성에 앞서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달성군 농민조합이 결정되기 전인 1945년 10월에는 대구 지역과 함께 대구 달성 연합 농민 조합 협의회가 결성되어 있었다. 달성군 농민 조합은 농촌 지역인 달성군의 농민 문제, 곧 소작료와 토지 문제 해결 그리고 이를 위한 정치 활동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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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 설립된 보통학교. 일제의 교육 방침은 1911년에 공포된 「조선 교육령」에 잘 나타나 있다. 핵심 내용은 이른바 충량(忠良)한 제국 신민(臣民)과 그들의 부림을 잘 받는 실용적인 근로인·하급관리·사무원 양성하는 것이다. 또 보통학교는 "보통의 지식·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며, 국어[日語]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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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발생한 양민 학살 사건. 한국 전쟁 중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양민 학살은 국군 및 미군, 인민군 등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남한에 의한 양민 학살은 인민군이 점령하였던 지역, 빨치산 근거지 일대, 전쟁 직후 비점령 지역 등에서 최소한의 법적인 심리를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 1949년 6월 5일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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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달성군에서 조직된 민간 자치 기구.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1945년 9월 6일 조선 인민 공화국으로 개편됨에 따라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달성군 위원회도 같은 해 10월에서 12월 사이에 달성군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고, 인민 위원장에는 김선기가 선정되었다. 대구의 북성로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였다. 달성군 인민위원회의 지역에 대한 통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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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직되어 활동한 청년 운동 단체. 달성군 청년연맹의 결성은 조선 청년 총동맹의 조직 방침을 적극 수용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대구 지역과의 연대를 통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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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청년회와 효목청년회가 참가하여 조직한 달성군청년운동 조직. 1925년 무렵 청년운동 단체들이 이른바 혁신총회를 통해 청년운동을 민족운동의 선구로 설정하는 가운데 부군단위 청년운동 조직을 결성하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통해 문화운동 차원의 청년운동에서 대중운동과 민족운동의 선도성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청년운동의 노선 전환을 시도하였다.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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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달성군 구지면, 성서면, 유가면[현 유가읍] 주민들이 식민 지배 당국을 대상으로 한 자치 요구 투쟁. 일제 강점기 식민 권력은 조선에 일방적인 식민 지배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군민들은 경제적 이해나 면장 임명 등에 있어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여 지방 통치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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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 현장에 대해 조사·발굴한 사건. 한국 전쟁 전후 달성군에서 자행된 양민 학살은 사형 선고라는 법적인 근거 없이 국가 권력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기에 법치주의 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에 따라 양민 학살에 대한 진상 규명은 반드시 진행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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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달성군에서 발생한 노동자·시민의 파업 사건. 1946년 9월 대구·달성 지역에서 식량 문제가 폭발 일로에 있을 때, 대구에도 총파업이 파급되었다. 당시 대구의 5개 신문사가 9월 25일부터 10월 3일까지 신문을 발행하지 못하였으며, 9월 24일 전국 노동 조합 평의회[전평] 경상북도 위원회의 파업 지시에 따라 9월 30일부터 모든 공장들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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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구 24부대의 학병들이 일제의 전쟁동원 정책에 반대하며 일으킨 전시체제 거부 운동. 대구 24부대의 정확한 명칭은 ‘경북방위군 제24부대’로 일제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 대비 군사작전 수행을 위하여 보병80연대를 개편한 부대였다. 일제는 1938년 지원병 형태로 조선 청년을 전쟁에 동원한 이래 1943년에 ‘조선인 학도 육군 특별지원병’제도를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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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사망 이후 대구에서 일어난 운동. 1926년 4월 25일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망국의 설움을 안은 채 살아가던 조선인들의 반일 감정이 폭발하였다. 전국 각지의 상인들은 철시를 통하여 투쟁하였고, 학생들은 동맹휴교를 결의하며 일제에 저항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망곡단(望哭團)과 봉도단(奉悼團)이 조직되어 순종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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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26일 대구에서 4·13호헌 철폐와 선택적 국민투표를 위하여 펼쳐진 국민평화대행진. 1987년 6월 24일에 전두환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대표의 영수 회담에서 김영삼 민주당 대표는 ‘4·13호헌 조치 철회’와 ‘선택적 국민투표 실시’를 제시하였으나 전두환 대통령이 ‘개헌 논의 재개’만 약속하자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는 회담이 결렬된 것으로 간주하고 투쟁을 선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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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2일부터 1949년 1월 30일까지 경상북도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경비대 6연대의 좌익계 군인들이 일으킨 반란사건. 대구6연대는 미군정기에 경찰예비대의 성격으로 만들어졌다가 1946년 2월 18일 창설되었다. 대구6연대는 광주의 제4연대와 함께 좌익 세력의 영향력이 가장 큰 부대였다. 대구6연대는 1948년 11월 무렵 제주 4·3항쟁 진압을 위하여 1개 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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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1월 경상북도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국방 경비대 6연대의 좌익계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 국방 경비대 6연대는 1946년 2월 18일 대구에 창설되었다. 6연대는 4연대와 함께 군대 내 좌익 세력이 가장 깊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단선 단정에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발생된 이래 같은 해 10월 여수 14연대가 4·3 사건 진압을 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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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위원회가 개최한 정부수립 촉진대회. 대구 7·27인민대회를 개최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인민 대회의 의미에 대하여 ‘조국 흥망의 결정적 사명을 가지는 것’이라고 중요하게 판단하였다.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모스크바삼상회의가 갖는 역사적 의의에 대하여 첫째, 조국 재건의 유일한 옳은 노선, 둘째, 조선의 자주독립은 민주주의적 제 과업의 완전한 실천을 통하여 실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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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29일 대구에서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대구 7·29선거는 1960년 7월 29일 대구에서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이다. 4·19혁명 이후 국회를 해산하고 내각책임제 개헌을 통하여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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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대구에서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의 주도로 전개되어 10월항쟁으로 이어진 총파업. 대구 9월총파업(大邱九月總罷業)은 조선공산당이 1946년 7월 이후 미군정에 대하여 채택한 ‘신전술’의 발표를 계기로 적극적인 방식의 대중투쟁으로 미군정을 압박하는 정치투쟁을 벌이면서 현실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주도한 9월총파업은 1946년 9월 23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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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전반기 대구의 사회운동 세력이 합방 기념일 행사를 반대하고 일제의 만주 침략을 성토하는 격문을 대구 곳곳에 붙인 일련의 항일 투쟁 사건.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매년 8월 29일을 ‘합방 기념일’로 지정하고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1930년 ‘합방 기념일’에 즈음하여 대구를 필두로 하여 전국에서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1931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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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중구 포정동 경상감영공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의 관아. 선화당(宣化堂)은 조선시대 각 도에 설치되어 관찰사가 사무를 보던 감영(監營)의 중심 건물이다. 선화당은 ‘임금의 덕을 베풂으로써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한다. 현존하는 선화당은 대구의 경상감영 선화당을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시의 강원감영 선화당, 충청남도 공주시의 충청감영 선화당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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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치안 행정기관.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는 일제강점기 대구·경상북도 일원의 치안 행정사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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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경찰서 내에 설치된 관영 사회사업 기관. 대구경찰서 인사상담소(大邱警察署人事相談所)는 대구부민에게 직업소개와 생활법률 안내 및 상담을 지원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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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4월에 대구의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벌인 학생운동. 1928년 4월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역사 교사의 이순신 폄하 발언을 계기로 학생자치, 언어와 집회, 비인간적 대우 철폐, 조선어 시간 연장과 조선 역사 시간 신설, 교장 실책 개선, 일본인 교장 및 일본인 국어·역사 교사 배척 등을 요구하며 동맹휴학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구고보폭압정책반대동맹은 3·1운동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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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 무렵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한글 연구를 위하여 결성한 단체. 대구고보한글연구회의 구성원들은 박종홍(朴鍾鴻) 교사를 통하여 정규 수업시간에 조선어를 배우는 것이 우리글을 이해하는 데 부족하다는 판단에서 한글연구회를 결성하였다. 일제강점기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중점으로 배웠고 조선어 교육은 조선어 및 한문 독본 수업시간에 배우는 게 전부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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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설립된 대구 지역 좌우익의 상설 합작 기구. 대구공동위원회(大邱共同委員會)는 대구 지역의 좌우익 정치세력이 협력하여 식량 문제를 비롯한 지역 현안을 공동으로 해결하고 대책을 마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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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부에서 서민금융의 저리 융통을 위하여 설치한 금융 시설. 대구공설전당포의 설치는 1929년 총독부의 공설전당포 설립과 운영에 대한 규정인 「공익질옥법(公益質屋法)」의 발포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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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공설 주택. 공설 주택은 일제강점기에 대구부가 중산층 이하 영세민의 주택난을 돕기 위하여 벌인 주택사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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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동문동에 있었던 시장. 대구 공설시장(大邱公設市場)은 1920년에 대구부가 「시장규칙 2호」에 따라 경상북도 대구부 동문정, 즉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동문동에 개설하였던 시장이다. 일제강점기 「시장규칙 2호」는 20인 이상의 영업자가 한 건물에서 주로 곡물과 식료품의 매매를 행하는 장소를 의미하였다. 흔히 신식시장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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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설치된 항소법원. 1907년 개정된 「재판소구성법 및 동 시행법」이 공포되면서 3심제 4계급의 재판소가 설치되었고, 대구에는 대구공소원이 개청하였다. 당시 전국 공소원은 경성, 대구, 평양 3곳에만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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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설립된 계몽운동 단체. 대구 광문사(大邱 廣文社)는 1906년 1월 대구에서 거대 상인, 지주층,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인 등 지역의 유지들이 설립한 계몽운동 단체이다. 대구 광문사에 가입하기 위하여서는 엽전 100냥을 출연하였다. 대구 광문사는 사장에 김광제(金光濟)[1866~1920], 부사장에 서상돈(徐相墩)[1851~1913]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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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1906년 대구에서는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와 다른 별개의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과 경제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 보상 운동을 발기하여 전국적인 경제적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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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대구 광선고무공장 노동자들이 회사의 퇴직금 미지불에 맞서 일으킨 노동쟁의. 광선고무공장은 1930년 8월 남녀 노동자 60명을 채용하여 고무를 생산하여 오다 1931년 2월 중순에 회사 경영 문제로 인하여 휴업하게 되었다. 광선고무공장의 경영주는 노동자들에게 3월 10일에 다시 공장을 가동할 예정이니 기다려 달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6차례나 재가동을 미루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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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8월 대구에서 결성된 계몽운동 단체.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는 1906년 8월 대구에서 최대림(崔大林), 이일우(李一雨)[1870~1936], 윤영섭(尹瑛燮), 김선구(金善久), 윤필오(尹弼五), 이종면(李宗勉), 이쾌영(李快榮), 김봉업(金鳳業) 등 지역 유지인 거대 상인, 지주, 전직 관료, 개명 유교 지식인 등이 설립한 계몽운동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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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8월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1906년 8월 대구에서는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다른 별개의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가 설립되어 교육 운동을 중심으로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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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개신교를 비롯한 각종 종교 단체를 연합하여 조직한 종교 단체. 대구교화단체연합회(大邱敎化團體聯合會)는 1935년 9월 일제가 교화 사업을 진흥한다는 명목 아래 대구 지역의 개신교, 천주교, 불교, 천리교 등 각종 종교 단체를 연합하여 결성하였다. 실제는 일제가 일본 국민정신의 진작에 복무하게 함으로써 친일 협력에 종교를 동원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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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명망가들이 결성한 문화운동 단체. 대구구락부(大邱俱樂部)는 ‘대구청년회를 계승한 문화운동의 중추 실행 기관’을 전망하며 대구의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어 출범한 문화운동 단체였다. 대구구락부는 1923년 무렵 대구의 대중운동에서 문화운동의 중심체였던 대구청년회가 침체되고 노농(勞農) 운동을 앞세운 대구노동공제회가 발흥하는 상황에서 실력 양성 노선을 견지하며 문화운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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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9월 대구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벌인 독립운동. 정운일(鄭雲馹), 김재열(金在烈), 최병규(崔丙圭), 최준명(崔俊明) 등은 1915년 4월과 6월 두 차례에 걸쳐 대구의 부호 서창규(徐昌圭)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15년 11월 무렵 정운일, 최병규, 김진우 등은 대구의 부호 정재학(鄭在學), 이장우(李章雨), 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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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결성된 사설 기생조합. 대구기생조합(大邱妓生組合)은 1909년 4월 일제에 의하여 관기제도가 폐지되자 경상감영과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 관청에 예속되어 있던 교방(敎坊)의 관기(官妓)들이 사회로 진출하게 되면서 영업과 권익 보호를 위하여 결성한 사설 기생조합이다. 대구조합, 대구기생조합소, 대구예기조합이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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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기자들의 친목 단체. 대구기자구락부(大邱記者俱樂部)는 1922년 8월 요정 춘대화(春大和)에서 조선인 측 조선일보·동아일보·매일신보 대구지국에서 각 1인과 일본인 측 경성일일신문, 조선매일신문, 부산일보, 마관일일신문(馬關日日新聞), 방장(防長), 경북평론(慶北評論) 등 6개 언론사에서 각 1인 등 총 9명이 모여 상호 협의한 결과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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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근대적 노농운동 단체. 1920년대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노농운동 단체이다. 대구 지역의 농민운동을 조직, 지도하였고, 노동운동 단체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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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활동한 노농 운동 단체. 1920년대 대구의 대표적 노농 운동 단체로서 달성군의 농민 운동을 조직화시켜 농민 운동을 지도하였고, 대구에서 직업별 노동 운동 단체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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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운수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단체. 대구노동친목회는 1925년 대구역을 중심으로 운수 노동자들의 권익 향상을 위하여 설립된 노동운동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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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대구노동회가 설립을 추진한 무산 아동 교육기관. 대구노동학원은 1927년 12월부터 일용직 육체노동자들이 대부분인 회원들의 자제 교육을 위하여 대구노동회가 초등교육 과정으로 설립을 추진한 교육기관이었다. 건립비는 회원 한 사람이 매일 벽돌 세 장 이상을 모으거나 10전 이상의 성금을 내는 방식으로 충당할 계획이었다. 1928년 1월 대구노동회는 달성공원 서북편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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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기독교계 청년·학생들이 조직한 혁명적 노동운동 단체. 대구노동자협의회[근대]는 공산주의 사회 실현을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인 노동조합 운동 단체이다. 1932년 9월 조직을 결성하였으나 1933년 3월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사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본격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와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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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일제가 한국의 농업과 공업을 금융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대구에 설립한 은행. 대구농공은행(大邱農工銀行)은 1906년 일제가 금융 경색 해결과 재정 기초 확립이 필요하다는 판단 하에 대한제국의 농업과 공업의 개량 및 발달을 표면적 이유로 내세워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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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의 유지들이 농촌 계발을 위하여 설립한 농업 단체. 대구농촌사(大邱農村社)는 1925년 7월 대구의 서상일(徐相日), 서만달(徐萬達), 정운해(鄭雲海) 등이 몰락하여 가는 농촌 상황을 조사 연구하여 농업을 개량하고 발달시키려는 목적으로 설립한 농업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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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된 대구와 달성 연합 농민 단체. 대구달성연합농민조합연합회는 1945년 10월 말 대구와 달성군을 활동 범위로 하여 결성된 연합 농민 단체였다. 대구달성연합농민조합연합회의 조직과 임원은 고문 서영로·채충식·김선기, 위원장 상무상(尙戊祥), 부위원장 곽수범, 서기부 김환임, 선전부 조은석, 쟁의부 채병주, 조직부 이인로, 사업부 서영대 등이었다. 김선기, 상무상, 곽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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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대구와 달성 지역이 연합하여 결성한 최초의 농민 운동 단체. 해방 후 대구와 달성 연합으로 만들어진 농민 운동 단체로서 토지 문제, 농민의 사회 경제적 안정 등을 위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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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0월 대구광역시 동구를 포함하여 설립된 농민운동 단체. 대구달성연합농민조합협의회의 결성 목적은 경북농민조합연맹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결의사항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조직의 경우 전국 조직체계의 마련, 소작료 3·7제와 소작권 이동 반대, 농촌문화향상과 문맹퇴치 등을 주요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대구달성연합농민조합협의회의 경우도 유사할 것으로 판단된다. 대구달성연합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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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 있었던 사립대학. 대구대학은 민족문화의 선구자이자 인류 문화의 기수인 국가 진량(陳樑)을 양성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아울러 심오한 학문을 연마하며, 치밀한 기술을 궁구함으로써 세계에 비견할 학자를 배출하며, 대정치가·기술가·사업인 양성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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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의 일본거류민회가 대구읍성을 허문 후 읍성 자리에 도로를 건설하기 위하여 구성한 조직. 대구도로위원회는 1906년 11월에 대구 일본인 거류민단이 대구읍성을 철거한 뒤 읍성 자리에 도로를 건설할 목적으로 구성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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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추진된 도시계획과 지방행정구역의 재편. 1931년 대구광역시 동구에 도시계획이 추진되었다. 특히 ‘대(大)대구의 건설’을 목표로 한 도시계획이 추진되면서부터였다. 당시 새롭게 추진된 도시계획은 크게 하나는 대구 인근 지역을 대구에 편입하는 시구 개정 사업이고, 다른 하나는 대대구의 건설의 목표로 하는 사단 유치, 비행장 건설, 동촌 개발, 종방 유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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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와 개항기, 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재래시장. 대구 동문시장(大邱東門市場)은 조선 후기와 개항기, 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재래시장이다. 조선 후기 대구에는 서시(西市)와 동시(東市)라는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동시는 동문시장의 줄임말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5일장이었다. 『대구부읍지(大邱府邑誌)』에 따르면, 서문시장을 읍시(邑市)라 하고, 동문시장을 신시(新市)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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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달성 군민이 참여한 대구 독립 만세운동. 일제는 민족 동화 정책을 기초로 해서 한국을 식민 지배하였다. 1910년대 일제는 헌병 경찰 제도를 통한 억압적인 무단 통치를 실시하였다. 또한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과 회사령을 실시하여 조선의 경제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소작 조건을 악화시키고, 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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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7월 대구에서 결성된 극예술 단체. 대구무대협회(大邱舞臺協會)는 극예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낀 안종화(安鍾和), 배병철(裵炳哲), 김춘강(金春崗) 등을 중심으로 한 45명의 예술인이 박해와 착취를 당하는 민중에게 위안을 주기 위하여 설립한 극예술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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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대구 지역에서 전개된 경제 자립 운동.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전국적으로 조선물산장려운동이 일어났다. 조선물산장려운동은 일제 식민지 경제구조 아래에서 민족경제가 크게 위축되어 조선인의 경제생활에 위기가 닥친 상황에서 조선 민족의 경제자립을 위하여 일어난 운동으로, 192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1923년 1월 9일에는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 발기준비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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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조선총독부 인가의 경상북도 지역 미곡거래소. 대구미곡거래소는 경상북도 지역의 쌀 실물거래 및 선물거래를 할 수 있도록 설립된 미곡 유통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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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거주하던 미곡상들의 동업조합. 대구미곡상조합은 대구에 거주하는 미곡상들이 친목도모, 이윤추구 등을 위하여 만든 동업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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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대구 미국문화원 정문에서 벌어진 폭발물 폭파 사건. 대구미문화원폭파사건(大邱美文化院爆破事件)은 1983년 9월 22일 오후 9시 33분 대구광역시 중구 삼덕동2가 44-1에 있던 미국 문화원 정문에서 폭발물이 터져 1명이 사망하고 경찰 등 5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1980년의 ‘광주미국문화원방화사건’과 1982년의 ‘부산미국문화원방화사건’에 이어 발생한 대구미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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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곡물상 종사자들이 결성한 친목 단체. 대구미우친목회(大邱米友親睦會)는 대구 곡물 시장의 각 상회에 종사하는 청년 유지들이 친목과 단결을 목적으로 만든 친목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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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방공훈련을 위하여 설립된 일본인 중심의 관변 조직. 대구방호단은 공습에 대비한 방공훈련과 공습이 벌어졌을 때 피해를 복구하고 구호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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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공소원을 폐지하고 대구에 설치된 제2심 재판소. 대구복심법원(大邱覆審法院)은 폐지된 대구공소원(大邱控訴院)을 승계하여 1912년 설치된 복심법원(覆審法院)이다. 현재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제2심 법원이다. 대구복심법원은 대구지방법원, 부산지방법원, 광주지방법원의 제2심 재판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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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7월 개통되어 대구광역시 동구의 동촌 일대와 대구광역시를 이은 대중교통. 대구광역시에 대중교통수단으로서 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29년 7월이었다. 이때는 대구 특유의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버스 운영은 대구부[지금 대구광역시]가 직접 운영하는 형태의 부영버스였다. 대구부영버스 개통을 위한 움직임은 1928년 3월 무렵 대구부가 차장(車掌) 또는 ‘뻐스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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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영남 지역 최초로 여성들이 설립한 상회. 대구부인상회(大邱婦人商會)는 대구에서 여성들이 여성의 경제적 독립을 실행할 목적으로 기성회를 조직하고 간사회를 연 뒤 1921년 11월 29일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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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말 대구부가 빈민 구제를 위하여 설립한 관변단체. 1910년대 말 대구부는 대구 지역의 빈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대구빈민구제회를 관민 합동으로 구성하고 기금을 모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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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3개 항일 학생 비밀결사와 격문 투쟁 사건. 대구사대비사사건(大邱四大秘社事件)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중고등학교]의 사회과학연구회,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 대구사범학교 사회과학연구그룹 등 3개 항일 학생 비밀결사와 대구상업학교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이 보병80연대와 대구역·대구 시내 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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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일대에 조성된 유원지로 대구광역시의 대표적 휴양지. 1920년대 전반기에 처음으로 금호강 연안의 동촌에 유원지 조성 계획이 수립되었다. 그것은 1922년 8월 총독부 토목부원 우에다 마사요시와 오쿠이 료타로 등 두 명이 작성하여 대구부[지금 대구광역시청]에 제출한 「대구부 도시계획 개요」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은 대구부가 발주한 일종의 도시계획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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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학교. 대구사립달서여학교는 1909년 9월 이일우(李一雨), 서상돈(徐相燉) 등 계몽운동가 내지 지역 유지들의 발기로 설립된 근대적 여성 교육기관이었다. 1910년 무렵 여학생 68명이 수학하고 있었고, 한국인 남성 교사 2명과 여성 교사 1명이 교육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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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교육기관. 대구사립사범학교는 1906년 3월 경상북도관찰사 신태휴가 학교 설립에 매진하라는 대한제국 황제의 칙유와 1,000원의 하사금을 매개로 하여 달성군수 김한정과 함께 관덕정(觀德亭)[관덕당(觀德堂)], 고예재(考藝齋)를 수리하여 개교하였다. 관덕정은 대구읍성의 남문 격인 영남제일관 밖에 있었다. 대구사립사범학교 설립에 참여한 발기인과 기금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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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있던 교육기관. 대구사립양성학교는 대구에서 근대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운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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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구사범학교 다혁당(大邱師範學校茶革黨)은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9기생 권쾌복(權快福)[당수]·배학보(裵鶴甫)[부당수]·최영백(崔榮百)[총무부장]·이동우(李東雨)[문예부장]·이도혁(李道赫)[운동부장]·김성권(金聖權)·문덕길(文德吉)·최태석(崔泰碩)·이종악(李鍾岳)·박호준(朴祜雋)·김효식(金孝植)·조강제(趙崗濟)·이홍빈(李洪彬)·문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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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비밀결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大邱師範學校文藝部)는 1937년 7월 경부선 복선화 공사에 동원된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일본인 교사의 차별에 항거한 ‘왜관사건’을 계기로 결성되어 항일운동을 전개한 비밀결사였다. 왜관사건은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에게 민족문제를 각인시키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양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는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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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에서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 대구사범학교 사회과학연구그룹은 사회과학을 연구한 뒤 교사가 되어 농촌과 공장 현장에서 학생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조선 혁명을 의식화시킬 목적으로 결성된 사회주의 계열의 학생 민족운동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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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 대구사범학교 연구회는 1941년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였다. 구성원들이 사범학교 학생들인 만큼 졸업 후 교육 현장에 나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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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인 유지들이 결성한 사회구제 단체. 대구사회사업연구회(大邱社會事業硏究會)는 1921년 대구에서 조선인 유지들이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의 주선으로 사회사업을 펼칠 목적으로 결성한 사회 구제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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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12월 대구 지역에서 선남은행과 경일은행의 합병으로 설립된 일반은행. 대구상공은행(大邱商工銀行)은 1928년 총독부가 금융제도연구회를 통하여 일반은행 통폐합을 추진하는 정책에 따라 1933년 12월 대구에서 일본인 소유의 선남은행(鮮南銀行)이 조선인 소유의 경일은행(慶一銀行)을 흡수합병하여 설립된 일반은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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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조선인 상공업의 진흥을 목적으로 결성된 상공인 단체. 대구상공협회(大邱商工協會)는 대구의 조선인 상공업자들이 일본 상공인들이 지역 상권을 장악하는 것에 대항하여 조선인 상공업의 발전과 단결을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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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대구 상공업 발전을 위한 경제 단체. 대구상공회의소(大邱商工會議所)는 1930년 조선총독부의 「조선상공회의소령」의 발포에 따라 대구상업회의소를 해산하고 개편하여 설립된 경제 단체이다. 대구 지역의 상공업 발전과 일제의 식민 지배 정책에 부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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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채보상운동 이후 대구의 자본가들이 설립한 객주 조직. 대구상무소(大邱商務所)는 국채보상운동 이후 대구의 자본가들이 조선인 자본가의 이익을 구현하는 동시에 대구일본거류민단과 일본인상업회의소에 대응할 목적으로 설립한 객주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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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설립된 조선인 상인들의 이익단체. 대구상번회(大邱商繁會)는 조선인 상인들의 단결과 상업 번영을 도모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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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현 대구상원고등학교] 내에 결성된 항일운동 비밀결사. 대구상업학교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은 자본주의 제도 타파와 사회주의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다. 학교, 농촌, 공장 등 교육 현장과 생산 현장에서 일제에 저항하며 조선 혁명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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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대구의 상공업 발전을 위한 경제 단체. 대구상업회의소는 조선총독부가 1915년 공포한 「조선상업회의소령」에 따라 설립된 대구의 경제 단체이다. 기존의 일본인상업회의소에 조선 경제인들을 참여시켜 대구 지역 상공업 발전을 추구하고자 하였으나 대구 일본인 경제인의 이익을 구현하는 매개 역할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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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기독교 교육기관. 대구성경학교의 교육목표는 ‘장래 교회 인도자의 양성’이었다. 학생들의 특징은 신학교 입학을 희망하는 사람 중에 나이가 적거나 성경 공부가 부족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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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대구일본거류민단의 소방 단체. 대구소방조(大邱消防組)는 대구일본거류민단이 거류지(居留地)의 화재 방지 및 진압을 위하여 조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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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서문시장과 대신동 일대의 홍수 피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결성한 시민 단체. 대구수해대책위원회(大邱水害對策委員會)는 1924년 8월 13일 대구의 만경관에서 대구 수해 문제의 해결과 대책을 세우기 위하여 개최한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에서 결성되었다. 서문시장과 대신동 일대의 수해는 1924년 7월 장마철에 내린 비에 의한 천재가 아니라 서문시장 매립공사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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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9월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결성된 친일 관변단체. 대구시국협력회(大邱時局協力會)는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부응할 목적으로 대구의 친일 조선인 유지들이 총망라되어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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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미곡상들이 미곡취인소 설립을 위하여 개최한 시민대회. 대구시민대회(大邱市民大會)는 대구의 미곡상들이 1923년 2월 22일 결성한 ‘취인소설립기성동맹회(取引所設立旣成同盟會)’가 1923년 3월 7일 대구좌(大邱座)에서 미곡취인소 설립인가 획득을 목적으로 개최한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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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과 함께 대구에서 발행된 일간지. 일제강점기 말 대구에 본사를 둔 일본어 일간지 『대구일일신문(大邱日日新聞)』, 『대구일보(大邱日報)』, 『조선민보(朝鮮民報)』가 지역신문으로 발행되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물자 부족을 이유로 ‘일도일지(一道一紙)’의 언론 정책을 강요함에 따라 『조선민보』와 『대구일보』가 『대구일일신문』으로 통합되었다.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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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중구의 달성공원에 있던 신사. 대구신사(大邱神社)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일본인들이 일본의 국민도덕, 국민정신, 국민문화의 근원인 황민(皇民) 내셔널리즘의 이데올로기를 함양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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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경상북도관찰사 박중양이 주도하여 만든 대구 최초의 십자도로. 을사조약을 계기로 1906년 대구에 이사청이 설치된 이후 대구읍성이 헐리고 대구읍성이 헐린 자리에 순환도로가 조성되었다. 이어 경상감영 객사가 철거되었다. 그 뒤 경상북도 관찰부의 관찰사 박중양(朴重陽)은 시가지 간선도로 개설 사업을 벌이면서 경상감영을 관통하는 십자도로 건설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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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결성된 여성 계몽운동 단체. 대구애국부인회(大邱愛國婦人會)는 대구에서 여성 계몽운동을 표방하며 1908년 12월 결성된 여성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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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있던 여성 교육기관. 1907년 경상북도관찰사로 부임한 이충구(李忠九)는 전 관찰사 신태휴의 뒤를 이어 학교 설립에 적극적이었다. 이에 대구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대구양성여학교(大邱養性女學校)가 설립될 수 있었다. 대구양성여학교 설립에 대하여 대구광문사의 김광제(金光濟)는 여학교의 설립이 “나라의 한 번 경사보다 이십 배나 좋은 일이라…”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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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양조 산업.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 조선인의 양조에는 주정 5% 정도의 술인 막걸리가 주류를 이루었다. 일제는 1916년 주세를 늘리기 위하여 「주세령」을 발포하였다. 「주세령」의 제23조에 ‘연간 2석 미만의 자가용주를 허가하되 탁주 1석당 1원 50전의 세금을 납부해야 한다’라고 규정하였다. 1916년 당시 농민의 10%가 자가용주 제조 허가를 얻어 「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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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일제가 어음의 유통 저지 목적으로 설치한 금융기관. 일제는 1905년 화폐 정리 사업 직후 금융제도를 은행의 신설보다는 창고 및 어음 지급보증 등 전통적인 금융 기구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추진하였다. 일제는 1905년 9월 「수형조합 조례」 및 「약속수형 조례」를 공포하고, 한국의 전래 어음의 유통을 저지시키기 위하여 어음조합을 설치하였다. 대구어음조합[이칭 대구수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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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에 있었던 여성 및 아동 보호를 위한 경찰기관. 1946년 5월 15일 대한민국 최초로 여경찰관을 모집하였다. 간부 15명과 여경찰관 1기생 64명이 국립경찰학교에서 2개월간의 훈련을 이수한 뒤, 7월 16일에 배출되어 전원 중앙에 배치되었다. 1947년 1월에는 여경찰관의 정원이 500명으로 책정되어 각 도의 일선 경찰서에 여경찰관이 배치되었고, 7월 1일을 시작으로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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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창립되어 활동한 여성운동 단체. 대구여자청년회(大邱女子靑年會)는 일제강점기인 1923년 대구에서 조직되었으며, 여성들의 교육 운동, 직업교육, 권익 활동, 사회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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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연초전매지국에 조직된 혁명적 노동조합. 대구연초전매지국 내 적색노조(大邱煙草專賣支局內赤色勞組)가 조직된 것은 대구의 공업에서 연초 제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29%를 차지할 만큼 매우 높았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대구 연초공업은 전국 연초 생산에서 33%를 차지하여 서울 다음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대구연초전매지국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규모가 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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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3월 현재의 대구광역시 지역에 있었던 동양염색소의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일으킨 노동 쟁의. 동양염색소는 조선인이 경영한 동양염직소가 모체가 되는 기업으로 1920년대 중반에 이르러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염직소는 경상북도에 유일한 조선인이 경영하는 직조 공장이었다. 동양염색소는 1930년 3월 중순 노동자들의 임금을 일방적으로 20% 인하하는 조치를 취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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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유지들 중심의 친목 단체. 대구예월회(大邱例月會)는 1929년 8월 말 대구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회원 상호 간 친목 도모와 사회에 관심을 가질 것을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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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0월 대구노동친목회 소속의 대구역 화물 운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위하여 일으킨 파업. 대구역 운수 노동자들이 1925년 9월 임금인상을 요구한 배경은 1919년에 비하여 물가는 올랐으나 임금은 오히려 30%~50% 이상 떨어져 노동자들의 생존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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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있었던 최초의 한국인 설립 운수회사. 대구운수회사(大邱運輸會社)는 1906년 10월 정규옥(鄭圭鈺)과 서상돈(徐相燉) 등이 대구읍성 북문 밖에 설립한 운수회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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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서울에서 거주하던 대구 출신 유학생들의 친목 단체. 대구유학생구락부(大邱留學生俱樂部)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유학 와서 공부 중이던 대구 출신 유학생들이 1921년에 결성한 친목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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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2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발생한 대구 주둔 6연대 사건. 대구 6연대 사건[일명 대구 육연대 사건]은 1948년 11월 2일부터 1949년 1월 3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6연대에서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팔공산은 대구 6연대 제2차 사건과 관련되었다. ‘대구 6연대 제2차 사건’이란 1948년 12월 6일 여순사건 진압 작전 후 복귀하던 6연대 소속 병력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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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대구 방문 기념으로 내린 은사금과 지역 인사의 기부금으로 대구 공중의 이용 장소로 지은 건물. 대구 은사관은 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남순(南巡)할 때 대구를 방문하여 대한협회 대구지회에 하사한 2,000원을 기초로 지역 인사의 기부를 받아 건립한 건물이었다. 대구 은사관은 대한협회 대구지회의 회관으로 사용되다 대한협회 대구지회가 해산된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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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구의 경상북도관찰부와 일본인 사회에 의하여 추진된 대구읍성 철거. 대구읍성(大邱邑城)은 일본인들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관찰부와 일본인 사회에 의하여 1906년 철거되었다. 대구읍성의 철거로 전통 도시 대구의 풍광은 식민도시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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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설치된 통감부의 지방 통치기관. 대구이사청(大邱理事聽)은 1906년 대구부 동상면 포정동의 경상북도관찰부(慶尙北道觀察府) 내 선화당(宣化堂)에 설치된 통감부(統監府)의 지방통치 기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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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가와이 아사오가 쓴 책을 번역하여 1998년 대구중구문화원에서 펴낸 책. 『대구 이야기』의 일본어 원제는 1930년에 조선민보사(朝鮮民報社)를 경영하던 가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간행한 『대구 모노가타리[大邱物語]』이다. 『대구 이야기』는 1998년 대구중구문화원에서 『대구 모노가타리』를 손필헌이 번역하여 출간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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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인력거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단체. 대구인력거노우회(大邱人力車勞友會)는 1924년 대구 지역의 인력거 노동자들이 결성한 노동단체이다. 대구 인력거 노동자 80여 명이 중구 종로1가의 만경관(萬鏡館)에서 인력거 노동자들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단결하기 위하여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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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대구 사판조 인력거조합의 노동자들이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며 벌인 노동 쟁의. 1926년 무렵 대구 사판조(寺阪組) 인력거조합 노동자 24명은 낮은 임금에 경기 불황을 이유로 조합에 납부하는 사납금 인하를 요구하며 파업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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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5월 14일자 『대구일보』 사설의 조선 민족 모욕에 대하여 대구 지역 사회단체가 대응한 사건. 『대구일보』는 1928년 10월 1일에 대구에서 발간된 일본어 일간지였다. 『대구일보』 조선 민족 모욕 기사 사건은 1929년 5월 14일자 『대구일보』 사설이 조선 민족을 모욕한 내용으로 채워졌다고 판단한 대구의 사회운동단체들이 『대구일보』의 주필 및 편집국장에 대해 사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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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 대구일본거류민단(大邱日本居留民團)은 1906년 11월 대구에서 거주 중이던 일본인들이 결성한 자치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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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 대구일본거류민회는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의 감독 아래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이 자치단체의 기초를 확립하고, 부산 주재 일본 영사관의 감독 아래에서 일본인들의 행복을 도모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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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단체. 대구일본동포회는 1904년 6월 부산 일본영사의 감독 아래 대구 거주 일본인들의 자치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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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를 해산하고 새로 결성한 종교 단체. 대구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경북교구회는 대구에서 1943년 4월 30일 자로 해산된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북노회를 대신할 단체로 결성되었다. 대구 일본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경북교구회는 일제의 전시 동원 정책에 부응하며 친일 협력 활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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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 최초의 일본인 자치 조직. 대구일본인회(大邱日本人會)는 1900년 11월 부산영사관 서기 이쿠다[生田端正平]가 대구를 방문하여 대구 거주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 단체 결성에 대하여 상의를 한 뒤 일본인의 친목 도모와 정착 안정에 목적을 두고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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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2월 대구에서 일본인 발행의 『대구신보』의 제호를 변경하여 발행된 일본어 신문. 『대구신보(大邱新報)』는 1906년 1월 경영난에 빠져 휴간한 『대구실업신보(大邱實業新報)』의 제호를 변경한 신문이며, 격일 발행에 한국어판도 발행하다가 한국어판을 없애고, 매일 발행으로 바뀌었다. 1906년 12월 다시 『대구일일신문(大邱日日新聞)』으로 제호를 바꾼 뒤에도 신문을 발행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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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7월 대구 입자[갓] 제조 직공들의 임금 인하 반대 노동쟁의. 일제강점기에 전통 갓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입자(笠子) 직공이라 불렀다. 1926년 7월 대구의 전통 갓을 생산하는 업자들은 입자 노동자들이 생산하는 입자 하나의 임금을 45전으로 해오던 것을 30전으로 인하하였다. 입자 업주들은 입자 노동자들에 대한 임금 인하의 이유로 갓 제조업체가 가입해 있던 대구관물상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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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 한문양행자동차회사의 운수 노동자들이 대우 개선과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일으킨 노동쟁의. 한문양행자동차주식회사는 1921년 9월에 경상북도 포항에서 설립된 운수회사로 대구에 영업소를 설치 운영하였다. 사주는 경상북도 영덕의 자본가 문명기(文明琦)였다. 대구와 포항 사이를 하루 1회씩 운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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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되어 활동한 노동운동 단체. 대구재봉직공청년회(大邱裁縫職工靑年會)는 대구에서 청년 재봉 노동자들이 단결과 실력 양성, 생존권 평등을 목적으로 결성한 노동운동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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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대구에서 설립되어 한국전력공사로 이어진 전기회사. 대구전기회사(大邱電氣會社)는 1911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아 발전소 공사에 착수하였다. 1912년 9월 말 전기 공급을 위한 외선공사를 종료하였고 곧바로 내선 공사에 착수하였다. 1912년 12월 23일 전기를 생산할 발전기 설비를 끝낸 뒤 시험 운전을 거쳐 1913년 1월 송전을 개시하였다. 점차 사업의 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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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시민들이 대흥전기주식회사를 상대로 전기료 인하를 위하여 만든 시민 단체. 1920년대 대구에 전기를 공급하는 대흥전기주식회사의 전기 요금이 다른 도시에 비해 높은 것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자 대흥전기주식회사도 전기 요금을 인하할 계획으로 당국에 인가 신청을 하였다. 그러나 지역 사회에서는 대흥전기주식회사의 전기 요금 인하율보다 더 큰 폭의 인하를 위하여 기성동맹을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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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대구제4청년회(大邱第四靑年會)는 제4청년 계급의 역사적 사명을 위하여 청년의 단결과 교육, 훈련을 목적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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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2월 대구에 일본인이 설립한 제사 공장. 대구제사주식회사(大邱製絲株式會社)는 제사 공업의 최적지로 알려진 대구에서 제사를 생산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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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대구에서 대한민국 초대 국회의원을 선출하기 위하여 실시된 최초의 근대 선거. 한반도의 완전한 독립, 통일 근대 국민 국가의 건설을 이루기 위한 국제적 절차로서 모스크바삼상회의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한반도 문제가 미국에 의하여 유엔[UN]으로 이관된 뒤 단독선거[단선]에 의한 단독정부[단정] 수립이 가시화되었다. 유엔은 1947년 11월 14일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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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일본인 중심의 대구주식거래소 설치를 위하여 활동한 단체. 대구의 경제인들로 구성된 대구주식거래소설치기성회(大邱株式去來所設置期成會)는 대구 지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하여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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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던 대구 주조업자들의 이익단체. 대구주조조합(大邱酒造組合)은 1916년 무렵 결성된 것으로 보이며, 조합원 자격의 변화로 1928년 8월 다시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 1916년 대구주조조합이 처음 결성되었을 때는 소량의 술을 제조하여 파는 음식점들도 회원 자격이 주어졌으나 1928년 다시 결성된 대구주조조합의 회원 자격은 대량생산을 하는 양조업자에게만 주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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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을 관할한 사법기관.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은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이후 통감부 사법청이 폐지되고, 조선총독부 내에 사법부가 신설되어 전국의 사법행정 사무를 관장하는 가운데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사법행정 사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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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와 1990년대 대구에서 우리 노래 운동과 문화예술 운동을 위하여 결성된 복수의 문화단체. 1980년대와 1990년대 대구 지역 대학가와 문화계에 전통 민족문화 찾기와 민중문화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다양한 노래패들이 결성되어 문화예술 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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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청년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하여 설치한 군사훈련기관. 육군특별지원병 제도가 시행된 이래 대구에서 지원병이 최초로 입영한 것은 1938년 12월이었다. 서울의 지원병훈련소 제1회 수료생 201명 중 대구 출신의 24명은 1938년 12월 9일 기차로 대구에서 도착하여 달성군수와 대구경찰서 서장 등의 관민 유지의 환영을 받고 대구신사에 참배한 뒤 12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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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대구 시민들이 주택 임대료 인하를 위하여 결성한 사회운동단체. 대구차가료 감하동맹은 1931년 9월 5일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유지와 시민 100여 명이 주택과 토지 임대료 인하를 목적으로 창립한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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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 9월총파업의 시작을 알린 대구 철도 노동조합의 파업 조직. 조선공산당의 외곽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가 주도한 9월총파업이 1946년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 파업으로 시작된 이후 대구에서도 9월총파업이 전개되었다. 대구 9월총파업은 9월 24일 철도 노동조합과 운수 노동조합 종업원 1,000여 명이 파업에 돌입하면서 시작되었다. 9월총파업의 바탕에는 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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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청년 단체들이 합동전권위원회를 통하여 창립한 단일 청년 조직. 조선청년총동맹의 군 단일제 청년운동 방침이 제시되자 가장 대립 관계를 보였던 대구청년회와 대구청년동맹[대구제4청년회의 후신]이 합동을 결의한 뒤 대구청년회, 대구청년동맹, 대구무산청년회, 아구청년동맹 등 4개 청년 단체가 1927년 6월 24일 ‘각 단체 연합 간부 회의’를 열었다. ‘각 단체 연합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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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신사회 건설과 수양의 최고 기관을 표방하며 창립한 청년운동 단체. 대구청년회(大邱靑年會)는 1920년 1월 신학문을 수학한 신흥 청년 지식인층과 신흥 경제인 및 지역 유지들이 중심이 되어 창립한 대구 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이다. 1920년대 전반에는 문화 운동의 최고 기관을 표방하였고, 1920년대 후반에는 청년운동의 전 조선적 운동으로의 전환을 표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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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역에서 사납금 자율화 조치에 저항하며 사납금 인하와 부제 완화 투쟁을 벌인 대구 택시노동자의 총파업투쟁. 1980년대 노동자들의 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1980년에서 1990년에 걸쳐 노동생산성은 10.9% 증가하였으나, 노동자들의 실질임금 증가율은 7.1%에 그쳤다. 제조업 노동자들의 근로시간은 1987년 현재 주당 54.0시간으로 세계 최장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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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포목상들이 포목의 위탁판매를 위하여 결성한 이익단체. 대구 지역 포목상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구포목상조합(大邱布木商組合)은 자금 융통 및 위탁판매를 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또한 조선인 포목 상권을 회복하고 확장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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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설치된 조선인 교육 자문기관. 일제는 조선인 교육에 대한 정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1920년 7월 29일 「조선학교비령(朝鮮學校費令)」[제령 제14호]을 공포하였다. 「조선학교비령」은 토지 또는 가옥을 소유한 조선인들부터 부과금을 징수하여 보통학교[일제강점기 초등 교육기관]와 조선인 교육에 관한 학교비(學校費)를 충당하기 위하여 제정한 것이었다. 학교비는 부윤과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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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구에서 결성된 기독교를 신앙으로 하는 학생 단체. 1947년 대구에서 기독교를 신앙으로 믿는 중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학생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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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대구에서 기독교를 신앙으로 하는 중등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학생 단체. 대구학생기독교청년회(大邱學生基督敎靑年會)는 기독교 신앙 훈련, 학원의 건전한 학풍 조성, 상호 친목 도모, 민주 자질의 향상을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당면 목표는 기독 학생들의 규합, 좌익 학생의 공격에 대한 보호와 방어력 향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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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아양교 부근에 동촌비행장의 건설과 함께 설치된 무전 시설. 대구항공무전국 발신소는 1937년 1월 31일에 동촌비행장의 개장과 함께 대구항공무전국 수신소와 동시에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동촌비행장의 건설 계획은 1935년 8월 무렵 총경비 약 26만원에 1462,801㎡[4만 평] 정도 규모로 확정되었다. 수년간 동촌비행장 건설공사와 함께 항공무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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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신설된 군대 조직. 대구헌병분대(大邱憲兵分隊)는 1905년 9월 러일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러·일 간에 맺은 강화조약인 포츠머스조약을 계기로 편성된 주둔군 헌병대에서 비롯되었다. 주둔군 헌병대는 대구를 비롯한 서울·부산·인천·평양 등 12개 지역에 헌병대 분대를 설치하고, 그 밑에 56개의 헌병분견소를 두었다. 1906년 3월 주둔군 헌병대는 통달(通達) ‘제한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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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의 개최를 위하여 대구부 주도로 결성된 관민 협력 단체. 대구협찬회(大邱協贊會)는 1918년 10월 31일부터 11월 19일까지 개최되는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의 사업을 찬조하고, 관람자의 편의를 도모하여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할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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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7월 대구에 설치되어 운영된 교정 시설. 대구형무소는 사회로부터 격리·구금된 범법자와 형이 확정된 수용자에게 교정 교화를 통하여 건전한 사회인으로 복귀하도록 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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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이 단독 정부 수립 반대를 위해 일으킨 단식 투쟁. 1946년 10월 항쟁 이후 미군정이 추진한 대한 정책의 핵심은 중도파에 대한 파괴 분열 공작이었다. 중도파 분열 공작은 좌우합작위원회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구성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설치 과정에서 나타났다. 또 1947년 초반 미국은 모스크바 삼상 회의 결정안을 사실상 폐기하고 단독 정부 수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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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전후 대구형무소 수감자들이 국가 권력에 의하여 학살당한 사건. 6·25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 당시 대구형무소 수감자 규모는 8,026명 정도였다. 당시 대구형무소 수감자는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대구형무소 수감자의 3분의 2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사상범들이었다. 대구형무소의 사상범은 10월 항쟁, 대구 6연대 사건, 국민보도연맹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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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열린 대구형무소 출옥자를 위한 환영 대회. 미군정의 보고서에 따르면 해방 직전 대구형무소에는 1,600여 명이 갇혀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오후 5시 무렵 대구의 유지들이 대구형무소를 찾아 한국인 정치범을 즉시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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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계몽운동 시기의 교육도시 대구. 근대 계몽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영역이 바로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이었다. 근대 계몽운동 시기는 ‘학교 설립의 시대’로 불렸다. 대구에서도 계몽운동 시기에는 근대 교육을 위한 학교 설립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계몽운동 시기를 전후하여 교육 방식이 완전히 바뀐다. 이를테면 ‘서당’에서 ‘학교’로 변화되었다. 계몽운동 시기에 대구의 근대 교육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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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1월 대구에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확보를 지원하기 위하여 설립된 노동운동 단체. 대구·경북노동자생존권확보투쟁위원회(大邱·慶北勞動者生存權確保鬪爭委員會)는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고, 선진 지역이나 공장 소식을 노동자에게 전파하는 것을 주요 활동 목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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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부터 1910년까지 만들어진 대구와 경주를 잇는 도로로, 대구광역시 동구를 지나가는 도로. 대구와 경주를 잇는 도로이기에 대구-경주가도라 하며, 대구를 기점으로 동쪽, 동해를 향하기에 동부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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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설치된 대구의 행정구역과 지방 관제. 1910년 한일합병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 관제와 함께 도·부·군의 지방 관제가 시행되면서 1910년 10월 대구군(大邱郡)이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종래의 대구이사청은 폐지되었고 대구부는 대구이사청의 사무를 경상북도와 나누어 받아 대한제국 시기 29개 면, 260개 동의 행정구역을 관할구역으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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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부가 발주하여 작성한 도시계획 용역 결과 보고서. 「대구부도시계획 개요(大邱府都市計劃 槪要)」는 1922년 8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토목부원 우에다 마사요시[上田政義], 오쿠이 료타로[奧井亮太郞] 등이 대구부의 용역을 받고 제출한 도시계획 보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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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구부윤이 임명한 지방행정 보조 기구. 대구부 방면위원은 빈곤의 예방, 구제사업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각 방면의 봉사위원이나 관계기관, 종교, 행정 말단 기구인 정동 총대, 애국반 등이 긴밀한 관계를 이루어 목적을 수행하려 한 전시체제기 주민 통제 기구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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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대구의 서문시장과 대신동 일대의 홍수 피해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열린 시민대회. 대구부수해문제시민대회(大邱府水害問題市民大會)는 1924년 여름 대구의 서문시장과 대신동 일대에 발생한 홍수 피해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범시민적 차원에서 전개되는 가운데 대구부(大邱府)[현 대구광역시]에 해결책 마련을 촉구하기 위하여 열린 시민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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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부의 지방자치 의결 기구. 1929년 8월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총독이 다시 부임하면서 추진된 제2차 지방제도 개정은 1930년 11월 25일 일본 척식성이 조선총독부의 원안을 통과시켜 일왕의 허가를 받아 마무리되었다. 지방제도 개정의 취지는 ‘한층 더 민의의 창달을 도모’한다는 것이었다. 대구부회는 1930년 12월 1일 제령 제11호 개정 부제의 공포에 따라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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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역에서 경상북도 영천시 영천역까지 이어지는 노선으로 개통된 경편철도노선. 대구선은 1918년 5월 20일 하양~금호 간이 개통되었다. 1918년 9월 1일 금호~서악 간이 개통되고, 1918년 11월 1일 서악~포항 간 공사가 개통되어 마무리되었다. 1919년 포항~학산 간을 개통하여 전체 구간의 개통을 이루게 되었다. 이를 동해중부선이라 한다. 1919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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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한국노련 대구지구연합회에서 탈퇴하여 결성된 노동운동 단체. 대구시노동조합연맹(大邱市勞動組合聯盟)은 한국노련[한국노동조합총연맹] 대구지구연합회의 노선을 거부하며 지역 단위의 독자적 노동조합 연합체를 결성할 목적으로 1961년 3월 26일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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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인민위원회의 지역 기구로서 결성되었던 민간 자치 기구. 대구시 인민위원회(大邱市人民委員會)와 같은 지역 인민위원회는 인민공화국의 지방적 체계이자 대중적 토대였으며, 치안 및 행정기능의 주체로서 노동·농민조합과 대중조직의 결성을 지원하는 동시에 토지문제와 일체의 식민지 체제의 해제를 주도할 수 있는 임무를 띠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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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대구광학회에서 자치 조직으로 설치한 기구. 대구시의소(大邱市議所)는 1906년 대구광학회가 대구부민의 지식을 개발하고, 민권(民權)을 부식하기 위하여 결성한 자치 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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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월 1일 경상북도 대구시 칠성동에 경부선 철도 대구 역사를 개통한 사건. 대구역은 경부선의 철도 개통과 함께 1905년 1월 1일 정식 개통하였다. 정식 개통 전 대구의 북쪽에 가건물을 세워 1904년 8월부터 임시 역사를 세워 영업을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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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다양한 이념과 폭넓은 운동 노선의 독립운동이 펼쳐지는 배경이 된 1919년 대구의 3·1운동. 1919년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전민족적 항일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한국인의 의식에 농축된 자주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민족자결이 고조되는 국제정세의 변화와 맞물려 폭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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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전개된 민주·민족운동. 대구광역시의 4·19혁명은 2·28민주운동에서 시작되어 3·15부정선거 시위를 거쳐 4·19로 이어지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민주·민족운동이 싹트게 하였다. 4·19혁명 시기 대구광역시에서 다양한 민주·민족운동이 봇물 터지듯 표출되어 한국의 민주·민족운동을 선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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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25전쟁 전후 대구에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과 1960년 6월 결성된 경북피학살자유족회의 활동. 6·25전쟁 중 남한 지역에서 진행된 민간인 학살은 국군 및 미군, 인민군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남한 지역 민간인 학살은 인민군 점령 지역, 빨치산 근거지 일원, 전쟁 직후 인민군 미점령 지역 등지에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은 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대구는 인민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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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10월부터 1930년 3월 사이 대구에서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발생한 학생운동. 1929년 10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신간회도 활성화될 때, 대구에서도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학생 중심의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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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특색을 상업 도시로 각인되게 한 대구의 시장. 조선 후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면서 시장이 생겨나고, 시장을 배경으로 객주가 등장하였다. 더욱이 대구는 경상감영이 설치된 경상도의 수부였고, 낙동강 물길을 배경으로 바닷가의 해산물과 내륙의 곡물을 교환하는 방식의 어염미두(魚鹽米豆) 무역의 주요 지점이었다. 조선 후기 대구에는 10여 개소의 시장이 열렸으며, 지금도 그 명맥을 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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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8월 5일 대구에서 실시하였던 정·부통령 선거. 6·25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의원들이 60% 이상 당선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간접선거에 의한 재선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직선제를 위한 개헌을 시도하는 한편, 지지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임시 수도 부산에서 1951년 12월 17일 자유당을 창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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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학생운동과 1930년대 학생운동의 중심인물 김일식. 김일식(金一植)[1912. 10. 3.~1953]은 1912년 대구의 남산동에서 분성김씨(盆城金氏) 김영우와 이귀갑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일식은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형제와 아버지 형제에게서 항일독립운동의 영향을 받으면서 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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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대구와 경북의 각급학교 교사들이 교원의 이익 옹호와 학원의 민주화를 위하여 만든 교원 노동조합. 4·19혁명을 계기로 대구와 경북의 각 학급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 ‘학원의 자유’를 내세우며 대구지구중등학교교원노동조합, 대구지구초등학교교원노동조합, 경북지구중등학교교원노동조합을 설립하여 교원의 지위 향상 및 신분 보장, 교원노조의 합법화 투쟁, 학원 부정부패 척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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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구에서 결성된 우익계 대동청년단의 경상북도 조직. 대동청년단 경북도단부(大同靑年團 慶北道團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우익계 청년 단체의 대동단결을 통한 정치활동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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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교남학교를 인수하여 설립한 교육 재단. 대붕교육재단(大鵬敎育財團)은 재단 부실을 이유로 폐교 처분을 당한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인수하여 교육활동을 펼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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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강습소로 개관한 교육기관. 대성학관은 1921년 12월에 김구, 서석태, 한익동이 옛 공립 수창학교에서 개관하였으며, 초등과와 고등과로 나누어 학생을 모집하였다. 입학자격과 모집인원을 보면, 초등과는 한문만 수학한 14세 이상의 남자 90명, 고등과는 보통학교 졸업생과 동등 학력이 있는 남자 50여 명이었다. 여기에 ‘품행 방정’을 조건으로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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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에 대구의 대성학관 학생들이 교사의 유임을 위하여 벌인 학생운동. 1921년 12월에 강습소로 개관한 대성학관이 1922년 건물 신축과 함께 학관의 규칙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교사들과 의견 갈등 끝에 교사들이 사직하게 되자 대성학관 학생들이 교사들의 유임을 요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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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대구에서 결성된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한 노동운동 단체. 대한노동총연맹 대구지구연맹(大韓勞動總聯盟 大邱地區聯盟)은 어용 노동조합을 지지하는 대한노동총연맹 경상북도연맹에 반대하며 노동운동의 민주화를 위하여 1957년 결성된 노동운동 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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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반탁운동을 위하여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경북 조직.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大韓獨立促成國民會 慶尙北道支部)는 1946년 2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김구(金九)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로 발족한 것을 계기로 대구에서도 1946년 3월 조선독립경북촉진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경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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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대구 지역 조직. 1946년 2월 8일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탁치반대조선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가 결성된 것을 계기로 대구에서도 1946년 3월에 조선독립경북촉진회와 탁치반대조선국민총동원위원회 경북본부가 합쳐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가 발족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아 대구에서도 1946년 5월 17일에 대한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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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계몽 운동 단체. 대한협회 대구지회는 1907년 국채 보상 운동 이후 대구, 달성 지역의 계몽 운동 세력이 설립한 계몽 운동 단체로서 대구 광문사와 대구 광학회를 역사적으로 계승하면서 지역에서 교육 운동과 실업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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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일제의 한 일 병합 이후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이 중국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를 위한 독립운동 자금을 국내에서 조달하는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대한민국 길림 주재 군정사는 1918년 4월 무렵 김영순이 중국 길림성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유동열(柳東說)을 만나 조선 독립을 위해 청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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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에 따른 경상북도 달성군 지역의 정세 변동. 1948년 5월 10일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 선거로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치러져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다. 달성의 5·10 선거 과정에서 단독 정부를 반대하는 시위가 전개되었고, 5·10 선거 이후에도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시위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치러진 제헌 국회에서 달성군에서는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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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설립된 유사 자치 기구. 대한제국기 대구시청(大韓帝國期大邱市聽)은 윤영섭 등이 민의의 자치 기구를 목적으로 하여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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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대구전기회사와 함흥전기주식회사가 합병하여 설립된 전기회사. 대흥전기주식회사(大興電氣株式會社)는 1911년 설립된 자본금 10만 원의 대구전기회사와 자본금 4만 5000원의 함흥전기주식회사가 합병하여 자본금 50만 원으로 설립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두 회사의 합병이나 실제는 대구전기회사가 함흥전기주식회사를 인수합병한 것이었다. 합병 당시의 대표이사는 오쿠라 다케노스케[小倉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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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도성호(都性浩)[?~?]는 1902년부터 1906년 사이 경상북도관찰부 관할인 낙육재(樂育齋)에서 공부한 유생 출신이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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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도정호(都正浩)[?~?]는 대한제국의 외획 제도로 운영된 경남봉쇄원에서 활동하였으며,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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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민족독립운동. 대구의 독립운동(獨立運動)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대한 저항이자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 독립을 달성하여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운동이었다. 대구의 독립운동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항쟁과 계몽운동, 식민지 시기 대중운동, 문화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외 항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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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독립을 위하여 전개된 민족 운동. 한말 달성군은 근대 자주적 국민 건설 운동을 전개하였다. 먼저, 대구에서 펼쳐진 계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와 대구 광학회(大邱廣學會), 1907년 대동 광문회와 현풍군 단연 보상회(玄風郡斷煙報償會)를 통해 국채 보상 운동, 1908년 대한 협회 대구 지회 등을 통해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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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민족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람. 대구의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의 한국 침략에 저항하며 국권을 수호하고, 민족독립운동을 전개한 인사들이다. 대구의 독립운동은 조선과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항쟁과 계몽운동, 식민지시기 대중운동, 문화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외 항일운동, 학생운동, 광복군 등 국내외에서 다양한 노선에 의하여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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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5월 대구에서 우익 진영에서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개최한 정치 집회. 독립전취경북국민대회는 1946년 2월부터 진행된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5월 12일 서울에서 열린 독립전취국민대회에 영향을 받아 대구의 우익 진영이 개최한 정치 집회였다. 서울의 독립전취국민대회에서는 자주적 정부 수립이 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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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 최초의 계몽운동 단체.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 개화파 지식인들은 1896년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이어 1896년 7월 독립협회를 창립하였다. 독립문 건립과 독립공원 조성을 창립 사업으로 하여 발족한 독립협회는 대한민국의 자주독립과 외세의 배격, 내정 개혁을 주장한 대한민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하였으며, 1898년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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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 독촉청년연맹(獨促靑年聯盟)은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에 대한 반탁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발족한 대한독립촉성경북국민회의 노선을 실현할 목적으로 결성된 우익 청년층의 결집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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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 일제는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민족동화정책을 기조로 한 식민지배정책을 폭압적으로 실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헌병경제찰제도를 도입하여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토지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키고 소작조건을 악화시킴으로써 조선인 자소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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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 사건. 동구 지역 민간인학살사건에는 국민보도연맹, 한국전쟁 발발 등이 주요한 배경이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4월 좌익사상가 전향자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조직된 관변단체인데, 1948년 12월 시행 공포된 「국가보안법」의 구체적 운용 대책으로 조직되었다. 한국전쟁을 전후 시기 국민보도연맹들에 대한 대량 학살이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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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1월 대구의 동부정거장 나네기운송점 노동자들이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일으킨 노동쟁의. 대구의 동부정거장 부근에 있는 나네기운송점[眞木運送店] 노동자 40여 명은 1927년 11월 28일 현미 211 가마니를 창고에 운반하여 넣고 한 가마니 당 임금 1전씩을 받지 못하자 파업을 단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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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대구에서 발생한 동아인촌회사의 임금 인하와 체불에 대한 노동자들의 파업. 동아인촌회사(東亞燐村會社)는 1920년 3월 29일 장직상(張稷相) 등 7명이 발기하여 설립인가된 주식회사로 성냥 제조와 성냥에 쓰이는 나무 및 기타 부대 물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회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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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한국 최초의 방직공장. 1915년 설립된 동양염직소(東洋染織所)는 일제가 세운 조선방직보다 2년 앞서 설립된 한국 최초의 방직공장이다. 동양염직소가 설립되면서 수공업 위주의 대구 섬유공업이 공장제 섬유공업 시대를 맞이하였다. 동양염직소의 설립은 한국 섬유공업이 대구에서 시작되었다는 의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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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 일대에 건설된 비행장. 1931년 대구부의 도시계획에 따라 현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동 일대를 대구부[지금 대구광역시]에 편입해 비행장 건설을 계획하였고, 1930년대 초 대구에도 국제 항공로의 비행장이 설치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대구비행장 설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수년 동안 아무런 활동 없이 지내다가 1933년 8월 8일 대구공회당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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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부터 2018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일대에 건설된 비행장으로, 현재 군사비행장과 대구국제공항이 병행 운영되고 있는 비행장. 1937년 1월 31일에 현재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 일대에 대구비행장이 개장함으로써 대구광역시도 항공시대를 열게 되었다. 대구비행장 설치 움직임은 1930년에 최초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대구[대구광역시]에도 국제 항공로의 비행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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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30일 대구광역시 동구 동화사 지방학림 소속 학생들이 대구광역시 중구 남문밖시장에서 전개한 만세독립운동.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인 무단통치와 강압적인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에 독립을 열망을 키우고 있을 때, 국외에서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 혁명 등의 영향이 한반도에 미치면서 2·8독립선언이 이어져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만세독립운동이 발생하였다. 불교중앙학림학교 교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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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마명(馬鳴)[1906~?]은 1906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조직인 진우연맹(眞友聯盟)에 가담하였으며, 건설사(建設社)·조선노농총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본명은 정우호(鄭宇鎬)이고, 마승주(馬昇宙)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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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3월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학원건설회가 개최한 국립종합서울대학교안 반대 동맹휴학에 반대한 대회. 맹휴반대학생총궐기대회는 1947년 2월부터 좌익계의 학생들이 주도하는 국립종합서울대학교안 반대 동맹휴학 투쟁에 맞서 동맹휴학을 반대하는 활동으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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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사립 여성 교육기관. 명신여학교는 1910년 무렵 대구의 달서여학교(達西女學校)와 신명여학교(新明女學校)가 합병하여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이다. 명신여학교는 1926년 4월 교명을 사립 복명여자보통학교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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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3일 대구의 좌익 세력이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을 지지하기 위하여 개최한 정치 집회. 1945년 12월 대구에서 좌우익 연합의 조선신탁관리대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1946년 1월 초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의 전문이 알려지면서 중앙의 좌익이 신탁관리 반대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 절대 지지’로 선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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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조직된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 1940년 대구사범학교의 비밀결사 무우원은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한 뒤 근심과 걱정이 없는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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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킬 즈음인 1940년에 대구 사범 학교에서 조직된 항일 비밀 결사. 무우원(無憂園)은 불교 사상을 바탕으로 민족의 낙원을 건설하고, 폭력적인 투쟁이 아닌 문화·경제적인 힘을 길러 독립을 달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무우원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근심 걱정 없는 행복한 나라를 만들자는 뜻이자, 유태인처럼 경제의 힘을 길러 적을 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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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달성군 출신의 의병장. 본관은 남평(南平). 본명은 문봉각(文鳳珏)이다. 충선공 문익점(文益漸)의 20세손이며, 11대조 문세근(文世根)이 처음 달성으로 옮겨와 살았다. 9대조 문영남(文榮南)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으로 활동, 선략 장군 훈련 봉사(宣略將軍訓練奉事)의 직을 받았다. 아버지는 문하규(文夏奎)이고, 어머니는 경주 이씨(慶州李氏)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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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장지(章之), 호는 수봉(壽峯). 문박(文樸)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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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문한우(文漢雨)[1921~2000]는 1921년 1월 22일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명동에서 태어났다. 1944년 강제 징집되어 대구 제24부대[경북방위군 제24부대]에 배치되었으나, 동지들과 함께 부대를 탈출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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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대구에서 경북군정청이 군정청의 진로 및 방침 선전과 행정개혁 협력을 위하여 설치한 행정 고문 기구. 1945년 11월 경북군정청은 미군정청 특사로 파견된 서상일(徐相日)과 최윤동(崔允東)의 추천을 수용하여 에드윈 A. 헨 경북도지사가 발표하는 방식으로 경상북도 행정고문을 선정하였다. 미군정청 경상북도고문은 경북군정청의 협의기관적 성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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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대구에서 경상북도군정청이 군정청의 진로 및 방침 선전과 행정개혁 협력을 위하여 설치한 대구부 행정고문 기구. 1945년 11월 경상북도군정청은 미군정청 특사로 파견된 서상일(徐相日)과 최윤동(崔允東)의 추천을 수용하여 에드윈 A. 헨 경북도지사가 발표하는 방식으로 대구부 행정고문을 선정하였다. 미군정청 대구부고문은 경북군정청의 협의기관적 성격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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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대구에 파견된 미군정청의 특사.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3일 서상일(徐相日)[1886~1962]과 최윤동(崔允東)[1897~1965] 두 사람을 대구에 특사로 파견하였다. 미군정청 특사는 1945년 11월 5일 경북군정청 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사의 임무에 대하여 밝혔다. 그 내용은 군정 당국의 방침을 일반인에게 알리고, 경북 도민의 요구와 희망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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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미군정이 대구 10월항쟁에 대응하고자 포고한 긴급조치. 대구 지역에서는 해방되고 1년이 지나도록 극심한 식량난이 지속되자 불만을 품은 시민들이 미군정의 식량 정책 실패에 항의하며 시위에 나섰고, 이에 경찰이 총격을 가하면서 시위가 무장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10월 항쟁이다. 10월 항쟁을 진압하기 위하여 미군정은 해방 이후 최초의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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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26일부터 4월 28일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전개된 만세독립운동. 1910년대 일제의 폭압적 무단통치와 강압적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되는 가운데 독립에 대한 열망이 커져 가고, 국외에서는 파리강화회의와 러시아 혁명에 영향을 받으면서 만세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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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27일 대구의 달성공원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대구시위원회가 미소공동위원회 속개를 축하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촉진하기 위하여 개최한 시민대회. 1946년 2월 서울의 덕수궁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안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미소공동위원회 참가 자격 문제로 인하여 휴회하였다. 이후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속개되었다.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는 1946년 6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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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대구에서 창간된 지역 일간지. 1945년 9월 15일 창간된 『민성일보(民聲日報)』의 발행인 겸 사장은 이목이었고, 편집인은 도재기였다. 좌익 대변지 역할을 하며 발행되던 『민성일보』는 1946년 대구 9월총파업이 일어나자 1946년 9월 27일 민성일보 노동조합이 제작 거부에 들어가 정간되었다가 1946년 12월 10일 편집국장이던 민영근(閔榮根)이 2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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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4월 미군정 시기 달성군에서 결성된 좌익 성향 정치·사회단체의 연합 조직. 1946년 4월 미군정 시기 달성군에서는 민족주의민족전선 경북 위원회가 결성된 직후 민족주의민족전선 달성군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좌익 성향 정치·사회단체의 연합 조직으로서 성격을 가지나 민족주의 세력도 참여하고 있었다. 미소 공동 위원회에 대한 대응이라는 정치적 문제뿐만 아니라 당시의 긴급한 현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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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대구 지역의 경북고등학교에서 결성된 고등학교 최초의 통일운동 단체. 민족통일경북고등학교결성준비위원회(民族統一慶北高等學校結成準備委員會)는 1961년 4월 16일 서울 진명여자고등학교에서 열린 전국학생민족통일전선 발기위원회 결성과 ‘통일 촉진 악법 반대 대강연회’가 열린 시점인 1961년 4월 20일 결성되었다. 민족계몽협회 경북고지부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선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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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대구의 우익 정치세력이 조선독립경북촉진회를 강화하기 위하여 개최한 회의. 민족통일대표자회의(民族統一代表者會議)는 1945년 11월 20일 학생동맹경북본부, 영남민보단, 경북기독교노회, 대구치과의사회, 경북불교협회, 경북상공대책위원회, 경북불교부인회, 대구의생회, 대구영화협회 등 대구의 각 단체 대표자 6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회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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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시기 안경근, 안민생, 김성달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민족 통일운동 단체. 민족통일연맹(民族統一聯盟)은 4·19혁명 시기 남북 교류, 평화통일을 목적으로 안경근(安敬根), 안민생(安民生), 김성달(金星達) 등이 주도하여 결성한 민족 통일운동 단체이다.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경근은 일제강점기 김구를 보좌하면서 밀정 숙청 작업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고 안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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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11월 10일 대구의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통일운동을 위하여 결성한 단체. 민족통일촉진학생연구회(民族統一促進學生硏究會)는 1960년 9월 고려대학교의 전국대학생시국토론대회, 10월 대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정치학회 주최의 제5회 학생 토론회와 경북시국대책위원회의 발족, 11월 1일 서울대학교 민족통일연맹의 발기에 영향을 받아 11월 4월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학생 30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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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설립된 좌익 성향의 청년 단체. 1946년 6월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에서 곽윤섭을 대표로 하여 150명으로 구성된 좌익 성향의 민주 청년단이 결성되었다. 민주청년단은 모스크바 삼상 결정안을 지지하며, 미소 공동 위원회의 원활한 개최 등 정치 문제에 초점을 두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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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에서 결성된 민주주의민족전선대구시위원회 산하 청년 단체. 민주청년동맹 대구시위원회(民主靑年同盟大邱市委員會)는 민주주의 통일 정권 수립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혈기 넘치는 청년의 단결과 규합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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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되었던 반유신 민주화운동 단체. 민주회복국민회의는 반유신 민주화운동을 결집하기 위하여 1974년 11월 27일 이병린, 함석헌, 천관우, 김홍일, 강원룡, 이희승, 이태영의 7인 위원회를 중심으로 정계, 종교계, 학계, 문인, 언론인, 법조인, 여성계 등 각계 대표 71명 명의로 발족한 시민단체이다. 발족 당시 ‘민주회복 국민선언’을 발표하였는데 선언문의 주요 내용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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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대구에서 결성된 민주국민당의 지부. 민주국민당은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창당하였다. 한국민주당의 민주국민당으로 전환은 이승만 세력과의 결별을 의미하였고,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뀐 것이었다. 민주국민당의 정강정책은 한국민주당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주국민당은 1949년 8월 대동청년단과 동성회(同成會) 일부를 포섭하여 국회의원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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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의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1960년 7·29총선거를 앞두고 공명선거 실시를 위하여 결성하였던 학생운동 단체. 민주선거촉진학생연맹(民主選擧促進學生聯盟)은 경북대학교 학생들이 다가올 7·29총선거에서 정치적 중립과 공명선거를 요구할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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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4월 22일 대구에서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의 지역 조직. 1971년 4월 19일 결성된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1970년대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였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는 결성 대회에서 김재준·이병린·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하였고, 신순언·이호철·조향록·김정례·법정·한철하·계훈제를 운영위원으로 선출하였다. 1971년은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와 5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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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대구에서 결성된 경상북도 지역 좌익 정치·사회단체의 연합조직이자 정권 기구.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民主主義民族戰線慶北道委員會)[약칭 민전 경북도위원회]는 경상북도 지역 통일전선 조직을 전망하면서, 민주주의적 자주독립 국가 수립, 일제 잔재 세력 배제, 경제부흥, 민족문화 재건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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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3월 27일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 지역 좌익의 정치·사회단체의 연합조직이자 대구 지역 좌익의 정권 기구. 민주주의민족전선 대구시위원회(民主主義民族戰線大邱市委員會)는 대구 지역 통일전선 조직을 전망하면서, 민주주의적 자주독립 국가 수립, 일제 잔재 세력 배제, 경제부흥, 민족문화 재건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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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 산하 청년 단체. 민청경북위원회(民靑慶北委員會)[민주청년동맹 경북위원회]는 민주주의 통일 정권 수립을 촉진시킬 목적으로 혈기 넘치는 청년의 단결과 규합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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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대구에서 결성된 민주통일국민회의의 경북 지부. 1970년대 민주화운동에 공헌한 재야인사들은 민주주의 실현과 민족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재야 민주 통일운동 단체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하고 1984년 10월 16일 민주통일국민회의(民主統一國民會議)[약칭 국민회의]를 창립하였다. 민주통일국민회의는 장기표, 백기완, 김병걸, 계훈제, 김태홍, 이호철 등 종교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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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경북대학교 복학생들이 중심되어 결성한 학생운동 단체. 민주화투쟁협의회(民主化鬪爭協議會)는 경북대학교 복학생들로 구성된 복학생협의회가 경북대학교 총학생회와 함께 학원 민주화운동과 사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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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경식(朴敬植)[1909~?]은 1909년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현 대구초등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일우동맹(一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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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이자 서예가. 박기돈(朴基墩)[1873~1947]은 18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구에 거주하며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서예가이자 경제인으로서 활동하며 교육운동·사회운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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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남준(朴南俊)[1892~?]은 1892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정상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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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득룡(朴得龍)[1908~1941]은 1908년 7월 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중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박대득(朴大得)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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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명근(朴命根)[1909~1987]은 1909년 3월 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혁우동맹(革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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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명줄(朴明茁)[1903~1963]은 1903년 10월 1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대 대구에서 청년운동과 신간회(新幹會)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경상북도 의성에서 적색농민조합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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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박민동(朴民東)[1874~?]은 1874년에 태어나 대구에 거주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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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상호(朴常浩)[1904~?]는 190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혁우동맹(革友同盟)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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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여성 독립운동가. 박수의(朴守義)[?~?]는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 중국 푸우쑹[撫松縣]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軍政署) 부속 기관인 흥업단(興業團)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이만준(李萬俊)과 이재술(李再述)을 통해 가입하였다. 박수의는 흥업단의 유일한 여성 단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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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호는 덕암(德巖). 박왕호(朴汪鎬)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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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박승동(朴承東)[?~?]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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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박정동(朴晶東)[?~?]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1908년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대구지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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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박중양(朴重陽)[1874~1959]은 1874년 5월 3일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 양주동에서 아전 가문 출신의 박정호(朴鼎鎬)와 전주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호는 해악(海岳)이며, 다른 이름은 박원근(朴源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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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박창호(朴昌鎬)[1901~?]는 1901년 11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매산동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박월룡(朴月龍)·박명룡(朴明龍)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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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할동한 독립운동가. 박태식(朴泰植)[1909~?]은 1909년 5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옥산면 감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혁우동맹(革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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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태철(朴泰哲)[1918~2014]은 박태철은 1918년 12월 10일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에서 박종석(朴鍾錫)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선기계제작소에 근무하던 1943년 한글 문학작품을 엮은 『목양(牧羊)』을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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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박태현(朴泰鉉)[1899~1974]은 1899년 7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침산동에서 태어났다. 계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0일 대구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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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박해극(朴海克)[1882~?]은 1882년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법조인으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관련 사건들을 변호하였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때 납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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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계몽 운동가·관료. 박해령(朴海齡)[1857∼1920]은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1907년 2월 대구 광문사(大邱廣文社)[달성 광문사] 문회가 학교 설립을 통한 교육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기 위해 명칭을 대동 광문회(大東廣文會)로 바꿀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대동 광문회 회장을 비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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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949년 2월 대구에 설치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경상북도 조직. 1948년 8월 5일 국회 제40차 본회의에서 김웅진 의원 등이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특별위원회’ 구성안을 긴급동의로 제안하여, 거수표결 끝에 재석 155, 찬성 105, 반대 16표로 가결되었다. 곧바로 28명의 기초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법안 기초작업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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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달성군을 포함해 전국에 설치된 친일 반민족 행위 청산 특별 위원회. 제헌 국회에서는 일제 강점기 친일파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역사적, 법적으로 청산하기 위하여 특별법 제정에 착수하여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이 법은 1948년 9월 22일에 공포되었다. 이 법에 따라 친일파의 친일 반민족 행위를 조사할 특별 위원회로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약칭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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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7월 대구의 학생들이 7·29총선거에 입후보한 자유당 관련자 후보의 사퇴 촉구 및 반민주·반혁명 행위를 규탄한 집회. 반혁명인사규탄대회는 1960년 제2공화국의 첫 민의원과 참의원을 선출하는 7·29총선거가 가까워지는 시점에서 대구 지역 학생들이 총선거에 나선 과거 자유당 관련자의 후보 사퇴를 촉구하고 반민주·반혁명 행위를 규탄한 집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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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방명원(方明圓)[?~?]은 경상북도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지금의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에서는 서문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 뒤 4월 17일 비밀 결사 혜성단(慧星團)이 조직되었다. 다음날인 4월 18일 달성군 달서면 내당동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 혜성단의 김수길(金壽吉) 등이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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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대구에서 결성된 우익 청년 단체. 1947년 2월 16일 대구공회당[북구 칠성동]에서 우익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배달청년단(倍達靑年團)은 대구 지역 우익 진영의 강화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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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배상렴(裵相濂)[1892~?]은 1892년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재건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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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배상연(裵相淵)[1889~?]은 1889년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경산리에서 태어났다. 재건 달성친목회와 관계를 맺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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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정치인이자 목회자. 배은희(裵恩希)[1888∼1981]는 1888년에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1919년 평양 신학 전문학교 재학 중에 3·1 운동에 참여하였고, 1921년 전주 서문 교회 목사로 부임하였다. 호남 지방 최초의 유치원인 전주 유치원을 설립하여 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 협동 전선 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전주 지회의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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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유격전을 지도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배철은 1912년 황해도 개성에서 태어났다. 1928년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정학처분을 받았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때 송도고등보통학교 투쟁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투쟁을 벌이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 구금되는 탄압을 받았다. 1931년 일본 니혼대학[日本大學]에서 유학하던 중 일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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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통일운동가. 백규천(白奎千)[1915~?]은 1915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에서 태어났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시국대책위원회와 경북민족통일연맹을 통하여 자주적 남북통일과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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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백대윤은 1907년 3월 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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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백춘갑(白春甲)[1909~1950]은 1909년 2월 16일 지금의 강원도 영월군 남면 북쌍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학생대표자회(學生代表者會) 결성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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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표적 빈민촌. 백헌장옥(白軒長屋)은 일제강점기 대구의 대표적 빈민촌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구의 조선인과 언론은 백헌장옥을 ‘99간의 빈민굴’ 또는 ‘빈민굴’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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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달성친목회가 대구에 설립한 강습소. 법률야학강습소(法律夜學講習所)는 청년층의 친목 도모와 교육 및 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대구에서 결성된 계몽운동 단체인 달성친목회가 대구 지역 사람들을 대상으로 근대 법률 체계와 의미를 계몽하기 위하여 1908년 9월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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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와 경북 각 지역 조선어 신문지국과 조선인 기자들이 상호 연락과 협조를 위하여 결성한 기자 단체. 1930년대 들어 대구·경북 지역의 사회운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고, 동시에 조선의 사회운동 노선이 비합법운동으로 전환되어 가면서 사회적 관심 사항을 일반에 알리기가 수월치 않게 되었다. 이에 대구·경북 각 지역 신문지국과 지국 기자들이 보도의 협조를 꾀하면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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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일본 군대. 보병80연대(步兵八十聯隊)는 일제가 한국을 강제 병합한 뒤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2개 사단과 함께 대구에 배치된 군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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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8월 대구에 주둔하던 보병80연대 소속 육군 대위 세가와 마사오가 조선인 일가족을 폭행한 사건. 1927년 8월 초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육군 대위 세가와 마사오[瀨川正雄]가 자신의 조카와 말다툼을 하던 신구실(辛玖實)을 폭행하였다. 이어 세가와 마사오는 신구실의 여동생과 삼촌을 폭행하고, 어머니까지 머리채를 잡고 폭행하였다. 피해자 신구실은 10세의 어린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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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4월 대구에서 명신여학교의 교명을 변경하여 설립된 사립 여자 보통학교. 복명여자보통학교는 1925년 12월에 명신여학교의 설립자를 김울산으로 변경한 뒤 1926년 4월 사립 여자보통학교로 지정을 받는 동시에 교명을 ‘사립 복명여자보통학교’로 변경하여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이다. 복명사립보통학교는 1928년 5월 26일 대구복명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대구복명공립보통학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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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대구에서 결성된 진보적 여성단체. 부녀동맹 대구지부는 1946년 1월 13일 대구광역시 중구 태평로에 있던 대구공회당[현 대구콘서트하우스]에서 결성된 진보적 여성단체이다. ‘대구시 부녀동맹’으로도 불린다. 부녀동맹 대구지부의 조직과 임원은 위장장 우신실(禹信實), 부위원장 정귀악(鄭貴岳), 총무부장 배영옥(培英玉), 조직부장 고윤녀(高胤女), 선전부장 박복조(朴福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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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시기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과 대학생들이 부정부패한 사립학교 재단을 정화하기 위하여 펼친 학원민주화운동. 부패재단 정화운동은 해방 이후 학교 설립 및 운영에 관한 교육정책과 관리감독의 소홀에서 비롯되었다. 허술한 학교 설립인가 조치를 악용하여 재단을 설립하여 학교 재정의 부실화를 초래한 경우가 허다하였다. 또한 정관을 자의적으로 정하여 재단 운영 및 학원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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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 붉새회[일명 서광회]는 ‘조선 혁명의 완수’를 목적으로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붉새회는 식민지 노예교육 반대와 민족교육 실시를 관철하려 하였으며, 궁극적으로는 학생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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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대구에서 발생한 10월항쟁을 수습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하여 관민 연합으로 결성된 사회단체. 비상시국대책위원회(非常時局對策委員會)는 1946년 10월 15일과 10월 16일 이틀에 걸쳐 경상북도청에서 미군정 및 경상북도지사, 경무 총감, 경찰 등의 관계자와 대구·경상북도의 각계 대표 인물 등 약 200명이 참석하여 10월항쟁의 긴급 수습에 관한 대책을 마련하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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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운영한 사회주의사상 강좌회. 사상강좌회(思想講座會)는 일제강점기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구6·10만세운동을 계기로 학생운동의 강화를 위하여서는 사회과학 연구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신간회 대구지회를 비롯한 청년 단체의 주요 인물을 초빙하여 운영한 학습 모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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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이승만정권에 저항한 민주화운동에서 통일운동으로 확대된 변혁운동. 대구광역시 동구의 4.19혁명은 직접적으로 운동과 혁명을 촉발시켰다기 보다 허정과도내각과 장면정권 수립 이후에 사회개혁을 지향하는 민주운동과 민족모순을 해결하려는 통일운동에 참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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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사상운동 단체. 사합동맹은 1925년 경북지방청년대회를 통하여 대구와 경북 지역 사회주의운동 세력들이 경북 지역의 사회운동을 지도하기 위하여 결성한 사상운동 단체이다. 대구와 경북 지역의 사회운동과 조선공산당 창당의 기반을 마련하는 활동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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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중등학교 출신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학생운동 조직. 사회과학연구회는 1931년 6월 대구 교외의 공동묘지에서 대구고등보통학교, 계성학교, 교남학교, 휘문학교 등을 나온 학생들이 사회과학 연구를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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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당의 경북 조직. 4·19혁명 시기에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당 경북도당·대구시당은 혁신계 정당으로서 민주사회주의를 표방한 사회당의 정강·정책 실현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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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대중당의 경북 조직. 사회대중당경북도당(社會大衆黨慶北道黨)은 1960년 6월 15일 대구 구 국립극장에서 박기출·이동화와 대의원 825명 중 565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회대중당경북도당 결성 대회’를 개최하였다. 결성 대회에서 이동화는 사회대중당을 “민주사회주의의 당이며, 노동자·농민·인텔리·중소 상공업자 등 광범위한 근로대중의 권익을 위하여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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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9월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민주당 지부. 사회민주당 경북지부는 자주독립 지향, 완전한 독립과 민주주의국가 건설, 민족문화 앙양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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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활동한 의병부대. 산남의진은 중추원 의관 정환직(鄭煥直)[1843~1907]이 대한제국의 광무황제로부터 의병 봉기를 내용으로 한 밀지(密旨)를 받고 아들 정용기(鄭鏞基)[1862~1907]와 함께 경상북도 영천시를 중심으로 기병한 의병부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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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달성군에서 실시된 일제의 식민지 농업 정책. 제1차 세계 대전에 편승해 일본 자본주의가 급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도시에서 대규모 ‘쌀 소동’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 총독부는 일본의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였다. 산미 증식 계획은 지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추진하면서, 일본의 부족한 식량을 조선에서 충당해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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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에 일제가 추진한 식민지농업정책. 1910년대 식민농정으로서 토지조사사업이 실시되었다. 토지조사사업은 근대적인 토지소유권의 확립에 그 핵심이 있었다. 일제는 이에 기초해 농업·농민에 대한 계통적 지배체제를 수립해 나갔다. 곧 지주회의 조직, 면작조합, 잠업조합, 삼림조합의 설립이 그것이었고, 1920년대에는 모든 농업 단체를 통합해 원료가 되는 면화,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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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금속노조가 물가 폭등에 대비하여 만든 위원회 성격의 사회단체. 산업건설대책위원회(産業建設隊策委員會)는 대구의 금속노조가 물가 폭등과 식량 기근에 따른 대책을 마련하여 원활한 산업 생산을 추구할 목적으로 결성한 위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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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부터 4월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민족적 항일운동으로 일어난 만세독립운동.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강제 병합한 뒤 일제는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민족동화정책을 기조로 한 식민지배정책을 폭압적으로 실행하였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기 이전부터 헌병경찰제도를 도입하여 무단통치를 시행하였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은 농민의 토지 소유를 폭압적으로 소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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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상무상(尙戊祥)[1908~?]은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이 사회 과학 서클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 끝에 사상 강좌회를 비밀리에 개최하였다. 이 사상 강좌회의 강사는 신간회 대구 지회 회원들이었다. 1927년 12월 사상 강좌회 학생들과 함께 마르크스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비밀 결사 신우 동맹(新友同盟)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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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사회주의 사상 단체. 상미회(尙微會)는 1923년 12월 13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이상훈(李相薰), 최원택(崔元澤), 신철수(申哲洙), 이여성(李如星) 등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사상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결성한 사상 단체이자 운동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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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에서 조직된 항일비밀결사. 1914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뒤 반월산에서 지역 출신 정운해(鄭雲海)·최윤동(崔胤東)·최혁(崔赫)·엄주동(嚴柱東) 등의 청년들과 비밀리에 독립을 위한 새배달모듬(新倍達會)을 조직하였다. 새배달모듬 조직의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저항하고, 민족 사상을 고취하여 단결된 민족의 힘을 통하여 조국의 광복을 이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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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서기하(徐基夏)[?~?]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으며,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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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동성(徐東星)[1895~1941]은 1895년 12월 1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형설회(螢雪會)·흑우회(黑友會)에서 활동하였으며, 1923년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후도이샤[不逞社]를 결성하였다. 귀국 후에는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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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서병규(徐炳奎)[?~?]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였으며,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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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병룡(徐丙龍)[?~?]은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에서 태어나 20세까지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그 후 달성 학교에 2년간 수학하였다. 재산은 동산·부동산을 합해 시가 2,000원 정도였다. 1908년부터 대구 농공 은행(大邱農工銀行)의 행원으로 근무하면서, 1909년 달성 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때 서상일(徐相日)·윤상태(尹相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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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서병조(徐丙朝)[1886~1952]는 1886년 대구에서 서상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창씨명은 대봉병조(大峰丙朝)이다. 일제강점기 중추원 부의장을 지내고 지방 공로자로서 일제로부터 표창을 받는 등 일제의 식민통치에 적극 협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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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제인. 서병주(徐炳柱)[1885~1956]의 본관은 달성(達城)이며, 1885년 10월 6일에 태어났다. 1913년 대구부에 도로 용지를 기부하여 조선 총독부로부터 목배 1개를 받았다. 1921년 조선 총독부의 매일 신보사가 주최한 내지 관광단[일본 관광단]에 참가하였다. 1924년 조양 무진 주식회사, 1937년 경북 상공 주식회사(慶北商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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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동촌일대에서 세워진 해안수리조합 대표로 활동한 자본가. 서병주는 일제 강점기 관료로서 대구 지역의 대지주이자 지역 유력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며, 대구 동구에 해안수리조합을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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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에 달성군에서 활동한 친일 경제인. 서병화(徐炳和)[1883~?]의 본관은 달성(達城), 일본식 이름은 달원장종(達原莊種)이다. 1883년 9월 대구부 동성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한 제국탁지부 임시 재원 조사국 양지과 대구 출장소 기수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한 일 병합 직후인 1910년 조선 총독부 임시 토지 조사국 대구 출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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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보인(徐輔仁)[1895~1960]은 1895년 5월 6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에서 태어났다. 1930년 무렵 차경석(車京錫)이 교주로 있던 보천교(普天敎)에 입교하여 종교 활동을 펼쳤다. 1940년 2월 신인 동맹(神人同盟)이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독립운동 조직임을 알게 된 뒤 이에 가입하여 경상북도 문관(文官)에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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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서봉기(徐鳳綺)[1847~?]는 184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한협회 대구지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대구 지역에서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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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기업인이자 민족운동가. 서상돈(徐相敦)[1851~1913]은 대구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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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서상일(徐相日)[1886~1962]은 개항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몽운동, 비밀결사, 언론활동, 경제활동, 자치운동, 한국민주당 활동, 제헌국회 의원, 야당통합운동, 진보당과 사회대중당 및 혁신정당 활동 등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다양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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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소재의 조양회관 건축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정치가. 서상일은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에서 역동적인 삶의 궤적을 보여준 특징적인 인물이었다. 서상일의 삶의 궤적은 근현대 한국사회의 주객관적 조건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과정이었고, 한국 근현대사의 변동과 상호연관성을 맺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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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대구 출신 서상일이 추진한 정치운동. 서상일은 1954년 제3대 민의원 선거 이후 민주국민당을 대신할 새로운 정당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민주대동신당운동을 펼쳤다. ‘서상일의 민주대동신당운동론’의 핵심은 ‘민주·정의·반공산’에 있다. 서상일은 ‘민주·정의·반공산’ 기치 아래 민주대동의 범주를 비반동 민주 세력까지 포함하여 설정하였다. 즉, 자유당을 제외하고, 조봉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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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대구 출신 서상일이 제기한 한국의 정치 논리. 서상일은 자신의 정치노선이 민주사회주의임을 강조하였다. 민주사회주의는 1950년대 중반 한국 정치의 지향으로 일반화된 정치 논리였다. 하지만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논자마다 서로 달랐다. 서상일은 1914년 제2인터내셔널에 대하여 합법적 의회 투쟁에 기반하여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를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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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조(徐相祚)[1912~?]는 1912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비밀결사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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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체육인.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문곡(文谷). 달성군의 대지주 서돈순(徐暾淳)의 4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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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철(徐相喆)[1900~?]은 1900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재봉직공으로 일하던 1919년 3월 10일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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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상한(徐相漢)[1901~1967]은 1901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이던 1920년 영친왕 이은(李垠)의 혼례일에 폭탄 투척을 계획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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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부 관료. 서상환(徐相懽)[1888~1968]은 1888년 9월 24일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재건 달성친목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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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서오룡(徐五龍)[1911~?]은 1930년 12월 무렵 대구 상업 학교에 재학 중 사사키 다카시[佐佐木隆]·이동우(李東雨) 등과 함께 김동욱·권영달·김홍열 등을 만나 ‘프로 과학 연구소 조선 제1호 지국’이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구성원들은 일본 도쿄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과학 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프롤레타리아 과학』을 이용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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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서장환(徐章煥)[1890~1970]은 1890년 10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설화리에서 태어났다. 서성준(徐聖濬)이라는 이명(異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노수덕(盧修德)·손군보(孫君輔) 등과 함께 비밀 결사 상의회(商議會)를 조직하여 의병 유족 후원 활동을 폈다. 그 뒤 1917년 9월 노수덕을 중국 만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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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달성 출신의 학자.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양(景襄), 호는 임재(臨齋). 아버지는 서홍열(徐洪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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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서학이(徐學伊)[1900~1955]는 1900년 6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대황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흑파(黑波)라는 별칭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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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서흥균(徐興均)[?~?]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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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거주하며 장면정권 시기 이대악법 반대 투쟁을 전개한 학생운동가. 성낙과는 1960년 청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에 입학하여 4·19혁명을 경험하였다. 1961년 청구대학교 2학년 재학 중 통일운동과 「한미경제협정」 반대 운동을 전개하자 장면정권이 이를 누르기 위해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시행하였다.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이대악법으로 규정하고 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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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 관료. 소진무(蘇鎭武)[1896~1966]는 1896년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태어났다. 1912년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칠곡군청에서 근무하다가 1917년까지 달성군청에서 근무하였고, 1921년 현대서업(現代書業)이라는 상호로 사법서사를 개업하였다. 조선상공회의소는 1930년 5월 ‘조선상공회의소령’을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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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손기채(孫基採)[?~?]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적색노동조합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후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도위원회에서 활동하고 10월항쟁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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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송기찬(宋箕贊)[1899~?]은 1899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에서 태어났다.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며 식민지 시대 사회문제를 주로 취재하여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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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언론인. 송기찬(宋箕贊)은 일제 강점기에 경상북도 달성군 현풍면[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후반 20살이 되기 전에 중국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중국 만주에서 몇 년을 보낸 뒤에 귀국길에 올랐다. 1920년 2월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폭탄 습격을 기도한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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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예산(禮山). 호는 심연(心蓮). 송주석(宋柱錫)과 장수 황씨(長水黃氏)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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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부터 현대시기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출신 독립운동가. 송두환(宋斗煥)[1892~1969]은 예산송씨 송주석과 장수황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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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송명근(宋命根)[1921~?]은 1912년 1월 1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일제의 침략전쟁을 규탄하는 격문을 제작하여 군중에게 배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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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의 일본인 사회 내부에서 인두세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 쇄신파(刷新派)는 1905년 8월 대구 거류 일본인 사회 내부에서 대구일본거류민회에 맞서 인두세 폐지를 주장하기 위하여 만든 단체이다. 쇄신파는 대구 일본인 사회를 장악하기 위하여 1905년 8월 대구일본거류민회의 보궐선거에 오키다[冲田棄次郞], 마치타[町田久吾], 오카모토[岡本宇一], 카와이 아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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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었던 사상단체. 수양단은 1924년 12월 14일 대구에서 무산계급의 공존공영과 해방을 목적으로 조직된 사상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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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학교. 수창학교는 설립 취지서를 통하여 신학(新學)의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구학(舊學)의 중요성 또한 강조하였다. 수창학교는 신구학문을 융합하여 근대 교육을 실현하려 하였다. 구체적으로 인성과 덕육에 대해서는 전통 교육을 중시하는 교육목표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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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의 상인 자본가들이 설립한 상회사. 수창사(壽昌社)는 1898년 대구에서 설립되어 1935년 무렵까지 영업 활동을 펼쳤다. 수창사는 낙동강 뱃길을 이용하여 어염미두(漁鹽米豆) 무역을 펼치던 대구의 상인 자본가층이 결성한 근대 초기 형태의 상회사(商會社)로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사무소로도 기능하였다. 수창사의 사원이 되기 위한 조건은 1,000냥 이상의 투자금을 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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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28일 대구공회당에서 좌우 연합으로 열린 민족독립을 위하여 순국한 의사들의 추도식. 순절사추도회(殉節士追悼會)는 일제강점기 민족독립운동을 벌이다 희생당한 독립운동가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하여 1946년 첫 3·1절 기념 행사로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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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월 대한제국 순종황제가 대구, 부산, 마산을 방문하는 순행 중 대구를 방문한 사실. 대한제국 순종황제의 남순(南巡)은 1909년 1월 신년 하례식 자리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제안에 따라 이루어졌다. 황제의 순행은 민심 안정, 지방 순시를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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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친일 반민족행위자 박중양이 1946년부터 1954년까지 일기 형식으로 쓴 회고록. 『술회(述懷)』는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 관료 박중양(朴重陽)[1874~1959]이 1954년부터 1954년까지 일기 형식으로 쓴 회고록이다. 박중양은 경기도 양주 출신이며, 1906년 경북관찰사 서리 겸 대구군수로 임명되어 대구에서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박중양은 대구읍성(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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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에 대구에서 시행된 일종의 도시계획. 시구 개정 사업은 도시계획법의 제정·실시에 앞서 과거 일본에서 1870년대 초부터 1910년대 말까지 영국의 도시계획·도시재개발을 본떠 시가지의 불연화(不燃化)[건물을 지을 때 불에 잘 타지 않는 재료를 쓰는 것]와 서양풍(西洋風)을 꾀한 일종의 도시개발계획이다. 1910년대의 대구에서도 일본의 영향을 받아 ‘시구 개정 사업’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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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의 우현서루 내에 있던 학당. 시무학당은 우현서루(友弦書樓)를 기반으로 근대 지식 개발 증진과 시무의 지혜를 발견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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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미군정의 양곡 배급 정책의 실패에 맞서기 위해 대구광역시에서 시작된 사건이 대구광역시 동구를 비롯해 경상도,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경기도, 황해도 등 전국적으로 퍼져나간 사건. 10월항쟁은 1946년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이른바 8월 테제]에 따른 9월 총파업이 전개되는 가운데 1946년 10월 1일 대구시[지금 대구광역시]에서 촉발되었다. 대구의 항쟁은 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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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9월총파업 중 경찰 발포로 사망한 시민 시체 1구로 대구의과대학, 대구농과대학과 대구사범대학 학생들이 벌인 시위. 대구에서 9월총파업이 벌어지고 있던 1946년 10월 1일 오전 남선전기주식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고, 정오 무렵 여성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대구부청에서 식량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아데모(飢餓데모)가 발생하였다. 1946년 10월 1일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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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신민당이 추진한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 서명운동을 위한 현판식. 신민당과 민추협의 개헌현판식은 1986년 4월 5일 신민당과 민추협이 대구의 아세아극장에서 개헌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거행한 정치 행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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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에서 결성된 서울계의 사상단체. 1920년대부터 형성된 공산주의자들의 파벌은 크게 화요계[박헌영·이승엽·김찬·조봉암 등], 서울계[이영·정백·이정윤·최익환], ML계[마르크스·레닌계, 권태석·하필원·최창익], 콤그룹계[이관술·이현상·김삼룡·정태식] 등이 있었다. 1925년 2월 10일 대구노동공제회관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출범한 신사상회(新思想會)는 대구 지역에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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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경북대학교 학생들의 생활계몽반과 신생활계몽대가 추진한 생활 개선 운동. 신생활운동은 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경북대학교 사범대학과 문리대학 학생들이 자립경제를 확립하고 외제상품과 향략을 배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생활계몽반과 신생활계몽대를 만들어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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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은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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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신재모(辛宰摸)[1885~1958]는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대구노동친목회 등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5년에는 무정부주의 비밀결사인 진우연맹에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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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대구에서 경북교육협회 주최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신탁통치반대경북교육자대회는 1945년 12월 30일 대구에서 좌우익 연합의 조선신탁관리반대공동투쟁위원회가 결성된 이래 1946년 1월 2일 대구역 광장에서 대규모의 ‘신탁통치배격시민대회’가 열려 반탁운동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교육계 종사자들이 벌인 반탁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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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말 모스크바 삼상 회의의 한반도 신탁통치안에 대해 달성군에서 일어난 반대운동.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 회의는 미소 군정이 실시되고 있는 한반도의 장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국제 회의였다.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완전한 독립을 기대하던 국내 정치 세력은 즉각 신탁통치 반대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모스크바 삼상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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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중 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청년운동 단체. 1925년 1월 18일 대구부 덕산정[현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대중 해방을 목표로 결성된 아구청년동맹(俄求靑年同盟)은 ‘아구동맹회’라고도 한다. 아구청년동맹은 대구의 사회운동 단체와 더불어 대중을 옹호하는 사회운동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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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할동한 민족통일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안경근(安敬根)[1896~1978]은 1896년 6월 10일 황해도 신천군 평라면 청계리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정의부(正義府)를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이후 대구에서 자주적 남북통일을 전개하였다. 호는 석천(石泉)이고, 이관오(李冠五)·안사준(安士俊)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안중근(安重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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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민족통일운동가 안민생(安民生)[1911~?]은 1911년 황해도 신천군 평라면 청계리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한인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가 광복 후 대구에 거주하며 자주적 남북통일운동과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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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한국전쟁 시기 활동한 공산 비정규군. 안병화는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 지리산 남부군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1월 2,000여 명이 토벌되고 500명이 전사한 수도사단의 지리산 대성골 대토벌 때에 피신하여 대구광역시 동구 소재 팔공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4지구당에 들어왔다. 4지구당의 위원장은 남도부였다. 1953년 김일성의 지령인 하산 도심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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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통일운동가. 안잠(安潛)[1906~?]은 1906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리에서 태어났다. 1924년 대구 교남학교(嶠南學校)를 중퇴하고,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경북민족통일연맹을 통하여 평화통일운동을 벌였다. 남북학생회담을 지지하고 성원을 보내며 자주적 남북 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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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야당 성향이 강한 대구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 한국에서 대통령 선출을 위한 직접선거는 1952년에 이루어졌다. 그 뒤 1950년대에는 1956년, 1960년에 각각 선거가 있었다. 국회의원선거는 1948년, 1950년, 1954년, 1958년, 1960년에 치러졌다. 지방선거는 1954년, 1956년, 1960년에 시의원 선거, 1956년 1958년, 1960년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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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0월항쟁 이후부터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이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초기 좌익 유격부대[일명 빨치산]. 1946년 10월항쟁 이후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팔공산으로 입산한 좌익세력들이 형성한 유격부대[‘빨치산’, ‘공비’]로 ‘구빨치’라 부르기도 하며 빨치산의 시초로 알려져 있다. 10월항쟁에 참가하거나 연루된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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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에 대구의 경상감영 객사에서 열리던 약령시를 남성로로 이전하여 설치 운영한 일. 대구 약령시는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인 17세기 중반부터 조정의 영시[대구 약령시의 약칭] 개시 통첩을 통하여 운영되었다. 대구 약령시는 경상감영 객사에서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보통 각각 10일 정도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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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농민 운동가. 양도일(楊道一)[1876~1942]은 1876년 6월 3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1921년 10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소작농들이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와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가창면 농업 협동회를 결성하였다. 가창면 농업 협동회는 대동단결, 최후까지 악지주에게 대항할 것, 지세 공과금 등 일체 세금은 소작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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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구성된 6·25전쟁 전후 대구·경상북도 지역 양민 집단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국회 특별 조사반. 대구·경상북도 지역에서의 양민 집단학살 사건은 6·25전쟁 이전에는 우익 반공 단체인 호림부대에 의하여 달성1구 광산학살 사건이 자행되었다. 6·25전쟁 직후에는 달성1구와 가창 그리고 경산 코발트 광산에서 국가권력에 의하여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기결수와 미결수 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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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전후 전국적으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을 조사하기 위하여 구성된 국회 특별 조사반. 4·19 혁명 이후 국회에서는 6·25 전쟁 전후한 시기에 전국적으로 자행된 양민 학살을 조사하기 위하여 특별 조사반을 구성하였다. 이 특별반의 경북반은 주병환(朱秉煥)·윤용구(尹鎔球) 등 두 명의 국회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1960년 6월 2일부터 6월 6일까지 달성군 가창면과 경상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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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시기 대구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어용 교사와 교수를 축출하기 위하여 펼친 학원민주화운동. 어용교사 축출은 1960년대 2·28운동 이후 4·19혁명 시기에 대구의 중고등학생과 대학생이 펼친 학원민주화 운동의 한 방법으로 전개되었다. 어용교사 축출은 이승만 정권의 권력 유지를 위하여 활동한 교사와 교수를 축출하기 위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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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추진된 여자고등보통학교 설치 운동. 1920년대 중반 대구에 고등여자보통학교가 없는 교육 현실을 비판하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였다. 1924년 무렵 대구의 유지들이 총독부를 찾아 여자고등보통학교 설치를 진정하였다. 1924년 7월 총독부가 남선(南鮮)에 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설치할 계획이 알려지자 대구를 비롯하여 전주, 부산 등도 여자고등보통학교 설치를 위한 경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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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있던 기독교계 여성 교육기관 여자성경학원의 교육목표는 장래 교회의 여성 인도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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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대구광역시 역사. 대구는 지형적으로 영남의 중심부이며, 지리적으로 경상도 상변에서 뻗쳐 나온 소백산맥에 연이어 팔공연령이 병립하고 남쪽에는 구조곡이 나란히 발달한 가운데 산들이 겹겹이 펼쳐지면서 낙동강 중류에 합류하는 금호강과 금호강 지류인 신천이 퍼져 흐르는 분지에 속한다. 대구시 가로의 주요부는 대구분지 중앙에 자리 잡은 신천의 범람원으로 형성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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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달성 지역의 역사. 달성 지역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대구 월성동 유적(月城洞遺蹟)을 통해 후기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달성군의 역사는 대체로 대구의 역사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며, 대구에서 분리되었던 시기[1914~1995년]는 독립적으로 고찰해야 한다. 대구는 예로부터 달구벌(達句伐), 달구불[達句火], 달성(達城) 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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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1. 신석기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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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학생 독립운동가. 염필수(廉弼洙)[1914~?]는 1920년대 대구 계성 학교에 입학한 뒤 동맹 휴학에 연루되어 학교를 그만두고 1929년 4월 일본 교토도시샤 중학[同志社中學] 4학년에 편입학하였다. 1931년 6월 무렵 대구 지역 중등 학교가 참여한 사회 과학 연구회에 가담하였다. 사회 과학 연구회의 조직은 제1,2그룹을 두고, 제1그룹은 김석구(金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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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되었던 광복 직후 이재민 대상 사설 치안 단체. 영남보안대(嶺南保安隊)는 광복 직후 대구에서 이재민의 치안 원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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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있는 민간 신문사. 영남일보는 1945년 대구에서 민족지를 표방하며 설립된 민간 신문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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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9월 서울에 거주하는 대구 등 영남 인사들이 결성한 친목 단체.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는 1927년 9월 4일 서울의 국일관에서 서울에 거주하는 대구 출신을 비롯한 영남 인사들이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결성한 단체였다. 영남친목회는 신간회운동이 발흥하는 상황에서 결성되어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신간회는 1927년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대립을 막고 항일 투쟁에서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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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대구 지역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학생운동 단체. 영남대자율화추진위원회(嶺南大自律化推進委員會)는 영남대학교 학생들이 학원 민주화운동과 사회 민주화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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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대구광역시 동구에 설치되었던 제2야전군사령부 예하 군관구. 1954년 창설된 제2야전군사령부는 1980년대까지 군관구 체계를 유지하였는데, 제5군사령부를 대구광역시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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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시행된 제헌국회의원를 선출하는 선거. 5.10총선거는 1947년 11월 14일 유엔에서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비례에 따른 남북한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해방 후 한반도에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최고의 권위를 가진 절차는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른 미소공동위원회였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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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오학선(吳學善)[1925∼2010]은 1925년 7월 20일 대구광역시 달성군 옥포읍 강림리 599번지에서 태어났다. 1944년 6월 중국 상해(上海) 주둔 일본 해군 육전대(日本海軍陸戰隊) 사령부에서 근무하였다. 그때 광복군 지하 공작원 김만득(金萬得)과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이 사실이 탄로되어 일본군의 미행을 받게 되자 부대를 탈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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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 지역 청년들이 창립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 단체. 용진단(勇進團)은 대구 지역의 용맹한 신흥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단원 간 단결, 부조, 옹호, 친목 등을 목적으로 1925년 1월 발기회를 열었고, 사상 연구를 통한 민중의 교양기관을 지향하며 1월 5일 창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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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우동진(禹東進)[?~?]은 경상북도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1913년 음력 정월대보름 달성군 수성면 대명동 안일암에서 시회를 가장하여 결성된 재건 달성 친목회[조선 국권 회복단 중앙 총회]에 관계하였다. 달성군 월배면 상인동의 윤상태(尹相泰)와 우하교(禹夏敎)의 권유를 받고 달성 친목회에 가입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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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동대구역에서 벌어진 신다자간무역협상에 따른 농산물 수입 반대 운동. 개방만을 강제해오던 내외독점자본의 압력은 마침내 1989년의 「농어촌발전종합대책」이라는 이름의 전면적인 농업재편을 위한 새로운 정책으로 집약되고, 「제7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실행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1990년부터는 ‘우루과이라운드[신다자간무역협상]’ 협상을 내세워 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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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동맹휴교 투쟁이 펼쳐질 때 결성된 학생운동 비밀결사. 우리동맹은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현 경북중고등학교]에서 대구고보 폭압정책 반대동맹이 결성되어 대구고보 동맹휴교 투쟁’을 전개하는 가운데 여타 이유로 학생 신분에서 벗어난 학생 출신들이 결성한 비밀결사이다.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민족교육의 실시를 관철시켜 학생운동을 민족운동 차원으로 확장할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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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0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결성된 대구·경북지역의 문화 운동 단체. 우리문화연구회는 1984년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부정기간행물(무크지) 『일꾼의 땅』과 지역 문학동인지 『분단시대』를 발간한 주요 활동가들이 통합하여 결성된 단체이다. 우리문화연구회는 우리 문화의 지표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거짓말투성이인 왜곡된 문화를 거부합니다. 퇴폐적이고 소비 향략적인 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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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이견(利見), 호는 백산(白山). 역동(易東) 우탁(禹卓)의 21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우홍철(禹弘哲), 할아버지는 우병도(禹秉圖)이다. 아버지는 우방희(禹邦熙), 어머니는 진양 강씨 강치용(姜致龍)의 딸이다. 아버지는 우방희(禹邦熙)는 무과에 합격하여 사과(司果)를 지냈다. 우리견(禹利見)·우경옥(禹景玉)·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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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윤흠(允欽), 호는 노암(魯菴). 증조할아버지는 우이진(禹履鎭), 할아버지는 우해정(禹海鼎)이다. 아버지는 우권동(禹權東), 어머니는 조봉대부(朝奉大夫) 이석린(李錫麟)의 딸 인천 이씨(仁川李氏)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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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 신암선열공원에 안장된 일제강점기 무정부주의 운동가. 우해룡은 1906년 7월 16일 출생하여 1969년 3월 9일에 서거하였다. 1925년 3월 신사상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 혁조단(革造團)을 결성하였다. 같은 해인 1925년 7월 대구노동친목계를 대구노동친목회로 전환하는 창립총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 경찰 당국의 금지로 마무리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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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대구 원대동에서 단파방송 ‘미국의 소리’를 청취하고 결사대를 조직한 항일운동 사건. 원대동사건은 1944년 대구 원대동에서 미국 국무부 소속 국제협력국에서 운영한 단파 국제방송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 VOA]’를 몰래 듣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대[원대결사대(院垈決死隊)]를 조직한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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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있었던 연료 시장. 월견산 신탄시장(月見山新灘市場)은 일제강점기 대구에 장작과 숯 같은 땔감을 거래할 목적으로 개설되었던 연료 시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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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유상보(柳尙輔)[?~?]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참여하여 금연상채회(禁烟償債會)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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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9일 이후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회담이 체결되기 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에서 전개된 전쟁 양상.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의 체결까지 진행된 전쟁이었다. 북한군은 전쟁 개시 4일 만에 서울[서울특별시]을 점령하고, 계속 남진하였다. 그 사이 유엔에서는 6·25전쟁 참전을 결정하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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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자는 성민(聖玟) 또는 성천(聖天), 호는 향산(香山). 아명은 주경(周經)이다. 윤상우(尹相佑)라는 이름을 쓰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윤필은(尹弼殷)이며, 작은 아버지는 윤상은(尹相殷)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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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사회운동가. 윤식(尹埴)[1939~?]은 1939년 4월 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다. 서울대학교 재학 중에 신진회(新進會)에 입회하고 간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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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윤영섭(尹瑛燮)[?~?]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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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우열(尹又烈)[1904~1927]은 190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윤필오(尹弼五)의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에서 고려공산동맹과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고, 대구에서는 대구제4청년회·철성단·신사상회·경북사회운동자동맹 등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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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 윤장혁(尹章赫)[1905~1968]은 1905년 3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지보면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인 신우동맹(新友同盟)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광복 후에는 대구에서 일어난 10월항쟁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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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창기(尹昌基)[1888~1927]는1888년 2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동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대구에서 재건 달성친목회 및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 등에 가입하여 항일 비밀결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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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친일 관료. 윤필오(尹弼五)[1860~1924]는 개항기 경상북도관찰부 주사를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초반까지 영양군수·예안군수·비안군수를 역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자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대구교풍회(大邱矯風會) 회장을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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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윤학조(尹學祚)[1895~?]는 1895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진인동에서 태어났다. 경성 중앙학림(中央學林)에 다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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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언론가이자 사회활동가. 윤홍렬(尹洪烈)[1893~1947]은 1893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활발한 시회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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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체제기 일제가 대구 지역의 징용 노동자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실시한 강제 동원 정책. 응징사는 1943년 7월 일본 후생성(厚生省)에서 개정한 국민징용령(國民徵用令)에 의하여 동원된 노무자를 말한다. ‘징용에 응한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대구 지역에서는 1943년 8월 10일 ‘응징사 복무 규율’이 공포 시행된 이래 1944년부터 본격적으로 징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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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달성군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병. 한말의 의병(義兵)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아 한국의 주권을 지키기 위하여 봉기한 민병(民兵)이었다. 민병이라고 해도 관군을 지원하는 등의 단순한 민병이나 관군의 위치를 초월한 민족의 군대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관군과 함께 또는 관군의 보조적 위치에서 작전을 수행한 조선 시대의 의병과 다른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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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이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 의열단은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였다.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 일제의 식민지 통치 기관 및 그 관련 기관의 시설에 대한 폭파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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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효목동 망우공원 내 기념비가 있는 이경희가 1923년 일제의 주요인물과 식민지 지배기구를 폭파하기 위해 벌인 사건. 의열단이 러시아 공산당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아 일제의 주요 인물의 암살과 건물 파괴를 단행하는 방법으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과정에서 일명 ‘황옥 사건’이 발생하였다. 제2차 암살파괴계획이라고도 한다. 황옥사건에 관련된 이경희[1880~1949]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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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갑성(李甲成)[1886~1981]은 1886년 10월 23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세브란스연합병원에서 근무 중이던 1919년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을 주도하였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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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경석(李璟錫)[1912~?]은 1912년 6월 9일 경북 영덕군 남정면 장사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 결성에 참여하고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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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05년 대구 사립 협성학교 교사를 시작으로 만주와 국내에서 조선노동공제회, 신간회 운동 등 비타협적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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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한국전쟁 시기 조직된 조선노동당 제4지구당 부위원장 출신 공산 유격대원. 이구형은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반제동맹에 가입한 이래 조선건국동맹 달성군위원회를 조직하였다. 해방 후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를 통한 노동운동을 벌이다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노동당을 가입했다. 이구형은 한국전쟁 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소재 팔공산에서 조직된 조선노동당 제4지구당 부위원장 출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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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이오전쟁 이후 한국정부가 대구광역시 동구에 후방지역 방위를 목적으로 설치했던 2작전사령부. 제2작전사령부는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지역 즉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방위하는 임무를 갖고 있다. 흔히들 2군사령부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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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기양(李起陽)[?~?]의 호는 나봉(那峯)이다. 1920년대 이종암(李鍾岩)[양건호] 사건이 발생할 즈음 이종암의 알선으로 의열 단원(義烈團員) 배중세(裵重世)를 자신의 별장에 숨겨 주었다. 그 뒤 배중세는 의열단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 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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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기윤(李起胤)[1898~1938]은 1898년 9월 9일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차산리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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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30일 대구 지역 노동단체들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하여 결성한 단체. 이대악법반대경북노동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경북노동단체공투위’]는 1961년 3월 30일 대구의 노동신문사에서 결성되어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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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대구 지역 정당 및 사회단체들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하여 결성한 단체.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경북정당사회단체공투위’]는 1961년 3월 대구에서 혁신계 정당 및 사회단체, 교원노동조합 등 11개 단체의 참여로 결성되어 이대악법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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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대구 지역 학생들이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하여 결성한 단체. 대구 지역 학생들은 1961년 3월 장면 정권이 통일운동과 정치운동 등을 억압할 목적으로 법제화를 시도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을 악법으로 규정하고 반대 운동을 벌이기 위하여 이대악법반대경북학생공동투쟁위원회[이하 ‘경북학생공투위’]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구역 광장과 수성천 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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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2일 대구에서 개최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 반대 집회 및 시위. 1961년 장면 정부의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 시도에 대응하여 대구의 정당·사회단체, 노동단체, 학생들이 이대악법반대경북정당사회단체노동단체학생단체공동투쟁위원회[이하 이대악법반대경북공투위]를 결성하고, 악법 제정 반대를 위하여 4월 2일 저녁 대구역 광장에서 이대악법반대대구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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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부터 4월까지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하기 위하여 대구에서 전개한 사회운동. 대구의 이대악법반대운동(二大惡法反對運動)은 1961년 3월과 4월에 걸쳐 혁신계 정당·사회운동 단체·노동운동 단체·학생들이 전개한 「데모규제법」과 「반공특별법」 제정을 반대한 운동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전개되었다. 일명 ‘대구데모사건’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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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덕주(李德柱)[1906~?]는 1906년 2월 1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농업에 종사하던 중 항일 비밀결사 우리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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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덕주(李德周)[1897~1970]는 1897년 5월 2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 거주하며 농업에 종사하던 1919년 3월 10일 대구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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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우(李東雨)[1909~?]는 1909년 지금의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용산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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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교육운동가. 이목(李穆)[1922~2015]은 1922년 지금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산운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대구 지역에서 교원노동조합대구시위원회 사무국장을 지내며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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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이병두(李柄斗)[?~?]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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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친일반민족행위자. 이병학(李柄學)[1862~1942]은 1862년 10월 17일에 태어났다. 대구에서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대구교풍회(大邱矯風會)·자제단(自制團)에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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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보식(李普植)[1900~?]은 1900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에서 태어났다.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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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근영(李根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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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봉재(李鳳在)[1907~]는 1907년 6월 9일 지금의 경상남도 양산시 남부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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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삼문(李三文)[1909~?]은 1909년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본관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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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상길(李相吉)[1911~?]은 1911년 1월 2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시장북로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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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자본가. 이상악(李相岳)[1886~1941]은 1886년 9월 20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의 여러 기업에 자본을 투자하고 경제인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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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상조(李相朝)[1904~?]는 1904년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성산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와 대구연초전매지국 적색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인철(李仁喆)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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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이상화(李相和)[1901~1943]는 1901년 5월 22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8일 대구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대구지회와 ㄱ당에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등의 작품을 발표한 대표적인 민족시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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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이상훈(李相薰)[1894~?]은 188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 활동을 시작으로 정오회·대구노동공제회·조선노농총동맹·조선공산당·조선건국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에는 조선공산당 경북도위원회·대구공동위원회 등 좌익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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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경제인. 이석진(李錫鎭)[1870~1932]은 한말·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했던 경제인이다.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가 쓴 『대구이야기(大邱物語)』에 의하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이석진은 ‘풍채가 당당하고 성격이 온후하며 독실한 군자형’이었다고 한다. 카와이 아사오는 일찍이 대구에 들어와 『조선민보(朝鮮民報)』를 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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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 이선장(李善長)[1903~1985]는 1903년 10월 12일 지금이 경상북도 경산시 진량읍에서 태어났다. 신간회 대구지회에 가입하고 조선일보사 기자로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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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성근(李成根)[1901~?]은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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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순상(李舜相)[1886~?]은 1886년 마산부 표정[현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중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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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경제인이자 정치인. 이순희(李淳熙)[1908~1972]는 1945년 1월 14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1930년 일본 도시샤고등상업학교[同志社高等商業學校]를 중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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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 거주하는 4·19혁명시기 통일민주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회운동가. 이승춘은 1961년 3월 대구광역시에서 통일민주청년동맹 경상북도연맹의 결성에 참여하고 조직부장이 되었다. 장면정권이 시민, 학생들의 한미경제협정반대운동과 통일운동에 맞서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공포 시행하자 시민, 학생들은 이를 이대악법이라 규정하고 이대악법반대투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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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자본가. 이영면(李永勉)[1878~1931]은 1878년 2월 27일 태어났다. 대구에서 경제인으로 활동하였고, 대구빈민구제회 설립 등의 사회활동에도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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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영호(李齡鎬)[1893~1964]는 1893년 7월 14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10일 대구 동문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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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 이용노(李龍魯)[1899~?]는 1899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참여하고 중국 베이징 한국독립군정보원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경북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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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전의(全義). 아버지는 이근영(李根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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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이우백[1902~?]은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였고, 이후 대구시보사 사장을 역임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호는 백산(栢山)이고, 부인은 이경분(李敬分)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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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에서 활동한 정치인·기업인. 이원만(李源萬)[1904~1994]은 1904년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에서 아버지 이석정(李錫政)과 어머니 이사봉(李泗峰) 사이에서 다섯째로 태어났다. 호는 오운(五雲), 본관은 여주이며, 이언적의 15대손이다. 영일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사립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원만은 흥해공립보통학교[현 흥해초등학교] 5학년에 편입하고 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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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이원식(李元式)[1913~1978]은 1913년 2월 15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한의사, 의사, 서지학자, 문화평론가 겸 저술가, 수학자, 에스페란토어 학자 등 다양한 경력의 소유자이다. 이원식은 1922년 4월 1일 영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 1925년 대구 수창공립보통학교[현 대구수창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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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월봉(李月峰)[1908~?]은 1908년 8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매천면 신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 결성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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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이인(李仁)[1896~1979]은 1896년 9월 20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사일동에서 태어났다. 변호사로 활동하며 독립운동가에 대한 무료 변호 및 민족 소송의 변론을 맡았고, 전시체제기에 조선어학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법무부 장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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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인팔(李仁八)[1911~?]은 1911년 5월 16일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도양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일우동맹(一友同盟)과 서광회(曙光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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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계몽운동가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자본가. 이일우(李一雨)[1870~1936]는 1870년 10월 27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 설립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강점기에 자제단 설립에 참여하는 등 친일 행보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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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야산대 활동을 한 사회운동가. 이일재는 한국 현대 노동운동가이자 사회운동가로서 대구 지역을 기반으로 민족해방운동과 노동운동에 평생을 헌신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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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장우(李章雨)[1871~1944]는 1871년 9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하서동에서 태어났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 이후 대구에서 경제인으로 활동하며 친일반민족행위를 이어 갔다. 창씨명은 이와무라 쇼우[岩村章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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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이자 종교인. 이재복(李在福)[1906-1949]은 1906년 12월 8일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노동자협의회와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고, 광복 후 사회주의 계열 정치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재철(李在哲)·이일도(李一道)·이재룡(李在龍)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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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재우(李載雨)[1912~?]는 1912년 7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학생대표자회(學生代表者會) 결성에 참여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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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통일 운동가. 이정상(李正相)[1911~?]은 1911년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상대리에서 태어났다. 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사회대중당과 경북민족통일연맹을 통하여 정당 활동과 자주적 남북통일, 이대악법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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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계몽운동가이자 경제인. 이종면(李宗勉)[1870~1932]은 대구에서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고, 주식회사 대동사(大東社)를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호는 오정(悟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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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주호(李柱鎬)[1921-?]는 1921년 지금의 포항시 남구 대이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다혁당(茶革黨)에서 활동하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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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할동한 독립운동가. 이치용(李致瑢)[1894~1950]은 1894년 4월 4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성동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와 경주에서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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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 명곡리에서 태어난 이현수(李賢壽)[1896~?]는 1917년 9월 무렵 독립을 위해 국외로 망명하였다. 중국의 상해, 광동(廣東), 홍콩 등지로 다니다가 1919년 3월 모친이 사망하자 귀국하였다. 모친상을 치르고 임시 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다시 중국 상해로 건너갔다. 그는 상해 임시 정부의 재무부 서기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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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이현주(李玄澍)[?~?]는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고,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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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이현준(李賢俊)[1902~?]은 중국 유학중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황옥폭탄사건에 연루되었다. 한영근(韓英根)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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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사회운동가. 이효철(李孝哲)[1937~?]은 1937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종로1가에서 태어났다. 대구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재학 중 경북피학살자유족회에 참여하고 청년학생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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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광문사의 자치 조직으로 결성된 계몽운동 단체. 대구광문사가 주도하여 결성한 인민대의소(人民代議所)는 민지개발(民智開發)과 민권을 부식(扶植)하기 위한 추진 기관이었다. 또한 대구광문사가 지향하는 바와 동일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자치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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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12월 8일 김종철(金鍾喆)이 일본 경찰 가이[甲斐]를 살해하고 탈출한 사건. 일제 강점기 국외에서는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무장 항일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를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운동가의 확보가 매우 중요한 사안이었다. 그에 따라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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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 설립된 일본인들의 경제 단체. 일본인상업회의소(日本人商業會議所)는 대구에 거주하는 일본의 상공인들이 상공업 발전과 친목 도모를 위하여 1906년 설립한 경제 이익단체였다. 일본인상업회의소는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때까지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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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적우동맹을 계승하여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 일우당(一友黨)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라는 신우동맹의 강령을 계승하여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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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어 1945년 8월 15일까지 식민 지배에 있었던 시기. 일제는 강제 병합 후 총독부를 설치하고, ‘충량한 신민의 양성’이라는 동화정책의 기조 위에서 민족 차별 정책을 펼쳤다. 일제는 ‘조선의 일본화’라는 동화주의 원칙을 세워 우리 민족의 저항을 최소화하고 제국주의 수탈을 극대화하고자 하였다. 동화주의는 조선 통치의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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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의 주요 농업 생산물. 일제강점기 달성군의 주요 농업 생산물은 보리·쌀·콩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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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에서 수리 사업을 목적으로 설립 운영된 조합. 수리조합(水利組合)은 1906년에 제정된 수리조합 조례에 따라 관개 배수 시설의 신설 및 보수와 관리를 목적으로 설치된 조합이다. 수리조합의 설치는 1920년대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한 일제가 그 원활한 성공을 위해 가장 역점을 둔 사업이었고, 달성군에서는 수성 수리조합(壽城水利組合)·동부 수리조합(東部水利組合)·해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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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대구에서 전개된 대중운동. 일제강점기 대중운동이란 대중 자신들의 평범하고도 민주적인 일상생활의 이익을 지키고, 민족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한 투쟁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의 대중운동은 청년, 노동자와 농민, 여성, 형평 등의 부문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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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달성군에서 전개된 농민 운동. 달성군은 1914년 조선 총독부의 지방 제도 개편 때 전통적인 대구에서 분리되어 대구부를 둘러싼 드넓은 농촌이었다. 따라서 달성군의 주요 산업은 자연스레 농업이었다. 일제는 1910년대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근대적 토지 소유를 확립하고, 식민지 지주제를 성립시켰으며, 이에 기초해 농업·농민에 대한 계통적 지배 체제를 수립해 나갔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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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언론인. 송기찬(宋箕贊)[1899?~?]은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송정덕(宋貞德)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학력도 그다지 높지 않았다. 스스로 밝혔듯이 초등학교도 4년밖에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국외 독립운동, 언론·사회 운동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기자로 활동한 송기찬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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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하였던 시기 달성군의 역사. 1910년(순종 4) 일제의 강제 병합으로 통감부가 총독부로 바뀌었다. 조선 총독부는 총무·내무·탁지·농상공의 행정 부처와 사법부를 두고, 지방은 도(道)·부(府)·군(郡)·면(面)의 행정 체계를 갖추었으며,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총리대신을 거쳐 천황에 상주할 수 있는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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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임병하(任炳夏)[?~?]는 대한광복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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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경상감영 객사 철거에 반대하기 위하여 결성된 조직. 자위대(自衛隊)는 1908년 말 경상북도 관찰부가 대구공소원[기관]을 건축하기 위하여 경상감영 객사를 철거하겠다고 하고, 대구일본거류민단 또한 객사를 철거하려 하자 이에 반대하며 경상감영 객사를 지킬 목적으로 1909년 1월 대구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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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2·28운동 이후 관제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율적인 학생회를 건립하려는 학원민주화운동. 1960년 2·28운동을 계기로 학생들이 1950년대 반공 통치의 기반으로 운영되던 관제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자율적인 학생회를 세우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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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경제인. 장길상(張吉相)[1874~1936]은 1874년 장승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제강점기 경일은행의 은행장이자 대주주로 활동하였고 교남교육회 창립 및 신간회 등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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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사회운동가. 장병천(張炳天)[1903~1923]은 1903년 대구에서 장길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본에서 유학하던 중 사회주의를 접하고 사상단체인 신인동맹회를 결성하였다. 소설 『강명화실기』에 등장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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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봉수(張奉守)[1901~1927]는 1901년 8월 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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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장상철(張相轍)[1870~1930]은 1870년 10월 17일 대구부 덕산정 131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덕산동]에서 태어났다. 금연상채회와 대한협회 대구지회에서 활동하였으나 이후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의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적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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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용암(張龍岩)[1895~?]은 1895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15일 만세 시위를 전개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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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원수(張元壽)[1905~1974]는 1905년 5월 28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북구 칠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농림학교 재학 중 신우동맹(新友同盟)·적우동맹(赤友同盟)·일우동맹(一友同盟) 등 항일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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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대구경찰서 이치가와 순사의 조선인 상해 사건을 보도한 장인환이 일제 관헌에게 탄압받은 사건. 장인환 필화사건은 대구경찰서 이치가와[市川] 순사의 민간인에 대한 상해 사건이 발단되었다. 그 과정을 보면 대구경찰서 소속의 이치가와 순사가 1931년 6월 10일 오전 1시 무렵 대구 서성정 1정목[현재 서성로1가]에서 청각장애자 최봉조(崔鳳祚)를 보고 행동이 수상하다며 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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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장종환(張鍾煥)[1909~?]은 1909년 10월 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야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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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기 대구 출신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장직상(張稷相)[1883~1959]은 1883년 장승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인동이다. 일제강점기 대구를 대표하는 자본가이며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자 친일 단체 시중회(時中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 활동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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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장진홍(張鎭弘)[1895~1930]은 1895년 6월 6일 경상북도 칠곡군 인동면 문림리[현 구미시 옥계동]에서 태어났다. 중국과 러시아 등지에서 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26년 국내로 들어와 대구의 대표적인 식민지배기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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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장해동(張海東)[1901~1927]은 1901년 8월 4일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송라면 조사리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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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장홍상(張弘相)[1902-?]은 1902년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신우동맹(新友同盟) 결성을 주도하였고, 조선공산당 경상북도 책임자로 활동하며 1927년 신간회 대구지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장적우(張赤宇)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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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1월 15일[음] 대구 안일암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 달성친목회는 1909년 정운일·최병규·이근우 등이 친목을 도모하고 실업 및 교육의 발전을 목적으로 결성한 계몽운동 단체였다. 달성친목회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 일제의 탄압으로 활동을 펼칠 수 없었다. 이후 달성친목회 회원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1913년 1 월 15일[음] 대구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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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에 대구에서 결성된 재만 귀향 동포 원호 단체. 재만귀향동포전재자동맹(在滿歸鄕同胞戰災者同盟)은 1945년 11월 대구공회당(大邱公會堂)에서 만주로부터 귀향한 전재(戰災) 동포들이 결성한 원호 단체이다. 본부를 대구에 두고 전국을 범위로 활동하였다. 재만귀향동포전재자동맹의 조직과 임원은 고문에 조동근(趙東根)·김석범(金碩範), 회장에 곽인수(郭仁守), 부회장에 윤봉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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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사회과학연구회와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 경상북도 조직이 연대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적색노동조합건설대구협의회(赤色勞動組合建設大邱協議會)는 대구 지역 노동자의 공산주의화를 목적으로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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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혁우동맹을 계승하여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 적우동맹(赤友同盟)은 ‘마르크스주의적 혁명 전술의 함양’과 ‘피압박민족의 해방운동’이라는 신우동맹의 강령을 계승하여 식민지 노예교육을 반대하고 사회과학을 연구하여 독립운동에 매진하려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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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대구에서 결성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의 경북 지부. 전국농민조합경북도연맹은 광복 후 대구에서 농민의 이익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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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7월 16일 대구의 조양회관에서 결성된 우익 학생운동 단체. 전국학생총연맹 경상북도연맹은 1947년 7월 16일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조양회관에서 우익 학생운동의 전국 조직인 전국학생총연맹의 결성에 영향을 받아, 대구의 학원건설회와 맹휴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해체하고 결성된 학생 단체이다. 전국학생총연맹 경상북도연맹의 주축은 대구의대[경북대학교 의과대학 전신]와 대구농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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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8월 대구에서 대구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을 전망하며 결성된 비밀결사. 전위조직준비위원회는 1931년 8월 초순 대구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로서 대구지역 사회주의운동의 지도기관을 목적으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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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광순(鄭光淳)[1880~1961]은 1880년 7월 9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의료계에 종사하며 신정교회 장로로 있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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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관료. 본관은 영일(延日). 일본식 이름은 오천교원(烏川僑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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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소수는 1911년 3월 5일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덕고면 장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구화회(丘火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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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교육운동가이자 정치인. 정운기(鄭雲騎)[?~?]는 일제강점기 교남학원(嶠南學院) 설립에 참여하고 교장을 맡아 교육운동을 전개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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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경제인. 정운용(鄭雲用)[1904~1963]은 190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에서 아버지 정응원(鄭應源)[1885~1933]과 어머니 김인아(金仁俄) 사이 맏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정재학(鄭在學)[1858~1940]이다. 일제강점기 대구의 자본가로서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경상합동은행의 대표이사 겸 회장을 역임하였다. 소화식산주식회사, 대구약조양조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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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운일(鄭雲馹)[1884~1956]은 1884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장관동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아버지는 정시원(鄭時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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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운해(鄭雲海)[1893~1945]는 1893년 9월 1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서성로2가에서 정만원(鄭萬源)의 이들로 태어났다. 중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하였고, 대구에서 사회주의 계열 단체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경진(李景珍)·이봉화(李奉華)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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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정원조(鄭元祚)[1898~1942]는 1898년 3월 2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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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종교인. 정재순(鄭在淳)[1877~1948]은 1877년 5월 2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서 태어났다. 신정교회 목사로 봉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행보를 보였다. 아들 정원조(鄭元祚)도 서문시장 만세 시위 때 체포되어 대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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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경제인이자 일제강점기 친일 금융인. 정재학(鄭在學)[1858~1940]은 1858년 6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개항기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민족자본 형성에 기여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의 친일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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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재건 달성친목회 밀고인. 정진영(鄭震泳)은 1873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1908년 대구로 이주하여 지금의 중구 남성로에서 약종상을 경영하던 중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였다. 1919년 중순 대구경찰서 형사 박준영(朴埈永)에게 재건 달성친목회를 밀고하였다. 정진영은 법정에서 자신이 밀고한 계기에 대하여 “많은 부호와 그 밖의 양민이 그들의 동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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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여성운동가. 정칠성(丁七星)[1897~1958]은 1897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근우회(槿友會)·신간회(新幹會) 등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을 전개하였다. 광복 후에는 사회주의운동을 펼치다가 월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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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정학진(鄭學鎭)[1912~1968]은 1912년 7월 25일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시 서성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 비밀결사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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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친일 자본가. 정해붕(鄭海鵬)[1871~1950]은 1871년 11월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관료를 지냈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제인으로 활동하여 자제단 결성에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내는 등 친일반민족 행보를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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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정해진(鄭海鎭)[?~?]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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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대구의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가 참가한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 회장단 회의. 대구의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 총학생회 대표는 1980년 5월 16일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전국 55개 대학의 총학생회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회장단 회의에 참석하였다. 제1회 전국대학총학생회회장단 회의는 1980년 5월 14일 전국 27개 총학생회 회장단이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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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30일에 대구에서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 제2대 국회의원선거는 제헌 국회의원 2년의 임기가 종료되는 1950년 5월 10일에 치러질 예정이었으나 국내 사정과 준비 관계로 5월 30일에 실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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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김창숙(金昌淑)을 중심으로 일어난 독립운동 자금 마련 운동. 1925년 중국 북경(北京)에서 김창숙이 이회영(李會榮)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에 관해 논의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이들은 즉각적인 독립 전쟁은 어려우니 장기적인 독립 전쟁 전략을 구상키로 하였다.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는 열하(熱河)나, 찰합이(察哈爾) 등의 황무지를 구입,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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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상해 임시 정부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서 시작된 이용로, 이봉로 형제의 독립운동은 제2차 유림단 사건으로 확대되었고, 해방 후 친일 반민족 행위를 청산하기 위한 반민 특위 활동을 거쳐 경북 피학살자 유족회 활동으로 이어져 한국 근현대사의 맥을 이루었다. 이용로(李龍魯)[1897~?]의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달성군 하빈면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중 도쿄[東京]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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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경상북도가 일왕의 생일을 기하여 20일간 실행한 물산공진회. 경상북도는 1913년 제1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한 이래 5년이 지난 1918년에 제2회 물산공진회를 개최하였다. 1917년 10월부터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하여 1918년 3월 제2회 경상북도물산공진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하여 관민 합동의 대구협찬회(大邱協贊會)를 조직하고 준비에 착수하였다. 경상북도는 제1회 물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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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시기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활동한 조선노동당 지역조직. 제4지구당의 주요 사업은 대구시내에 지구당의 거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은 대구고등보통학교[지금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4지구당 최고위원회 지도자인 이구형이 직접 맡아 진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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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5월 10일 경상북도 달성군에서 치러진 초대 국회 의원 선거. 1947년 11월 14일 유엔은 인구 비례에 따른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래 1948년 1월 유엔 한국 위원회가 남한에 들어왔고, 2월 26일 유엔 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유엔은 1948년 5월 10일에 치러질 국회 의원 선거를 앞두고 3월부터 준비에 착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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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정치가. 조경규(趙瓊奎)[1904~1983]는 1904년 1월 6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조성희(趙性嬉)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화산(華山),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삼촌이다. 1920년 대구의숙을 다니다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배재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1931년 무렵 일본 교토제대 의학부 연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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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대구에서 결성된 기독교계 종교 단체. 조선건국경북기독교협회는 조선 건국의 대업을 위하여 총력을 결합하고, 치안유지와 국민 생활 향상을 도모하며 기독교 정신에 합치되는 민주주의 정부 수립에 협력할 것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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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건국동맹의 경북 조직.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는 1944년 여운형(呂運亨)·안재홍(安在鴻) 등 조선의 민족운동 세력이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건국을 준비하기 위하여 결성한 조선건국동맹의 경북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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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대구 달성 지역에서 조선건국동맹의 달성군위원회로 조직된 비밀 결사. 1944년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여 건국을 준비하기 위해 조선건국동맹이 비밀 결사로 결성되었다. 대구 달성 지역에서는 이구형(李求炯) 등을 중심으로 조선건국동맹의 지방 조직인 달성군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조선건국동맹의 목적과 건국 강령을 수용하여 일제 타도를 위한 동지 규합과 건국 준비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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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6일 대구에서 건국 준비를 위하여 결성된 정치단체.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朝鮮建國準備委員會 慶北支部)는 1945년 8월 16일 대구에서 건국 준비를 위하여 결성된 정치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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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광복 직후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달성군 지역 위원회.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조직된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지부로서 1944년 8월에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 건국 동맹 달성군위원회를 모체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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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 기관이자 조선공산당의 지역 조직. 조선공산당경북도기관(朝鮮共産黨慶北道機關)은 1927년 8월 대구에서 결성된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 기관이자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지역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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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경상북도 조직. 조선공산당경북도위원회(朝鮮共産黨慶北道委員會)는 1945년 8월 대구에서 결성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의 경상북도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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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 직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의 지역 조직. 조선공산당대구시위원회(朝鮮共産黨大邱市委員會)는 광복 직후에 대구 지역에서 결성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지역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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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4월 대구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하여 조직된 비밀결사.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가 결성되는 역사적 배경에는 ‘조선공산당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불식하고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이 조선공산당의 전위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1928년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와 1930년 프로핀테른의 9월 테제가 작용하고 있었다.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는 대구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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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노동운동 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의 지회.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朝鮮勞動共濟會 大邱支會)는 1920년 5월 27일 대구 은사관에서 지회 발기대회를 열고, 서만달(徐萬達)·박기돈(朴基敦)·정운해(鄭雲海) 등을 창립 준비위원으로 선정하였다. 조선노동공제회 대구지회의 발기대회는 5월 28일에 열렸던 조선노동공제회 평양지회의 발회식보다 하루 빠른 전국 최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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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부터 6·25전쟁 기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 위치한 북한 유일 집권 정당의 경북조직 1949년 6월 24일 남조선노동당이 북조선노동당에 흡수되었고, 1949년 6월 30일 조선노동당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선노동당의 중앙위원회 위원장에는 김일성, 부위원장에는 박헌영이 선출되었다. 조선노동당은 북한의 유일 집권정당이며,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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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대구 지방 평의회. 조선노동조합대구평의회(全國勞動組合大邱評議會)는 1945년 12월 10일 노동조합대구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경북 일원을 대상으로 결성되었다. 노동조합대구협의회는 1945년 10월 24일 대구를 대상으로 조직된 노동운동 단체였다. 노동조합대구협의회는 1945년 11월 5일, 6일 이틀간 서울에서 열린 ‘조선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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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7일 대구 지역에서 발족한 우익 중심의 정치단체. 조선독립경북촉진회는 1945년 11월 7일 대구향교에서 여섯 개 정당 대표들이 모여 결성한 우익 중심의 정치단체이다. 1945년 10월 17일에 미군정이 건국준비 경북치안유지회를 해산시키면서부터 결성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이때 우익은 1945년 10월 30일에 국민통일회로 집결되었다가 이튿날 11월 1일에 다시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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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를 비롯한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 조선독립후원의용단(朝鮮獨立後援義勇團)은 독립운동 자금과 독립운동 활동가를 모집하여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지원할 목적으로 1920년 9월 비밀리에 조직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하기관이었던 서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 서로군정서는 독립군 간부 양성, 식민 통치기관 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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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2월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민립대학기성회의 대구 조직.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일제의 조선 통치 정책이 문화통치로 바뀌었다. 그러나 문화통치라는 것은 일제가 자신들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을 은폐하고 미화하려는 위장 수단일 뿐, 실질적으로는 탄압과 감시, 민족문화 말살, 경제적 수탈 강화를 위한 고도화된 식민 통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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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민족혁명당의 경북 지부. 조선민족혁명당은 1935년 7월 조선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의 좌익정당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1945년 10월 10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한 뒤 1945년 12월 김규식과 김원봉 등이 중앙 대표단 명의로 환국하고 중앙당도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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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본인 가도민랑이 설립한 사회사업 단체. 조선부식농원(朝鮮扶植農園)은 농업을 통해 조선 농민의 자활과 독립을 꾀한다는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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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1월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에 사회사업을 목적으로 설립된 농원. 1910년 11월 30일 대구광역시 동구 검사동[당시 달성군 해안면 검사동]에 일본 오사카[大阪] 범애부식회(汎愛扶植會)의 창설자인 가지마[加島敏郞]가 주도하여 조선부식농원을 설립한 이래 1914년 6월 10일에 조선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 설립 허가를 받았다. 조선부식농원은 이사 1명, 평의원 10명,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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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2월 30일 대구 지역에서 90개 사회단체의 연합으로 결성된 신탁통치반대운동 단체.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안이 신탁통치안으로 알려지게 되면서 대구 지역에서 우익의 조선독립경북촉진회와 좌익의 경상북도인민위원회는 각각 긴급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모색하였다. 두 단체는 12월 29일 신탁 관리 반대 성명서를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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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24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인민당의 지역 지부. 조선인민당 대구지부는 1945년 12월부터 조선인민당의 진정한 민주주의국가 건설, 전 민족의 완전한 해방, 진보적 민족문화 건설 등의 정치노선에 따라 건국 활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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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 대구에서 일제의 전쟁 동원 정책에 부응하기 위하여 결성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은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던 시점인 1941년 전쟁에 협력하기 위하여 임전대책협의회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를 통합하여 조직한 친일 단체였다.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은 최린이었고 부단장은 고원훈, 고문은 박중양·윤치호·이진호·한상룡이었다. 조선임전보국단의 주요 사업은 국민 개조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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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전시 동원 체제 강화를 위하여 대구·경상북도 지역에 결성한 종교계 전쟁 협력 단체. 조선총독부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2월 종교계를 총망라하여 전쟁 협력 단체를 결성하였다. 종교와 종파를 막론하고 강력한 교화 활동을 펼쳐 전쟁에 매진하기 위함이 목적이었다. 1944년 12월 8일 각 종교 단체가 연합하여 조선전시종교보국회가 결성되었다. 조선전시종교보국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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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대구 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치안유지 및 계몽 단체. 조선학도대 대구본부(朝鮮學徒隊大邱本部)는 1945년 해방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건국 활동에 맞추어 학원 중심의 치안유지와 계몽 활동을 펼치기 위하여 조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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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백정들이 신분 해방을 위하여 결성한 형평운동 단체. 조선형평사 경북지사(朝鮮衡平社 慶北支社)는 백정들의 자유와 평등, 신분 해방, 사회적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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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대구 지역에서 결성된 우익 세력의 신탁 관리 반대 운동 조직. 조선신탁반대국민총동원경북위원회는 대구 지역의 우익 세력이 1946년 1월 20일에 열린 조선신탁관리반대공동투쟁위원회를 탈퇴하고, 1월 2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결성한 신탁 관리 반대 운동 조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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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문화운동의 중심 기관을 표방하며 설립된 사회운동단체. 조양동우회는 ‘생계(生計) 확립을 위하여 적극 투쟁함’, ‘생권(生權) 확보를 위하여 일치단결함’, ‘생영(生榮) 발양을 위하여 문화를 창조함’ 등의 강령 실행을 목적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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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은석(趙銀石)[1906~1956]은 1906년 6월 20일 경상북도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에서 태어났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대구 고등 보통 학교 학생들이 사회 과학 서클을 결성하기 위한 움직임 끝에 신간회 대구 지회 회원으로 구성된 강사들의 지도로 사상 강좌회를 비밀리에 개최하였다. 1927년 12월 사상 강좌회 학생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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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활동한 법조인이자 정치인. 본관은 창녕(昌寧). 호(號)는 일운(逸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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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조형길(趙亨吉)[1920~1945]은 1920년 평안남도 순천군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무우원(無憂園)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조소영(趙宵影)으로도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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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 일본 종연방직주식회사가 설립을 추진한 방직공장. 1930년대 일제가 대륙병참기지화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대자본이 조선에 활발하게 진출하였고, 일본 미쓰이(三井) 그룹의 계열사인 종연방직주식회사는 섬유 도시 대구에 종방 대구공장(鍾紡大邱工場)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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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대구광역시 동구 동대구역에서 전개된 주한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반대운동. 1990년대 후반 민간차원의 남북교류가 추진되고 있을 때, 남북교류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서는 「국가보안법」의 개정 또는 폐지가 요구되었다. 또 남북교류는 남북당사자가 주체가 되는 방식인데 이를 위해서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제고가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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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의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의 기관지. 『지국뉴스』는 1930년 12월에 대구상업학교 내에서 결성된 프로과학연구소 조선 제1지국의 기관지가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발행되었다. 주요 내용은 일제의 정책에 반대하고, 비밀결사의 의지를 다지는 것으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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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우쑹[撫松縣]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인 흥업단의 군자금 모집 사건. 흥업단은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즈음 중국 푸쑹[撫松]에서 조직된 지린성 군정서 부속 기관이었다. 흥업사에 전라남도 장성 출신의 이만준(李萬俊)이 가입하여 회계 서기로 활동하였다. 그는 1919년 3월 이후 5월 말까지 경상북도 달성군 무태 출신 이시영(李始榮), 전라북도 익산 출신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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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1992년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신천동에서 대구광역시 및 경상북도 지역 민주화를 위해 창립된 학술운동 단체. 지방사회연구회는 대구지역 인문사회과학자들이 학술과 친목을 겸하는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이 모임에 참여한 교수 및 연구자들은 지역 사회 및 민족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세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첫째, 지역사회와 국가사회에 놓여 있는 여러 사회적, 민족적 모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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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대구에서 결성된 진보당의 경북 조직. 진보당 경북도당은 진보당 중앙당의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아래 민주책임정치, 대중본위의 균형있는 경제 체제 확립, 평화통일 등 강령·정책을 견지하면서 대구와 경북 지역에서 정치 활동을 벌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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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친일 경제인. 진희규(秦喜葵)[1878~1959]는 한 일 병합 이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경상북도 참사(參事)로 복무하였다. 그 사이 1915년 10월 일본 적십자사 특별 사원으로 활동하였다. 1915년 10월 대구부에 자신의 토지를 도로 부지로 기부하여 목배 1개를 받았다. 1918년 대구 은행에 자본을 투자하고 감사역이 되었다.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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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인천(仁川). 호(號) 석우(石友). 아버지는 채성원(蔡星源), 어머니는 서남주(徐南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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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출신의 교육운동가, 언론인, 민족운동가. 채충식은 1892년 음력 11월 15일,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에서 아버지 채성원(蔡星源)과 어머니 서남주(徐南珠)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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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대구의 5개 천주교회 청년 연합으로 결성된 청년회. 천주교청년회(天主敎靑年會)는 1946년 5월 10일 대구 5개 천주교회의 청년 회원들로 결성되었다. 조직과 주요 간부를 보면, 총재 주교, 고문 최정복, 회장 이효상, 부회장 최재복, 총무부장 김점, 재무부장 정태호, 전교부장 김인석, 체육부장 최계복, 연락부장 정행록, 문교부장 김달호, 음악부장 김상환, 학생부장 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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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대구역 노동자를 규합하여 설립을 추진한 노동조합. 철도인부조합은 대구역 구내 노동자의 친목과 단결을 도모하고 권익을 향상할 목적으로 설립이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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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서 설립된 사회주의 사상단체. 철성단은 대구제4청년회의 우의 단체로서 대구를 비롯하여 전국 차원에서 사회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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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에서 일어났던 청년들의 사회 운동. 일제 강점기 민족 운동에서 청년 운동은 민족 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념의 수용과 전파의 주체로서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1920년대 초반의 청년 운동은 근대 문명의 수용과 전파를 통해 청년층의 자각을 일깨우면서 문화 운동을 펼쳤다. 1920년대 중반의 청년 운동은 사회주의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청년층의 계급적 인식을 부각시키며 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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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에서 전개된 청년운동. 청년운동은 일제강점기 대중운동의 전위로 간주하며 전국적 대중으로 발전한 계층 운동이다. 일제강점기 대중운동에서 청년운동은 민족독립을 위한 새로운 이념의 수용과 전파의 주체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였다. 3.1운동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청년운동 단체들은 근대문명의 수용과 전파를 위한 문화운동 기관임을 자임하였다. 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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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교육자이자 종교인. 최경학(崔敬學)[1890~1976]은 1880년 8월 15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신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학교(啓聖學校) 교사로 재직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후 일제에 협력하여 친일 행보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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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최대림(崔大林)[?~?]은 대구광학회(大邱廣學會)·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대한협회(大韓協會) 대구지회에서 활동하며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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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운동가. 최문식(崔文植)[1905~?]은 1905년에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대구노동자협의회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건국동맹 경북지부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서 활동하고 10월항쟁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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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병규(崔丙圭)[1881~1931]는 1881년 2월 2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최명숙(崔明淑)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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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소복(崔小福)[1911~?]은 1911년 7월 4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봉산동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서울로 유학하여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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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출신의 민족운동가. 최시교(崔時敎)는 1908년 대구 금연상채회(禁煙償債會)에 가입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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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사회주의운동가. 최원택(崔元澤)[1895~1973]은 1895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구청년회 활동을 시작으로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 및 조선노농총동맹 조사부 담당 상무집행위원 등을 지냈다. 이후 중국 만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 남조선노동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석초(石樵)·서상필(徐相弼)·김성덕(金聲德)이라는 이름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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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최윤동(崔允東)은 1897년 7월 3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최명조(崔明祚)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중국과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광복 후에는 정치인으로 활동하였다.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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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달성군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 최일(崔一)은 1960년 5월 사회 대중당에 입당하여 경북도당 선전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사회 대중당은 4·19 혁명 직후에 구 진보당계, 민주 혁신당계, 민족 자주 연맹, 민주 사회당계 등의 혁신 계열이 결집하여 만든 정당이었다. 1960년 6월 사회 대중당 공천으로 제3대 경상북도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였다. 1961년 3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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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최종륜(崔鍾崙)[?~?]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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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최준명(崔俊明)[?~?]은 대구 출신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일명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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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사회주의운동가. 최춘택(崔春澤)[1905~?]은 1905년 5월 1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수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1월 남선 개발과 사회를 공고하게 만들기 위한 문화 운동의 실행 기관을 목표로 결성된 대구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대구청년회는 1920년 5월 문사극(文士劇)를 개최하고 다수의 기부금을 조성하였다. 이후 최춘택은 1924년 5월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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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에서 활동한 민족운동가. 추교정(秋敎廷)[?~?]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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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사회운동가. 추병환(秋秉桓)[?~?]은 1925년 10월 25일 경상북도 군위청년회의 혁신 총회에 참석하고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9월 10일 영남친목회(嶺南親睦會)를 반대하는 영남친목회 반대자 명의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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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으로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 일제는 조선을 강점한 후 민족 동화를 조선 통치의 최고 방침으로 설정하고, 민족 동화의 완성을 위하여 조선인 협력자, 곧 친일파를 양성하였다. 친일파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자발적 친일파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일제의 친일파 양성 정책과 자발적 친일파의 특성은 시기마다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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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이후 전시체제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을 포함한 대구광역시 인근 경상북도 7개 군이 함께 만든 군사후원상납 조직. 칠군연맹[공식명칭 7군군사후원연맹]은 일제가 중일전쟁을 계기로 동원체제를 강화하는 전시체제를 확립해 나가는 가운데 후방에서 전쟁후원 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조직하였다. 1937년 7월 관변단체들이 조선군사후원연맹을 결성한 이래 관주도로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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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월 2일 대구 지역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집회. 1945년 12월 열린 모스크바삼상회에서는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안 등을 포함한 모스크바협정이 체결되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삼상회의 신탁통치안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되면서 1945년 12월 31일 서울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집회가 열렸고 이후로 전국 곳곳에서 집회가 열렸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대구광역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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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 대구에서 서상일이 설립한 잡화 상회. 태궁상점은 근대적 이윤 추구를 위하여 설립된 잡화 상회이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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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3월 대구에서 결성된 진보적 청년단체. 통일민주청년동맹결성준비위원회 경북연맹은 1961년 3월 12일 대구에서 결성되었다. 통일민주청년동맹 경북연맹의 위원장은 사회대중당 출신의 경북 도의원이자 통일사회당 경북도당 준비위원회 구성원인 최일(崔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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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26일에 대구역 광장에서 통일사회당경북도당준비위원회가 개최한 강연회. 1961년 2월 1일에 통일사회당경북도당 결성준비대회가 개최될 예정이었다. 여기에 사회대중당 출신의 대구대학 교수 양호민과 청구대학[현 영남대학교] 교수 홍형의를 비롯하여 사대당 출신 경북도의원 유성환과 최일 두 사람도 함께하였다. 통일사회당은 스스로 정당의 성격을 ‘민주적 사회주의의 실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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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10월 14일부터 28일까지 대구 지역에서 개최된 공진회. 경상북도는 1923년부터 5년마다 대구부에서 경상도·전라도·충청도 등이 참여하는 ‘남선(南鮮) 6도(六道) 연합(聯合) 물산공진회(物産共進會)‘를 개최하려고 하였지만 경기 불황으로 말미암아 계획을 취소하게 되었다. 그 대신에 전국 공립 상품진열소의 상품 진열 대회를 대구부에서 개최하기로 하면서 특산품진열대회가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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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유림단의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낸 독립 청원 운동. 3·1 운동의 전국적 확산과 1919년 2월 친일 세력과 경성의 일부 친일 유림이 야합하여 합방 절대 지지 한일 불리 청원서(合邦絶對支持韓日不離請願書)를 일왕에게 보내려던 음모가 폭로되면서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달성군에서도 파리 만국 평화 회의에 제출한 독립 청원 운동이 독자적으로 진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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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기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공산 비정규군[유격대 활동, 빨치산]. 빨치산은 유격대원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파르티잔(partisan)에서 온 것으로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은 좌익의 무장 유격 부대 활동의 주요 근거지였다. 6.25전쟁 이전에는 초기적 형태의 좌익 무장 유격대인 야산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의 창당 직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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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후반부터1950년대 중반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 전개된 좌익 무장 유격대 활동과 진압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에서는 6·25전쟁 이전에 초기적 형태의 좌익 무장 유격대인 야산대 활동이 전개되었다. 1949년 6월 조선노동당의 창당 직후인 동년 7월 남한 내 유격대를 지도하기 위해 조선인민유격대의 제3병단이 활동하였다. 6·25전쟁 시기에는 조선노동당 경북도당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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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편동현(片東鉉)[1886-?]은 1886년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반곡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재건 달성친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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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지역에 있던 일본인 제사 회사. 편창제사주식회사는 일본 제사가인 가타쿠라 가네다로[片倉兼太郞]가 식민지 조선에 진출하여 제사공업(製絲工業)을 운영할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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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대구에서 대학 풍물 동아리 출신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문화운동 단체. 풍물굿패 마당은 1995년 대구 지역 대학 풍물 동아리 출신들이 연합하여 결성한 문화운동 단체로 민주화운동과 연관된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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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하윤실(河允實)[?-?]은 대구에서 태어나 지금의 중구 수창동에서 거주하였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8일 서문시장 만세 시위에 참여하여 3·1운동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으로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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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하은수(河銀水)[1903~?]는 1903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철성단(鐵聲團)에 가입하여 단원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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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 대구에서 사회주의 학생운동 연합을 위하여 결성된 비밀결사. 학생대표자회(學生代表者會)는 대구 지역 학생의 공산주의화를 도모할 목적으로 1931년 7월 결성된 비밀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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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대구에서 우익계 중등학교 학생들이 반공과 반탁을 위하여 결성한 학생 단체. 학원건설회는 대구의 기독교계 중등학교 학생들이 좌익의 청년학생 단체에 맞서 반공과 반탁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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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6월 26일 대구에서 결성된 한국독립당 지부. 한국독립당의 정치노선의 지평을 확대하고,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에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결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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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11월 22일 대구에서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경상북도 지부. 한국민주당 경북지부(韓國民主黨慶北支部)는 대구와 경상북도 지역의 우익 정치세력을 결집할 목적으로 결성된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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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결성된 한국민주당의 지부. 한국민주당 대구지부(韓國民主黨 大邱支部)는 대구 지역의 우익 정치세력을 결집할 목적으로 결성된 정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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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대구에서 창립한 문학운동 단체. 한국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韓國作家會議大邱慶北支會)는 1987년 지역문화의 활성화와 민족문학의 창달을 기치로 내걸고 활동한 대구·경북민족문학회를 계승하여 문학인의 권익과 자긍심을 수호하고 문학의 저변 확대와 현실주의 문학의 거점 역할을 하기 위하여 2014년 3월 29일 새롭게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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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사회운동가. 한규석(韓圭錫)[1888-1936]은 1888년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구 대명동에서 태어났다. 1920년 대구청년회 가입을 시작으로 청년운동·노동운동·교육운동·언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호는 백허(白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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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이후 대구에서 학생과 정당사회단체가 한미경제협정에 반대하며 벌인 운동. 1961년 2월 8일 한국의 장면 정부와 미국 정부 사이에 한미경제협정이 체결된 이후 대구의 학생과 정당·사회단체들은 한미경제협정을 굴욕, 주권 침해, 민족 수치로 규정하고 한미경제협정 반대 및 국회 비준을 저지할 목적으로 단체를 결성하여 나가면서 한미경협 반대운동(韓美經協反對運動)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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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한순(韓錞)[1911~?]은 1911년 9월 2일 지금의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거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항일 비밀결사 사회과학연구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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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언론인. 한응렬(韓應烈)[?~1949]은 평양에서 태어나 대구로 이주하였다. 1933년 10월 26일 서북 출신들이 조직한 서우구락부(西友俱樂部)에 참가하고 서기로 활동하였다. 1933년 『남선경제신문(南鮮經濟新聞)』 기자로 활동하며 조선인 기자들의 친목을 위하여 조직된 칠조회(七鳥會)에 참여하였다. 1935년에는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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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출신의 정치가인 서상일이 1931년 3월에 완성한 조선 사회운동에 대한 방법론과 전망을 담은 책.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은 일제강점기 대구 출신 정치가인 서상일(徐相日)[1887~1962]이 1931년 3월에 조선 사회운동에 대한 방법론과 전망에 대하여 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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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대구에 군정 실시를 위하여 미군이 주둔한 사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이 승리하고 패망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하여 1945년 9월 8일에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여 총독부 대표로부터 공식 항복을 받고, 9월 9일에 38선 이남에 군정을 실시한다는 미군 사령부의 명령 제1호를 발표하였다. 그 후 미군은 대구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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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해안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해안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5년 지세 반환 운동과 지세 불납 운동을 벌이고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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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월 4일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면에서 결성된 농민운동 단체. 1921년 달성군 가창면[지금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의 농업협동회 결성을 계기로 1923년 3월 대구노동공제회의 농민대회를 거치면서 달성군내 각 면 즉 해안면을 비롯한 가창면, 성서면, 옥포면, 화원면, 논공면, 월배면 등 7개 면에서 소작인조합을 결성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25년 1월 4일 해안면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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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에서 결성된 해안면 소작인조합이 전개한 농민운동. 대구광역시 동구의 옛 지역인 달성군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해안면[지금 대구광역시 동구 해안동 일대]의 경우 해안면 일대 넓은 농토로 인해 달성군 관내에서 현풍과 같이 일본인이 가장 집중된 곳이었다. 또한 조선인 지주 경영이 가장 활발한 곳이기도 했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시행한 토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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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에 있었던 행려병자를 위한 시설. 대구부는 1914년 4월 행려병자(行旅病者)[나그네로 떠돌아다니다가 병을 얻은 자]를 수용할 시설로 행려병인 구호사(行旅病人救護舍)를 설치하였다. 치료가 필요하나 주소가 불명확하여 가족의 소재를 알 수 없는 환자들을 위하여 건립된 구호 시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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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윤우열이 조직한 무력 투쟁 독립운동 단체. 윤우열(尹又烈)[1904~1927]은 대구교풍회 회장, 대구자제단 발기인, 국민협회 대구지부 지부장 등 친일 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한 윤필오의 아들이다. 윤우열은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 속성과를 다닌 유학파였다. 유학 후 서울계의 사회주의 진영에 가담하여 활동한 윤우열은 서울과 대구에서 청년운동을 중심으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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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허선일(許善一)[1896년~?]은 동화사(桐華寺) 부속 지방학림의 학승으로 있던 1919년 3월 30일 대구 남문 밖 시장에서 열린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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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 시기 대구에서 전개된 혁신당과 사회대중당과의 통합 기구. 혁신당·사회대중당통합준비위원회 경북위원회는 혁신당과 사회대중당 당의 통합 교섭을 추진할 목적으로 만든 기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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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2월 대구의 중등학교 학생들이 신우동맹을 계승하여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 혁우동맹(革友同盟)은 6·10만세운동 이후 1926년 9월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결성한 사회과학연구회와 사회과학연구회가 1927년 2월부터 진행한 사상강좌회를 거쳐 1927년 결성한 학생운동 비밀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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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된 사상단체. 혁조단은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결성되었으며, 사상 연구와 사회운동을 전개한 사상단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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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대구의 역사. 대구는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자주적 근대 국민국가 수립의 과제를 실현하여 나갔다. 어느 독립운동가의 집에서는 광복을 ‘세계 제일의 기쁨’으로 간주하며 즐거워하였다. 일제가 패망하자마자 좌우 연합으로 치안을 유지하며 완전한 독립을 준비하여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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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광복부터 2018년 현재까지 대구광역시 동구 일대의 역사와 문화. 1945년 8월 15일 광복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다. 개항 이후 근대의 역사적 과제였던 완전한 독립, 곧 자주적 국민국가의 수립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었다. 새로운 국가 건설 과정과 육이오전쟁 시기에 동구는 격정의 한가운데 서 있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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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현영만(玄泳晩)[1921~1981]은 1921년 5월 2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교내 비밀결사 조직인 무우원(無憂園)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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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독립운동가. 현정건(玄鼎健)[1887~1932]은 1887년 6월 2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현경운(玄炅運)이고,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이 동생이다. 부인은 윤덕경(尹德卿)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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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대구 달성 지역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소년 운동 단체. 1925년에 현풍소년회가 창립된 것으로 보이며, 1925년 소년 웅변대회를 개최하는 등 소년의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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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현풍 지역의 청년 운동 단체. 1930년 5월 현풍 청년회가 현풍 청년 동맹으로 조직체를 변경하여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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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8월 달성군 현풍면[현 현풍읍]에서 결성된 청년 운동 단체. 현풍청년회는 풍기 개량과 노동 야학 운영 등을 중심으로 실력 양성론에 입각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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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경상북도 현풍군에서 설립되어 활동한 국채 보상 운동 단체. 1907년 1월 대구의 대동 광문회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발기된 이래 당시 경상북도 현풍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도 국채 보상 운동을 위해 단연보상회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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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중등학교. 협성학교는 대구에서 관계와 지역사회가 연대하여 개교한 근대 중등학교이다. 협성학교의 교육목표는 1906년 3월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내린 “오늘날의 급선무는 오직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하는 길만이 밭을 일구고 재물을 불리는 도구가 될 것이다”라는 교육 진흥 조칙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 1907년 『황성신문』은 협성학교의 설립 취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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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 개항기 신분이 해체되는 가운데 1894년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은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철폐하려 했고, 이것이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신분제의 법적 철폐로 이어졌다. 그러나 사회 관습으로는 여전히 신분 차별이 지속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백정의 자제에 대해 학교 입학을 제한한다든가 해서 기회의 균등은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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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달성군 가창면에서 양민 학살을 자행한 육군 본부 정보국 산하 대북 침투 특수 부대. 호림 부대는 1949년 2월 25일 육군 본부 정보국 산하에 대북 침투 특수 부대로 창설되어 달성군 가창면에서 양민 수십 명을 학살한 것으로 1960년 국회 특별 조사반의 조사에서 규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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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운동가. 홍주일(洪宙一)[1875~1927]은 1875년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에서 태어났다. 항일 비밀결사 재건 달성친목회 결성에 참여하였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하여 대구권총사건에 가담하였다. 호는 해동(海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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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달성군 화원면에서 결성된 소작인 농민 운동 단체. 화원소작조합은 1923년 내지 1924년에 결성되어 1924년 추수 태업 투쟁과 1925년 낙작인회 투쟁을 통해 농민 운동을 전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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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황보선(皇甫善)[1908~1982]은 1908년 12월 24일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구전리에서 태어났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고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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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지역 전염병 환자의 치료를 위하여 설립되었던 전문 병원. 대한 제국 때 조선인 전염병 환자는 동인 병원에 수용하고, 일본인 전염병 환자는 대구민단 설립의 전염병 전용 병사에 수용하였다. 그러다 1914년 대구부제 실시와 함께 대구부 남산동에 전염병사를 설립한 이래, 부비(府費)로 유지하여 왔으나 건물이 작고 좁아, 1921년에 부비 5만 원의 예산으로 신축 공사에 들어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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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1월 대구의 효성여학교에서 발생한 학교 분규. 효성여학교는 1923년 11월 19일 대구사립효성여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1924년 1월 14일 개교식을 거행하였다. 효성여학교는 1910년 사립 해성학교(海星學校) 여자부로서 교육을 시작하였다가 해성학교에서 독립하여 여성을 대상으로 개교한 천주교 계통의 학교였다. 효성여학교는 개교 당시 교장은 안세화(安世華)이며,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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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서상태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흥맹회(興氓會)는 일제의 민족 차별에 저항 의식을 품고 있던 서상태가 1943년 일본에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할 것으로 예상하고 조선의 독립을 준비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여 조직한 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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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대구 지역에 있던 근대 학교. 흥화학교는 1899년 12월에 흥화학교 지교로 설립되었다. 흥화학교 지교는 1909년 9월 6일 흥화학교로 개칭하였으며, 1910년 10월까지는 유지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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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대구에서 교육 민주화운동을 전개한 교사들의 교육운동 단체. YMCA중등교육자협의회대구지역회는 1981년 12월 대구에서 기독교 정신과 교육자적 신념에서 출발한 학습 소모임에서 대구·경상북도 지역의 교육 민주화운동을 펼치기 위한 교육운동 단체로 전환하며 대구·경상북도 교육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