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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소설가 이무영이 1950년에 『한성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이무영(李無影)[1908~1960]은 1925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세이조중학교에 다니다가 일본작가 가토 다케오[加藤武雄] 문하에서 문학수업을 하였다. 1932년 장편소설 『지축을 돌리는 사람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고, 이어 「B녀의 소묘」·「창백한 얼굴」·「오후 영시(零時)」 등의 단편과 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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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4년에 간행된 조선 전기의 문신인 채수의 시문집. 본관이 인천인 채수(蔡壽)[1449~1515]의 호는 나재(懶齋)이다. 이석형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삼장에서 연이어 장원한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데, 『세조실록(世祖實錄)』·『예종실록(睿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냈다. 산경(山經)·지지(地誌)·시문(詩文)에 능했다. 『나재집(懶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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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경영호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태어났다. 1956년 지방자치단체 읍·면장 선거에서 제5대 감곡면장으로 당선되어 향토 발전과 주민 복리에 기여한 뒤 1961년 퇴임하였다. 1962년부터 천주교 신자로서 충청북도 충주시 야현동 성당에서 전교로 5년간 활동하였다. 1966년부터 18년간 천주교 청주교구유지재단의 재산 관리를 담당하였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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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알지를 시조로 하고 김원익·김진중·김세필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김해김씨 계와 더불어 김씨의 2대 주류를 이루는 대보공(大甫公) 알지계(閼智系) 가운데서도 그 대종을 이루는 경주김씨(慶州金氏)는 파계(派系)가 복잡하지만, 대략 4~5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파로는 은열공파(殷說公派)·태사공파(太師公派)·판도판서공파(判圖判書公派)·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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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을 시조로 하고 최명철과 최상우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최치원(崔致遠)을 시조로 하며 26개 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중에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와 사성공예파(司成公汭派) 후손이 가장 많다. 중시조 최제안의 17세손 최명철이 경기도 양평에 살다가 남인(南人)으로 지목받자 음성군 대소면 삼정리에 옮겨왔다가 세거하였다. 16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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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공무원. 경태현은 본관이 청주(淸州)이며,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왕장리에서 출생하여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매괴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제대학(國際大學) 법학과 1년을 수료하였다. 경태현은 1957년 육군중위로 예편한 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근무를 시작으로 총무·재무계장을 역임하고, 1967년 음성군 개발계장을 거처 양정(糧政)·세정(稅政)·경리(經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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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고덕수의 묘비. 고덕수는 자는 군명(軍明), 호는 퇴암(退庵),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중랑장 고천연(高天連)의 손자이다. 1432년(세종 14)에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과 연풍현감을 지냈다. 1456년(세조 2)에 취금헌(翠琴軒) 박팽년과 재종매부(再從妹夫)라는 이유로 화를 입어 관(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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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황을 시조로 하고 박경진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고령박씨(高靈朴氏)에는 어사공(御使公) 박섬(朴暹), 부창공(副倉公) 박환(朴還), 주부공(主簿公) 박연(朴連)을 중시조로 하는 3파가 있다. 박섬을 중시조로 하는 사인공파(舍人公派)의 대표적 인물로는 박은(朴誾)·박장원(朴長遠)·박문수(朴文秀) 등이 있고, 박환을 중시조로 하는 부창정공파의 대표적 인물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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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고재봉은 1908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청주이다. 음성공립보통학교, 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원남면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원남면장으로 부임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였다. 6·25전쟁 이전에 사회적 혼란기를 맞아 보도연맹에 가입하려는 주민들을 적극 계도하였으며 농촌 경제 활성화를 위한 담배 경작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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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령을 시조로 하고 연우근과 연석우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 세거 성씨. 관향시조는 7세손 연수창(延壽菖)이며 본은 곡산(谷山) 하나뿐이다. 시조의 8세손 연경은 고려 충숙왕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태사(太師)를 역임하였다. 연최적은 송시열(宋時烈)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역임하였으나 당쟁으로 벼슬에서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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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광을 시조로 하고 김덕항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광산김씨(光山金氏)는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한다. 고려조에서 여러 명의 평장사(平章事)를 배출하였고, 조선조에서 왕비 1명, 재상 5명, 대제학(大提學) 7명, 청백리 4명, 공신 7명, 문과 급제자 265명을 배출했다. 김덕항(金德恒)은 임진왜란 때에 처가인 음성읍 초천리 의령남씨 집에 피난왔었는데 한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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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충을 시조로 하고 반석권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반씨(潘氏)는 기성(岐城)·광주(光州)·남평(南平)의 3본이 있지만 모두 같은 분파이다. 기성은 거제도(巨濟島)의 옛 지명으로 기성반씨를 거제반씨라고도 한다. 광주반씨의 시조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광주백(光州伯)에 봉해진 반충(潘忠)이다. 그의 현손인 이조판서 반석평(潘碩枰)은 청렴한 문신으로 이름났으며,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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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 구덕자의 처 조씨는 출가한 지 2년 만에 남편이 죽었다. 남편이 죽은 후에도 시어머니를 평생 봉양하니 음성향교(陰城鄕校)에서 표창하였다. 사림에서 효열비(孝烈碑)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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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안동. 할아버지는 권돈(權墩), 아버지는 함흥도호부사 권급(權伋)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우고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후배 양성에 힘썼다. 27세로 일찍 죽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 묘소가 있다. 좌승지겸경연참찬관(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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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서 태어나 자랐다. 1771년(영조 4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5월에 제주에 선전관으로 갔다 온 후 그 공으로 6품으로 승진되었다. 명천현감·위원군수를 거쳐 여산부사를 지냈다. 여산부사 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곳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웠다. 충청북도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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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창보(昌甫). 권연의 아버지는 권점(權點)이다. 권연은 1764년에 출생하였다. 성리학(性理學)을 전공하면서 향약의 범례(範例)와 장정(章程)을 모아 엮은 『향약장정(鄕約章程)』을 충실히 실천하였고 향토 문화의 발전과 후학을 양성에 평생을 보냈다. 이러한 치적을 인정받아 사후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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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命汝). 아버지는 만오(晩悟) 권종석(權鍾奭)이다. 1868년(고종 5)에 출생하였다. 1885년(고종 22) 무과에 급제하여, 1890년 선전관, 1891년 훈련원주부, 1892년 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899년 31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사창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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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시(性施), 호(號)는 농은(農隱), 증조부는 권종석(權鍾奭), 아버지는 권영목(權寧穆)이며, 어머니는 수원백씨(水原白氏)이다. 13세에 정덕영(鄭德永)의 딸과 결혼하여 3남 1녀를 두었다. 증조부 권종석의 유훈을 받아 남다르게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한 일이 없었다. 모친 수원백씨의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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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백도(伯道), 호는 국우재(鞠又齋). 할아버지는 권징(權徵), 아버지는 현령 권경(權憬)이다. 1616년(광해군 8)에 출생하였다. 수직(壽職)으로 수의좌위부사위(修義佐衛副司尉)를 받았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김운곡(金雲谷)·정포옹(鄭抱翁)과 교유가 두터웠다. 1655년 향년 4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본대리 대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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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인지(仁之). 아버지는 대사헌 권휴(權休)이다. 권인은 1650년에 출생하였으며, 용양위어모장군(龍驤衛禦侮將軍)을 역임하고 호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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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고조부는 경흥도호부사 권급(權伋)이다. 1824년(순조 24)에 출생하였다. 1850년(철종 1) 무과에 급제하여, 1853년 선전관, 1861년(철종 12) 호조좌랑, 1879년(고종 16) 언양현감, 1883년 응천(凝川)[경상남도 밀양(密陽)의 옛 이름] 군수를 역임하였다. 1885년(고종 22) 통정대부가 되었고, 1889년(고종 26)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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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안동. 자는 성흥(聖興). 권휴(權休)의 아들이다. 권점은 선조의 유훈에 따라 도학(道學)에만 전념하였다. 향년 93세로 죽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오위도총부부총관(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五衛都摠府副摠管)에 증직되었다.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 산직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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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에 있는 조선 초기 문신 권제를 봉안한 사묘. 권제 부조묘는 권제(權踶)[1387~1445]를 봉안한 사당이다. 문경(文景)은 권제의 시호이다. 권제의 자는 중의(仲義),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안동이며 권근(權近)의 아들이다. 1445년(세종 27) 정인지, 안지 등과 『용비어천가』 편찬에 참여하였다. 훗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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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진주(晋州). 권종원(權鐘源)의 처이다. 권종원의 처 진주정씨는 시부모님을 봉양함에 효성을 다하였고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남편의 뒤를 따라 자결하였다. 조선 후기 고종 때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열녀 정문(旌門)을 세웠다. 현판에는 ‘열녀학생권종원처유인진주정씨지문(烈女學生權鐘源妻孺人晋州鄭氏之門)’이라고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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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의 무신. 본관은 안동. 자는 순좌(舜佐). 아버지는 권일규(權一圭)이다. 1879년(고종 16) 무과에 급제하였다. 1892년(고종 29) 의정부종사관(議政府從事官)을 역임하고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로서 녹도(鹿島)의 난에 종군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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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권혁용은 1944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968년 지방공무원에 임명되어 29년간 근속한 행정가이다. 음성중학교,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8년 음성교육청 근무를 시작으로 1969년 음성읍 근무, 1972년 맹동면 재무계장, 음성군청 내무과·새마을과 근무, 음성읍 사회·총무·호병계장,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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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의 영정을 봉안한 사우. 신후재는 조선 숙종 때의 사람으로, 동부승지, 강원도관찰사, 좌부승지, 안변부사, 우승지, 좌승지, 진하겸사은부사, 승정원도승지, 공조참판, 동지의금부사,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1694년(숙종 20) 3월 갑술옥사 때 여주에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 4월에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오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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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경호는 1910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생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34년 생극수리조합 근무를 시작으로 1946년 생극면에서 근무하였다. 1960년 지방자치단체 읍·면장 선거에서 생극면장으로 당선되어 1961년까지 재직하였다. 1966년 생극면장으로 재임명되어 행정업무를 추진하다가 196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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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 김환유(金煥維)의 아들이다. 김기화는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느 날 글방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놀랍고 마음이 이상하여 집으로 돌아오던 중 호랑이가 나타나 이상한 물건을 놓고 사라졌다. 호랑이가 놓고 간 물건을 가지고 집에 돌아오니, 아버지가 위독하여 가지고 온 물건을 달여 입에 흘려 넣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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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마송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김기화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 김기화는 자가 국현(國賢)이고, 호는 춘파(春波)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환유(金煥維)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전해지는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김기화가 글방에서 잠을 자는데 갑자기 마음이 이상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호랑이가 나타나 이상한 물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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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유삼(有三). 김동철(金東徹)의 아들이다. 1891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각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후손이 각회리에 거주하고 있다. 금왕면장 재임 시 선정(善政)을 베푼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퇴임 후 지역 주민이 김낙성의 공적(功績)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의 금왕읍사무소 서편에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 건립 취지서의 서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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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김상열의 차남으로 백부(伯父)인 김상우(金商禹)에게 입양되었다. 김달제는 백부인 양부모와 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는 동시에, 형이 일찍 죽고 고독하게 사는 형수 또한 어머니같이 극진히 대하였다. 그러던 중 형수가 우연히 병이나자 천지신명께 기도하니 형이 꿈속에 나타나 고생함을 위로하고 약을 알려주었다. 알려준 약제로 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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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덕제는 1940년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27년간 지방 행정에 몸담으며 지역 발전에 헌신한 행정가이다. 음성중학교·음성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66년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근무를 시작으로 1967년 소이면 근무, 1969년 음성군청 문화공보실 근무, 내무과 통계계장에 이어 교육훈련·개발·위생·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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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중기 광산김씨 음성 입향조 김덕항(金德恒)의 묘비. 김덕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군수(郡守) 김봉서(金鳳瑞)의 아들이다. 자는 사구(士久)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음보(蔭補)로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한성에서 음성읍 초평리 처가인 남씨(南氏) 집으로 와서 우거(寓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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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효부(孝婦). 본관은 평강(平康). 전규면(全奎冕)의 딸이며, 김동인(金東仁)의 처이다. 김동인의 처 평강전씨는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정숙하고 심성이 인자하여 부모님 섬기는 도리를 다하였다. 또 언행이 바르고, 비록 부잣집에서 성장하였으나 사치함을 모르고 검소하였다. 17세에 김동인에게 출가(出嫁)하였는데, 늘 살림이 가난하여 양식 걱정을 면치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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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동철은 1930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차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이다. 생극초등학교와 서울농업중학교를 졸업하였다. 1959년 생극면 근무를 시작으로 1960년 생극수리조합, 풍원농지조합 사업계장을 역임하였다. 1970년 생극면장으로 임명되었고 1974년 금왕읍장, 감곡면장을 역임하였다. 1976년 생극면장으로 재임명되어 소도읍가꾸기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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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동희는 1933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59년 지방공무원에 임용되어 36년간 지역 발전에 헌신한 행정가이다. 1953년 청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59년 음성군청 내무과 근무를 시작으로 재무과, 감사실, 건설과를 거쳐 1973년 건설과 관리계장에 이어 개발계장, 기획예산계장, 새마을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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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사업가. 김명환(金明煥)[1918~2002]은 김동식(金東植)의 3남으로 출생하여 삼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두 형이 경영하는 정미업에 7년간 종사하다가 음성군 삼성면에서 양조업을 하였다. 초지일관으로 성실·근면하면 성공한다는 철학을 갖고 생활을 하면서 지역 개발에 앞장섰다. 1958년 경기도 용인군 외사면 백암리로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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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봉환은 1912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대풍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진천이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5년 대소면 근무를 시작으로 공직 활동을 시작하였고, 1966년 대소면장으로 임명되었다. 1968년 생극면장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 대소면장에 재임명되었다. 김봉환은 재직 시 공무 수행에 귀감을 보여 음성군에서 발행한 『우리고장의 인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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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석룡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과 생극면 일부가 음죽현(陰竹縣)에 속하였을 때 상율면 본율동에 살던 양인(良人)이다. 김석룡은 아버지가 병환에 들자, 아버지의 병에 사람 고기가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하였다. 김석룡의 부인 장씨 또한 시아버지의 병을 13년간이나 지극하게 간호하였다. 음죽현의 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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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김석룡 처 장씨는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던 양인(良人) 김석룡의 처로, 젖을 짜서 병든 시아버지를 시중하는 등 13년간이나 효행을 행하였다. 김석룡 또한 아버지 병에 허벅지 살을 도려내 삶아드리는 등 효성이 지극하였다. 유림(儒林)들이 장씨의 효행을 진정하여 장계(狀啓)를 올리니 1720년(숙종 46) 5월에 복호(復戶)를 명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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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우봉(牛峯). 이호건(李鎬建)의 딸이고, 김석제(金錫濟)의 처이다. 16세에 김석제에게 시집가서 부모와 남편을 극진히 봉양하였는데, 결혼한 지 8개월 만인 17세에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마친 후에 부모님들이 청춘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재혼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거절하고 남편을 따라 자결하고자 하였다. 시부모님의 만류에 뜻을 이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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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김선은 평소 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여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했다. 당시 음성현(陰城縣)의 유림들이 그의 효행을 진정하여 관아에서 이 일을 기록하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통덕랑(通德郞)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증직(贈職)되었고,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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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성주(星州).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이휘(李揮)의 딸이고, 김선경(金善慶)의 처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으로 있던 남편 김선경은 싸움터로 나가고 자녀들만 데리고 집에 있었다. 충주 전투에서 이긴 왜적이 음성 지방까지 들어오자, 부인은 생극면 차곡리에 있는 수리산(愁離山)으로 피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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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여균(汝均), 호(號)는 정암(精菴). 평소 효심이 지극했던 김순은 아버지 상을 당하자 마을 뒷산에 모시고 추운 겨울에도 매일 시묘를 하여 손가락이 얼어서 일곱 개가 떨어져나갔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를 칠지효(七指孝)라 불렀다. 그가 아버지 묘에서 시묘하는데 밤에는 큰 범이 와서 같이 지냈으며, 낮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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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나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 유근배, 남상엽, 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이라는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의 주요 활동은 배일사상 고취와 선전, 독립자금 모금, 중국의 독립운동 단체와 연락 등이었다. 그러던 중 1942년 만주에서 유근배가 윤규섭에게 보낸 비밀 편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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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설암(雪巖). 김득수(金得洙)의 아들이다. 김예숙은 어느 날 김승선(金承宣)의 집에서 공부를 하던 중 갑자기 마음이 놀랍고 온몸에 땀이 나서 주위 사람들의 만류함을 무릅쓰고 급히 집에 돌아와보니, 어머니의 병환이 위독하여 온 집안이 겁에 질려 있었다. 그가 곧 손가락을 잘라 주혈(柱血)하자, 어머니는 회생하여 2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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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정치가. 1931년 김종혁(金鍾赫)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6년 서울대학교 약학과를 졸업하고, 충북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후, 1958년 향토 문화 창달에 뜻을 두고 음성문화원을 설립하여, 초대문화원장을 지냈고, 1967년 후세 교육을 위하여 한일중학교를 설립하여 1972~1980년까지 교장을 역임하였다. 충북약사회장을 역임하며 1967년 대한약사회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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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김용대(金容大)의 처 의성김씨는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김상빈(金相彬)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결혼하여 음성군 생극면에서 살았다. 홀로된 시어머니를 효성으로 모시고 남편을 공경하였다. 23세 때 남편이 병환으로 사망한 뒤에도 늙은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며 5대 독자인 당시 두 살의 아들을 키워냈다. 노환의 시어머니에게 도리를 다하여 간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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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김원조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왜경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군정부 광복군에서 활약하였으며,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하여 서울에 연락 기관을 설치하고 동지들과 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 경기도 이천에 돌아와 활약하다가 12월 28일 왜경에 체포되어 예심 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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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나주(羅州). 아버지는 정약임(丁若臨)이다. 정씨의 정확한 거주지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남편에 대한 정절과 시부모에 대한 효행으로 잘 알려져 있다. 16세 때 남편이 병이 들자 손가락을 잘라 지혈(指血)하여 3일을 연명케 하였으나 끝내 죽었다. 이에 남편을 따라 같이 죽으려 하였으나 늙은 시부모 때문에 그리하지 못하고, 정성을 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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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행정가. 김인선은 1942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1965년 음성군에서 근무를 시작하여 충청북도 청주시, 대전광역시 등에서 활동한 검찰공무원이다. 음성중학교·음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1년 성균관대학교를 수료했다. 1965년 음성군청 근무를 시작으로 1967년 검찰청으로 전직하여 1984년 수사사무관으로 승진,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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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김재소는 1930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1946년 충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55년 음성군 산업과 근무를 시작으로 1967년 경리계장, 1969년 관리계장, 1970년 개발계장과 상공계장, 1972년 보건행정계장을 역임하였다. 1975년에는 원남면 부면장으로 활동하다가 11월에 음성군 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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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성진(聲振), 호(號)는 우헌(愚軒). 김낙영(金樂英)의 아들이다. 김정훈의 어머니인 계모 박씨(朴氏)는 성격이 엄하였으며 힘을 기울여 그를 공직(供職)하게 하였다. 그 결과 김정훈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다. 추운 겨울 어머니가 병이 나자 그는 눈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얻기 어려운 약초를 구하여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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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3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내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1955년 지방공무원에 임용되어 1979년 6월 대소면장으로 퇴임하기까지 모든 일에 솔선수범했던 행정가이다.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55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에서 행정 근무를 시작하였다. 1965년 대소면 재무계장, 총무계장을 역임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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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있는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역임한 김지순의 선정비. 김지순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수(士秀), 호는 삼수당이며, 서울 태생이다. 1824년 충원현감(忠原縣監)으로 부임했다가 1826년 공청도(公淸道)가 충청도로 되고, 충주목이 복구되면서 충주목사가 되었다. 비(碑)의 총 높이는 124㎝이며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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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의성(義城). 참봉(參奉) 김예숙(金禮淑)의 차남이다. 김태섭은 평소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환이 나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 3일간을 더 살게 하였다. 돌아가신 후에 장례를 극진히 모시고 시묘(侍墓)를 할 때 밤마다 범이 와서 호위하고 다른 짐승이 오면 소리내어 꾸짖어, 비록 어두운 밤중이라도 범의 안광(眼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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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경주, 자는 성원(聖遠). 십청헌 김세필(金世弼)의 13세손이다. 1882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서 김석용(金奭容)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김필제는 한일합병이 되자 서울로 상경하여 의거 활동을 하다가 왜경에게 쫓기게 되었다. 이때 왜경이 난사한 총탄에 오른팔을 맞았으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서재필 박사의 도움으로 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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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덕성을 시조로 하고 정수곤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신라 때 사람인 정덕성(丁德盛)이다. 그는 원래 중국 당나라 사람으로 853년(문성왕 13)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도(押海島)에 유배되어 와 정착하였다. 실학을 집대성한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그 후손으로 그들이 나주정씨(羅州丁氏)의 주축을 이루고 있다. 정약용·정약전(丁若銓)·정약종(丁若鍾) 세 형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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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아버지는 남흔(南炘)이다. 1924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서 태어났다. 음성군 소이면과 금왕면에서 부면장을 역임하였다. 1961년 6월 금왕면장 재임 중 1965년에 퇴임하였다. 1975년 금왕농업협동조합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79년에는 『음성군지』 편집위원으로 활약하며 애향심 고취에 공헌하기도 하였다. 1989년 향년 66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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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남기설은 1909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충북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경기도 산업과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공무원으로 활동하다가 1952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으로 내려와 원남면에서 근무하였다. 1956년 원남면장으로 임명되었다. 면 행정 발전과 지역사회 개발에 기여한 공로로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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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3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노리 노래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윤원(南允源)이다.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 윤규섭·유근배·최규동 등과 흑민단(黑民團)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42년 체포되어 대전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약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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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88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소여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호중(南鎬重)이다. 천도교 음성교구에서 활발한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23년 종리원(宗理院) 종리사에 임명되었고, 교인들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모금한 쌀을 천도교 중앙회에 보내는 직책을 맡았는데, 그 쌀이 독립군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면서 1925년 7월 일본 경찰에 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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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열을 시조로 하고 홍재모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홍은열(洪殷悅)을 시조로 하는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한국의 대표적인 가문의 하나로서 당홍(唐洪)과 토홍(土洪) 두 계열로 나눈다. 남양홍씨 당홍의 세계(世系)는 시조의 12세손에서 13파, 그밖의 2파, 도합 15파로 대별되는데, 그 중 벼슬을 지낸 내력과 후손의 수가 많은 파로는 남양군파(南陽君派)·문정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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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존유를 시조로 하고 구만재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시조는 고려 말 검교상장군(檢校上將軍)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을 지낸 구존유(具存裕)로 신안주씨(新安朱氏) 주잠(朱潛)의 사위이다. 주잠이 1224년(고종 11) 송나라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을 때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고려로 망명하여 능성(綾城)[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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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필을 시조로 하고 장언구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단양장씨(丹陽張氏)는 계보를 달리하는 두 계통이 있다. 선단양(先丹陽)으로 불리우는 계통은 장씨의 도시조(都始祖) 태사공(太師公) 장정필(張貞弼)의 증손인 장지현(張之賢)의 아들 장순익(張順翼)이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라 단양군(丹陽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본관을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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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을 시조로 하고 서관준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시조는 서진(徐晋)으로 고려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지고 부도판서 등의 벼슬을 역임하면서 서씨 성을 받았다. 현재까지 9개 파로 갈라져서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1960년 국세 조사에서는 6만 6,571가구에 인구 37만 7833명, 19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 수 14만 4,320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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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한철과 정동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고려 안일호장(安逸戶長) 정회문(鄭繪文)이다. 그 후손이 고려 초기 보윤호장을 지낸 정지원(鄭之遠)이다. 조선시대에 17명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을 비롯한 많은 명신을 배출하여 전주이씨·안동김씨와 더불어 3대(大) 상신(相臣) 가문으로 유명하다. 동래정씨는 정지원의 5세손 대에서 교서랑공파(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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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양비를 시조로 하고 윤청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고려시대에 보승낭장(保勝郞將)으로 호장(戶長)을 지낸 윤양비(尹良庇)이다. 윤양비의 증손 윤택(尹澤)은 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윤택의 손자 윤소종(尹紹宗)은 조선시대에 『고려사(高麗史)』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2000년 인구 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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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차달을 시조로 하고 류호와 류광총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 류차달(柳車達)의 10세손 내지 12세손 대에서 14파로 크게 나뉘는데, 그 중 큰 파는 충경공파·좌상공파·하정공파·검한성공파·지후사공파 등 다섯 파이다. 명종 때 소윤 세력에 의해 사사된 좌의정 류관(柳灌),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봉된 류사원(柳思瑗), 조선 중기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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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여흥. 아버지는 효자 민동량(閔東亮)이다. 큰아버지 민동상(閔東尙)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아버지가 했던 효의 덕업을 이어받아 어버이에게 대한 효도를 실천하여 온 집안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집안의 자랑이 되었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상평리에 있다.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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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군삼(君三), 호(號)는 송암(松巖). 첨정 민휘정(閔鰴鄭)의 아들이다. 민동량은 5세 때 글을 깨우쳐 주위에서 신동이라고 소문이 났으며 5~6세 때 부모가 병이 났을 때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모 곁을 떠나지 않고 병을 간호하였다. 10세에 어머니 병환이 위중하자 하늘에 기도하였고, 15세 때인 1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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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무신 민발의 묘소. 민발은 조선 전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올랐다. 묘역은 약 150㎡인데 묘 앞에는 상석, 망부석, 대리석 묘표,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높이 총 227㎝이다. 신도비의 전액(篆額)은 ‘위양공민발신도비명(威襄公閔發神道碑銘)’이다. 1707년(숙종 33)에 세워진 이 비의 비문(碑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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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여흥. 할아버지는 민동량(閔東亮)이고 아버지는 민경연(閔景淵)이다. 조상의 덕업을 받들어 모셔 어버이에게 효도하여 집안의 명성을 높였다. 정조조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아들 민백원(閔百元)과 손자 민국현(閔國顯)은 경서에 능하였고 증손 민치경(閔致慶)은 문예에 숙달하여 사람들이 산동(山東) 문장이라 칭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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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실(元實), 호는 한송(寒松). 민휘계(閔徽繼)의 5세손이다. 민정현(閔鼎顯)[1783~1812]은 3세에 글을 읽고 10세에 경서를 통달하였으며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안성시 칠장사(七長寺)에서 노승과 같이 경서(經書)와 시부(詩賦)를 토론하는데 막힘이 없어 30여 명의 중들이 경탄하였다. 학식이 탁월하여 먼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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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된섬이에 큰 바위가 있는데, 민해준의 효행은 이 바위와 관련되어 전하고 있다. 민해준이 어머니와 같이 밭에서 김을 매다가 소낙비를 만났는데, 비를 피하기 위하여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바위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더니 곧 굴러 내릴 위험에 있었다. 이 때 민해준은 어머니를 밖으로 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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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여흥(驪興). 자(字)는 미윤(美胤), 호(號)는 호암(湖巖). 민홍로(閔弘魯)의 아들이다. 민휘계는 집안이 가난하여 낮에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밤에는 경전(經典)을 읽으면서 생활하니 몸에 걸칠 옷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형제간에 우애가 두터워 한 상에서 밥을 먹고 한 이불에서 자고 같이 글을 읽으면서 잠시라도 떨어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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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신평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효자 민휘계와 민정현의 정려문. 민휘계·민정현 효자각은 민씨 가문의 두 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문이다. 민휘계는 가난하였으나 글을 좋아하고 주경야독을 했다. 학행(學行)이 좋고 부모에 효심이 지극했다. 1808년(순조 8)에 감영(監營)에서 상계(上啓)하자 왕이 특명을 내려 민휘계의 행적을 간행토록 하였다. 이 책의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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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언침을 시조로 하고 박안명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거주 세거 성씨.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제1왕자인 밀성대군(密城大君) 박언침(朴彦忱)이다. 밀양박씨의 세계는 밀성대군의 7세손인 박언부(朴彦孚)를 중시조로 하는 문하시중공파(門下侍中公派)를 비롯하여 도평의사사사공파(都評議使司使公派)·좌복야공파(左僕射公派)·밀직부사공파·판도공파·좌윤공파 등으로 대별되고, 각 파는 아랫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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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박대식은 193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밀양이다. 음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1963년 충청북도 재정과 근무를 시작으로 1964년 음성군 재무과에서 근무하였으며, 1965년에는 진천군 재무과에서 근무하였다. 1972년 음성군 지적계장을 역임하였고 1976년 지적기사(地籍技士)로 승진하였다. 1990년 지방지적기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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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이자 효부. 박도연(朴道淵)의 처(妻)이다. 교생(校生) 박도연의 처 이씨(李氏)는 시부모 공양에 극진하여 효부로서 칭찬이 자자했다. 어느 해 봄에 이웃집에 불이 났는데 박도연의 집까지 옮겨 붙었다. 때마침 농사철이라 마을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불이 난 것을 본 이씨는 사당(祠堂)에 들어가 우선 신주(神主)를 가져오고, 이어서 방에 들어가 시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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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박래동은 1915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순천이다.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음성명륜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32년 음성군 내무과 근무를 시작으로 1952년 영동교육구청 서무과장, 1954년 충청북도 음성교육청 서무과장, 1962년 제천군 재무과장, 1966년 음성군 재무과장을 두루 거쳤다. 196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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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무신. 본관은 죽산(竹山). 귀주대첩에서 공을 세워 음성백(陰城伯)에 봉해진 후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시조가 되었다. 아버지는 호부상서(戶部尙書) 박인석(朴仁碩)이다. 박서는 무과에 급제한 후 1202년(신종 5)에 아버지가 진주도 안찰부사(按察副使)로 도적을 평정한 공에 의해 내시(內侍)로 근무하게 되었다. 봉선고판관(奉先庫判官)에 임명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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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박선구는 1906년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신양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고령이다. 서울 배재학당을 수료하였다. 1948년 생극면장에 임명되어 1949년까지 재임하였다. 1959년에 생극면장에 재임용되어 1960년까지 재임하는 동안 지역 사회 발전과 면민 복지 행정에 공헌하였다. 1984년 11월 78세로 세상을 떠났으며,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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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문신. 본관은 밀양. 자는 연길(年吉), 호는 의당(毅堂). 묵재(黙齋) 박경상(朴景祥)의 8세손이다. 아버지는 박기숙(朴紀淑)이다. 함경남도 고원군 남흥리에서 태어났다. 1860년(철종 11)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켰다. 1870년(고종 7) 향리 사람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포상을 진정하려 하자 부끄럽다며 진정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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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흥(長興). 고려시대 대사헌(大司憲) 임헌의 딸이며, 박순(朴淳)의 처이다. 1402년(태종 2) 함흥차사로 함주(咸州)로 내려간 남편 박순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매일 목욕재개하고 하늘에 기원하였으나, 끝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결하였다. 태종은 이 소식을 듣고 임씨의 묘지를 하사(下賜)하였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벽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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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에 건립된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음성박씨 선조 박순의 사당. 박순 충신문은 박순 사당이라고도 하며, 2002년 5월 18일 음성군 향토문화유적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선조인 박순은 1388년(우왕 14) 요동 정벌 때 이성계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위화도 회군에 앞서 이성계의 명으로 회군 승인을 얻기 위해 우왕에게 갔던 박순은 조선이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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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선비. 본관은 밀양. 자는 경견(敬絹), 호는 입재(立齋). 정조 대의 명신 매곡 박한규의 6세손이다. 아들로 박석원과 박두원이 있다.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하였다.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따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삼봉리로 이주하였다. 15~16세 때 회당 윤응선에게 수학하여 학문에 탁월하였다. 일제의 학정에 세상의 뜻을 버리고 은거하여 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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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헌지(獻之), 호(號)는 이락(二樂). 충민공 박순(朴淳)의 11세손이고, 효자 박호원(朴浩遠)의 손자이며, 동지중추부사 박진구(朴震龜)의 아들이다. 박정규는 후제 김간(金幹)에게 배우고, 1721년(경종 1)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지내다가 아산현감(牙山縣監)에 이르렀다. 어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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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박정시는 1916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대소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금왕면 근무를 시작으로 공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1957년 처음으로 실시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대소면장으로 피선되어 고향 발전을 위하여 헌신하다가 1961년 퇴임하였다. 퇴임 후 독농가로 영농에 힘쓰다 고향에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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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이자 정치가. 박해룡은 1917년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삼성공립보통학교(三成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으며, 주로 음성군 지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였다. 4년간 삼성면장을 역임한 후 퇴임하였으며, 그 후 삼성면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면의원에 당선되었다. 삼성면 의회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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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교육 공로자 박해일의 기념비. 박해일의 본관은 순천(順川)이며, 음성 수봉초등학교 부지를 일부 희사한 교육 공로자이다. 박해일 교육공로기념비는 1943년에 세워졌다. 총 높이는 185㎝이며 3단으로 구성되었다.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45㎝, 앞면 55㎝, 측면 25㎝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49㎝, 앞면 102㎝, 측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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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인이자 효자. 본관은 음성(陰城). 자(字)는 천경(天卿), 호(號)는 면헌(勉軒). 충민공(忠民公) 박순(朴淳)의 8대손이다. 박호원은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門人)이다. 문예(文藝)에 뛰어나고 필법이 정교했다. 1618년(광해군 16)에 창경궁이 중건(重建)되자 문 위에 거는 편액(扁額)을 썼다. 광해군은 이 글씨를 보고 가상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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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박정규와 박호원의 정려문. 박호원과 박정규는 충민공 박순(朴淳)의 후예이며, 박정규는 박호원의 손자이다. 박호원의 효자문은 1725년(영조 1)에 하사되었으며, 박정규의 효자문은 1743년(영조 19)에 하사되었다. 1689년(숙종 15)에는 충민공의 부조묘인 박순 사당, 박순 충신문, 박순의 처 장흥임씨의 열녀문을 이곳에 지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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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경찰 공무원. 반국운은 1908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청안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어린 나이에 일찍 경찰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강원도 정선경찰서장(旌善警察署長) 등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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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4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태어났다. 음성공립농업전수학교를 졸업하였다. 소이부면장과 원남부면장을 역임하였고 1960~1961년 원남면장을 역임하였다. 1969년 원남면장으로 재임용되어 1981년까지 근무하였다. 오랜 기간 면장을 맡으면서 많은 지역 현안 사업을 처리하여 면민의 신임을 받았다. 퇴임 후에는 공화당 관리장과 민주정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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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반종황은 1902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출생하였다. 음성공립보통학교(陰城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48년부터 1956년까지 8년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면장을 역임하였다. 특히 6·25전쟁 중 지역 행정 업무를 원활히 수행하면서 민심을 잘 수습하여 주민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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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반창섭은 1905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서울 성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광복 후 1945년부터 1946년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초대 원남면장으로 재직하며, 혼란한 행정 정국을 잘 이끌어 음성 지역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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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궁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신후재가 수학하던 곳. 백련서재는 조선 숙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서암 신후재(申厚載)[1636~1699]가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던 장소이다. 신후재는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 때 유배되었다가 1697년(숙종 23)에 석방되면서 이곳으로 옮겨와 살았다. 서재(書齋) 앞 연못에 백련 꽃이 있는데, 이는 신후재가 청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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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정규영·정인상 부자와 현풍곽씨의 효열비를 보관한 비각. 1969년 성균관 유림에서 추천하여 1970년과 1978년에 세워졌다. 비각은 전면 1칸 반,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 기와집으로 전후좌우 네 개 면을 홍살로 막았다. 둘레에는 적색 벽돌담을 쌓고 앞면에 철제 대문이 세워져 있다. 비각의 앞 처마에는 한자로 ‘상모각(常慕閣)’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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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 지역에 거주하거나 연고가 있는 동일 혈연 집단. 성씨에서 성(性)은 혈연관계를 나타내며 씨(氏)는 지역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성에는 관(貫)이 있는데 적·본관·관·관향이라고도 한다. 음성 지역에는 조선 후기로 내려오면서 새로운 성씨를 가진 씨족이 지속적으로 이주하여 와서 살았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토성(土姓)으로 박(朴)·채(蔡)의 두 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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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 사리면(沙梨面) 근무를 시작으로 금왕면(金旺面)을 거쳐 3년간 음성군(陰城郡)에서 근무한 후 원남면장(遠南面長)으로 임용되어 2년간 고향을 위해 헌신·노력하다가 퇴임하였다. 원남면 의회 의장을 8년간 지냈고 원남면 농업협동조합장을 역임하였다. 내무부장관 표창과 전국엽연초연합회장상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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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부모가 중병을 앓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드려 소생시키고 3일을 더 살게 하였다. 성필창의 효행이 알려져 복호(復戶)되어 조세·부역을 면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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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송병화는 1928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부윤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대소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안성농업학교를 거쳐, 건국대학교 정치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였다. 1949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으며, 1961년에 충청북도 음성군청 산업계장을 거쳐 1962년 대소면장을 역임하였다. 34세의 젊은 나이에 대소면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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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에서 살았던 효부. 본관은 밀양(密陽). 박씨는 계모 슬하에서 자라다가 14세에 출가하였으나 26세에 남편을 잃었다. 가난한 집의 과부가 되어 많은 시집 식구를 봉양하느라 크게 고생하였다. 친정에서는 개가하기를 권유하였으나 이를 물리치고, 유복 아이를 길러서 은진송씨(恩津宋氏) 가문에서 일생을 마친다는 뜻에 따라 어려움을 참고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송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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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송홍식은 1911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보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성공립보통학교와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장을 역임하였으며, 1952년과 1956년에 각각 음성군 교육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54년과 1958년에는 충청북도 교육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1960년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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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창직을 시조로 하고 백사구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경명왕 때의 충낭장 백창직(白昌稷)을 시조로 하여 계대(繼代)를 이어오고 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 인물로는 성리학자 백이정, 공민왕 때 학자인 백문보(白文寶)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자인 백인걸(白仁傑), 그의 아들 백유함(白惟咸), 선조 때의 시인 백광훈(白光勳) 등이 있다. 2000년도 국세 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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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자장을 시조로 하고 조덕립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순창조씨 시조 조자장(趙子張)은 고려 초에 순창에서 호장을 지냈다. 그리하여 선조들의 토착지인 순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고려 말의 충신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 세종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한 조숭문(趙崇文), 명종 때 목사를 역임한 조유성(趙惟誠),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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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규를 시조로 하고 박장생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순천박씨(順天朴氏) 시조 박영규(朴英規)는 문헌에 의하면 후백제 견훤의 사위로 태조 왕건을 도와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되고 삼중대광(三重大匡)에 봉해졌으며 후손 박란봉은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박영규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순천으로 삼아 오다 세계가 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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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자미를 시조로 하고 안형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 안자미(安子美)는 고려 신종 때 흥위위보승별장(興威衛保勝別將)을 지내고 순흥의 별칭인 흥령현에 정착 세거하였으며 신호위상호군(神虎衛上護軍)에 추봉되었으므로 후손들은 순흥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안자미의 세 아들 안영유(安永儒)·안영린(安永麟)·안영화(安永和) 등을 파조로 한 3파가 주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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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신현석(申鉉錫)의 아들로 이름난 효자였고 음성군에서 면장, 교육위원회 위원을 지내며 지역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효자(孝子)로서 부친이 와병 중에 극진히 간호하였으며 별세한 후에는 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성묘하였는데 이때 슬피 우는 소리에 산 밑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또한 가난한 이웃들이 춘궁(春窮)과 칠궁(七窮: 음력 7월에 겪는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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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0년 신석균(申石均)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소이국민학교와 충청북도 잠업학교를 졸업했다. 1938년 음성군 소이면 근무를 시작으로 1947년부터 1950년까지 음성경찰서에서 근무하였다. 1951년 다시 소이면으로 전임(傳任), 1956년 민선 소이면장으로 재직하면서 의욕적으로 지방 행정을 추진,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어 1960년 민선면장으로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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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심종래는 1908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봉전리 댁별[楮田]에서 출생하였다.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향상회관(京城向上會館) 야간부 중학 3년을 수료하였다. 1939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으며, 1941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농회장(蘇伊面 農會長)이 되었다. 1941년 11월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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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행을 시조로 하고 권익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시조인 권행(權幸)의 본래 성은 신라 왕실의 후손인 경주김씨였다. 서기 930년 왕건의 고려군이 견훤의 후백제군과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에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여 식읍으로 내림과 동시에 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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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평을 시조로 하고 김혜·김진강·김오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안동김씨는 신라 말에 고창군의 성주였으며 930년(태조 13)에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 안동장씨 시조 장길 등과 함께 후백제의 견훤 군대를 대파하여 고려 태조로부터 개국공신에 녹훈되고 대광태사를 지낸 김선평을 시조로 후대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김선평의 후손들은 김극효(金克孝)의 아들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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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안석중은 1903년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갑산리 동역(東驛)에서 출생하였다. 음성공립보통학교와 공주영명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협성신학교를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에 공직에 입문하였으며, 광복 후인 1947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부면장을 역임하였다. 1948년부터 1949년까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장을 역임하였으며, 소이면장 재임 중에 충청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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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화(子華). 가선대부 안응인(安應仁) 아들이다. 일찍이 벼슬길에 올라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냈다. 54세로 죽자 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에 증직되었다. 묘소가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각회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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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유익을 시조로 하고 송시철과 송서석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 송유익(宋惟翊)은 고려 때 진사로 나라에 공을 세워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고려 충렬왕 때 중찬(中贊)을 지낸 송송례(宋松禮)의 아들 대에서 5파로 갈라졌다. 조선시대에 정승 2명과 왕비 1명, 그리고 많은 판서급 인물을 배출했는데, 특히 지신공파와 정가공파에서 많은 인물이 나왔다. 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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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칭도를 시조로 하고 민백훤과 민덕룡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공자의 열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노나라 민자건(閔子騫)의 후손 민칭도(閔稱道)로, 민칭도는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왔다가 귀화하여 여흥에 정착하였다. 고려 때부터 명문 가문이었으며, 수정승 민지(閔漬)를 시조로 하는 문인공파(文仁公派)와 대제학(大提學) 민적(閔頔)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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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육영 사업가. 약산(藥山) 염병화는 편모슬하의 어려운 생활 속에서 가산을 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한글을 보급하기 위하여 평곡유치원, 일신서당(日新書堂)을 설립하여 이사장으로 육영 사업에 이바지하였다. 광복 후에 평곡공립국민학교를 설립하는 데 재산을 기증하였고, 재정 운영난을 겪자 염병화가 경영하던 채석장 수입 전액을 학교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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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33년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 항공학교를 수료하였다. 1941년 음성군에서 처음 공직을 시작하였으며, 1947년에는 충주군 농촌지도주사, 1948년에는 음성군 성인교육장학사(成人敎育獎學士), 양정계장(糧政係長), 서무계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음성읍장으로 임용되었고 1963년에는 공화당 정당활동에 참여하였으며 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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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한을 시조로 하고 이의제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고려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 이문한(李文漢)이며, 그의 후손인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이대영(李大榮)·봉승랑(奉承郞) 이중영(李仲榮)·문하시중평장사 이수춘(李守椿)을 각각 중시조로 하는 파가 있다.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9명을 배출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이종검(李宗儉)·이보흠(李甫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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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사업가. 오주영은 조선 인조(仁祖) 때 영의정을 지낸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의 11세손이며 오극선(吳克善)의 아들이다. 2세 때 충청북도 중원군 신니면 신청리로 이사하고 1920년 12세 때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花洞)으로 이사하였으며, 1921년에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고내리로 이사하였다. 1922년 14세 되는 해에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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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익을 시조로 하고 장위신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옥구장씨(沃溝張氏)는 도시조(都始祖) 장정필(張貞弼)의 14세손인 장익을 시조로 한다. 『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에 의하면 장익은 고려에서 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거쳐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역임하였고 옥성부원군(沃城府院君)에 봉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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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조선 말기 이기홍을 봉안한 사당. 옥산사는 주자(朱子), 송시열과 함께 직재(直齋) 이기홍(李其洪)을 모시고 봄과 가을에 제향하는 사당이다. 옥산사는 본래 괴산군 연풍면 원통리에 있던 문산서원을 1908년에 복원한 사당이다. 문산서원이 흥선대원군 때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되자 40여 년 뒤인 1908년에 사액서원의 철폐를 애석하게 생각한 유림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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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아버지는 중추부사(中樞府使) 우은정(禹殷鼎)이다. 홀어머니 경주이씨를 극진히 봉양하여 효자라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일찍이 과부가 된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어머니에게 효를 다하였다. 어머니가 병환이 들자 수년 동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고, 죽은 뒤에는 3년 동안 시묘(侍墓)를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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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문화. 아버지는 유백종(柳伯宗)이다. 재종조(再從祖)인 장령 유정수가 경기도 고양군 수색에 살던 중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이를 간하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받아 초산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에서 풀린 뒤에도 복직되지 못하였다. 어려서 이러한 상황을 본 유광총은 자신의 가문에서 과거길이 막힌 것을 근심하다가 십승지지(十勝之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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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독립운동가. 1921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유청(柳淸)이다. 1934년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41년 윤규섭과 모의하여 남상엽·김시중·최규동 등을 규합한 뒤 흑민단이란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흑민단을 통하여 배일사상을 선동·선전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았다. 상해임시정부와 연락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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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중현(仲賢), 호는 혜인(兮人). 서예가 유한지(兪漢芝)의 손자이며, 이조참의 유초환(兪初煥)의 아우이다. 1855년(철종 6) 사마시에 급제하여 창릉참봉, 제용봉사, 오위사과 등을 거쳐, 1871년(고종 8) 통례원인의, 한성부주부, 판관을 역임하고, 태조태종추상존호도감낭청을 담당하였다. 1872년 의령현감, 1874년 평강현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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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음성현감을 지낸 문신. 1695년(숙종 21) 음성현감으로 부임하여 1699년(숙종 25)까지 재임하였다. 부임하던 1695년과 이듬해까지 2년 동안 목민관으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하여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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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정치가. 1940년 조선공업숙련공양성소 강습과를 졸업하고, 1944년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 근무를 시작으로 공직에 몸담아 1946년 고향인 음성군 대소면에서 근무하였다. 1972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1978년 제2대 대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81~1991년까지 대소면 농업협동조합 조합장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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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교육 공로자 유중환의 기념비. 유중환의 본관은 진주(晋州)이며, 음성 수봉초등학교 부지 일부를 희사한 교육 공로자이다. 유중환 교육공로기념비는 1943년에 세워졌다. 총 높이는 180㎝이며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134㎝, 폭 53㎝, 두께 24㎝이고, 가첨석(加檐石)은 높이 43㎝, 폭 98㎝, 두께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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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기계(杞溪). 자는 백선(伯善), 호는 남강(南岡). 서예가 유한지(兪漢芝)의 손자이며, 사복시판관 유능환(兪能煥)의 형이다. 1849년(헌종 15) 진사가 되고 1863년(철종 14) 문과에 급제하였다. 학문이 깊고 문장에 능하며 선대 3대의 필법(筆法)을 이어받아 글씨가 정묘(精妙)하였다. 벼슬에 나아가 정언, 교리, 사성, 승지, 대사간을 거쳐 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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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이 깊어지자 윤기손·윤기진 형제는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원하자 형제가 꿩을 구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보았지만 구할 수 없어 탄식하며 쏘다니던 중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차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는 이 꿩을 주어다가 어머니에게 고아 드렸는데, 이것을 먹고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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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문(旌門). 윤기손·윤기진 형제 효자문은 윤기손(尹起巽)·윤기진(尹起震) 형제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효자문으로, 형제의 효자문과 윤득성 처 청풍김씨(淸風金氏)의 정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풍김씨 열녀문이 같이 있다. 칠원윤문 효열각(漆原尹門 孝烈閣) 또는 칠원윤씨 효열각(漆原尹氏 孝烈閣)이고도 한다. 윤기손·윤기진 형제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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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하자 윤기진과 형 윤기손(尹起巽)은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였다. 한번은 어머니가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였으나 구할 길이 없자 탄식하며 울고 있는데, 우연히 독수리 한 마리가 꿩을 물고 오다가 형제 앞에 떨어뜨렸다. 형제가 그 꿩을 고아 드리자 어머니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어머니가 위독하자 형은 세 손가락을, 윤기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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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김언희(金彦熙)의 딸로, 19세에 남편 윤득성(尹得聖)이 병을 얻자 정성껏 간호하였다. 위급한 지경에 이르러 천지신명께 남편 대신 죽기를 빌었으나 끝내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 상을 마친 후 독약을 먹고 자결하려 하였으나 집안사람에게 발견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유복자로 딸을 낳은 후 음식에 입을 대지 않다가 이틀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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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윤완식은 1910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서 윤태진(尹泰鎭)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파주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현재 금왕읍) 근무를 시작으로 음성군 각지에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고향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였다. 1954년부터 1968년까지 제3대, 제4대, 제7대 금왕면 면장을 역임하였으며, 재임 기간 중 고향 발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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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원을 시조로 하고 송교운과 송익정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은진송씨(恩津宋氏)의 시조는 고려조에서 판원사(判院事)를 지내고 나라에 공을 세워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진 송대원(宋大原)이다. 송대원의 증손인 송명의가 1362년(공민왕 11)에 문과에 급제하고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를 거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에 이르렀으며, 고려가 망하자 충청남도 대덕군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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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를 시조로 하고 박래복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음성박씨(陰城朴氏)의 시조 박서(朴犀)는 신라 경명왕(景明王)의 넷째아들인 죽성대군(竹城大君) 박언립(朴彦立)의 11세손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골 장수 살리타이[撒禮塔][?~1232]가 쳐들어와 귀주(龜州)를 공격하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로 있으면서 물리쳤으며 후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라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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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충을 시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고려 때 중랑장(中朗將) 채충(蔡沖)이라 하나 문헌상 시조의 행적이나 본관 유래, 이후의 세계(世系)를 상고할 수 없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73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고 한다. 음성채씨(陰城蔡氏) 후손을 알 수 없어 입향 경위도 알 수 없다. 음성채씨는 음성에 본을 둔 성씨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 음성에 세거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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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있는 조선시대에 바위에 새겨넣은 글자. 음애(陰崖)는 바위에 글자를 새겨놓았다고 전해지는 조선 중기의 문신 이자(李耔)의 호이다. 음애(陰崖)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햇빛이 비치지 않는 낭떠러지’를 의미한다. 음애동 각자는 이자가 음성군 소이면 비산리에 위치한 음애동(陰崖洞)에 거주하면서 새겨놓았다고 전한다. 글자는 ‘음애동(陰崖洞)’이라는 글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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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을 시조로 하고 남두명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남씨(南氏)는 경덕왕(景德王) 때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로 남민(南敏)을 시조로 삼고 있으나 시조 이하 누대(累代)가 실전(失傳)되어 세계(世系)를 잇지 못하였다. 고려조에 이르러 남민의 후손 3형제가 있어 맏이 남홍보(南洪輔)는 영양남씨(英陽南氏), 둘째 남군보(南君甫)는 의령남씨(宜寧南氏), 막내 남광보(南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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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을 시조로 하고 김준기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의성김씨(義城金氏) 시조 김석(金錫)은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아들이자 왕건의 외손이다.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졌으며 이에 후손들이 본관을 의성으로 하였다. 의성김씨 가문의 조선시대 인물로 김안국(金安國)[1478~1543]은 연산군 때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와 전라도관찰사(全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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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순흥. 남편은 이경립(李敬立)이고, 아들 이상현을 두었다. 유복자였던 이상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학문에 정진하여 공조참의가 되어 그 덕망이 널리 알려졌다. 순흥안씨는 22세 때 남편을 여의고 삼년상을 치른 후, 어린 아들에게 “나는 이 시간에 네 아비를 따라 가겠노라” 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나라에서 열녀 정문을 세우게 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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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규석은 고려시대 충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으로 1907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서 출생하였다. 경성중앙고등보통학교(京城中央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였고, 충청북도 괴산군청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다. 충청북도 도청 재정과장과 지방과장 등을 거쳐, 강원도 도청 문교사회국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중앙 관청으로 진출하여 농림부양정국장(糧政局長)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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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진안대군(鎭安大君) 이방우(李芳雨)의 후손으로, 18세에 남곡(南谷) 17세손인 이석주(李錫柱)와 혼인하였다. 1년 만에 남편이 죽자 따라서 자결하고자 하였으나 남편 전처의 소생인 어린 아들 환승을 보살피며 가문을 지킬 것을 이미 약조한 뒤였다. 남편의 유의(遺意)에 따라 종족(宗族)을 찾아서 위문(慰問)하니 모두들 감복하였다. 또한, 집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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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 효령대군 이보(李𥙷)의 6세손이며, 이경금(李景嶔)의 아들로 증영의정 이경두(李景㞳)에게 입양되었다. 이성은 진사, 참봉을 거쳐 문한림, 이조참판,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에 종군하였다가 전사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행제리에 있고, 이덕형(李德馨)이 묘비 글을 썼다. 완계군(完溪君)으로 훈봉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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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정치가. 1923년 경성제일고등학교 사범과를 졸업한 후 1933년까지 교직 생활을 계속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후 음성군 치안유지회 부회장으로서 당시 극심하였던 사회 혼란을 수습하는 데 앞장섰다. 그 이듬해인 1946년에는 음성군 식량배급조합장을 역임하고, 1960년 제5대 음성읍장으로 발탁되어 주민 복지 증진을 위한 많은 사업을 추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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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이식후는 훈장 노릇을 하며 노부모를 봉양하였다. 하루는 제자들이 말하기를 ‘가르침에 너무 열중하다 보니 부모님의 봉양이 소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감복한 이식후는 더욱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였다. 부모가 병이 나면 하늘에 대신 죽기를 기도하였으며 변을 살펴 증세를 짐작한 후 탕약을 지었고, 부모가 위독할 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게 하여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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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용희는 1921년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오향리에서 출생하였다. 감곡공립보통학교와 서울동성상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9년부터 서울시의 삼지원토목합자회사에서 근무하였다. 1946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사무소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51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사무소 서무계장과 1956년에 호적계장 등을 역임하였다. 1961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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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영산1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이인실의 묘비. 이인실은 자가 효사(孝思), 호는 갈파(葛坡)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1633년(인조 11)에 성균관에 들어갔다. 사옹원봉사, 종묘서직장을 거쳐 의금부도사가 되었고, 귀후서제학 등을 역임하였으며,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가 되었다. 비신, 가첨석, 방부 등 3단으로 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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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정치가. 국립경찰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치안국 통신과장, 경무대 경찰서장, 부산시 경찰서장, 동대문경찰서장 등 경찰 요직을 역임하고 치안 행정에 공헌하다가 1960년 무소속으로 음성에서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전국구 국회의원, 1973년 음성·진천에서 민주공화당으로 제8대 국회의원 당선, 1973년 제10대 전국구 유정회 국회의원에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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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종달은 1927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서 출생하였다. 청주제일공립중학교(淸州第一公立中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45년 충청북도 음성군청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다. 충청북도 음성군청 서무계장을 거쳐, 1954년에는 충청북도 괴산군청 농정계장을 역임하였다. 1955년부터 충청북도 음성군청의 농정계장, 사회계장, 서무계장, 행정계장, 농지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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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종은은 1930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하당리에서 출생하였다. 1950년 청주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청주대학을 중퇴하고 한국미창(韓國米倉) 청주지점과 서울지점 경리계장을 역임하였다. 1960년부터 충청북도 음성군청 내무과에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1962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청 내무과 기획예산계장에 이어 양정계장, 경리계장, 병사계장,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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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행정가. 이종익은 1917년 충청북도 영동군 용산면에서 출생하였다. 1932년에 옥천공립농업전수학교(沃川公立農業專修學校)를 졸업하고, 경찰전문학교(警察專門學校)를 수료했다. 1938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으며, 1961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장과 1963년에 음성읍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에 공직에서 물러나 사회 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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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종희는 1929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수태리에서 출생하였다. 1949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면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으며, 1965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청 산업계장과 1970년에는 재무계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부면장으로 승진하였으며, 1981년부터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부면장으로 재직하다가 퇴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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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준성은 1890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본대리에서 이순형(李舜衡)의 아들로 출생하였으며, 본관은 여흥(驪興), 호는 만오(晩梧)이다. 1931년부터 8년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의 면장으로 재임하면서 무극교(無極橋)를 가설하여 주민 교통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시장 시설을 현대화하여 거리 질서를 바로잡았다. 그 후 본대리에 간이학교를 유치하여 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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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이창수는 1927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에서 출생하였다. 음성수봉국민학교와 청주중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9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사무소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다. 1962년에 충청북도 음성군청 재무과 경리계장으로 근무하였으며, 1965년에는 음성군청 산업과 양정계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청 내무과 사회계장을 거쳐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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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신일을 시조로 하고 서수인과 서부흥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이천서씨(利川徐氏) 시조 서신일(徐神逸)은 신라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냈다. 국운이 다했음을 예견하고 경기도 이천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살면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후손으로 거란과의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徐熙)[942~998]가 대표적이다.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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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선무를 시조로 하고 채신보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인천채씨(仁川蔡氏)의 시조는 채선무(蔡先茂)이다. 채선무는 고려 때 동지원사(同知院事)를 지내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追贈)되었다. 인천에 정착하여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인천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 시조 채선무의 손자 채보문(蔡寶文)은 고려 의종(毅宗) 때 문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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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사회복지가. 임경재(任慶宰)[1929~1999]는 본관은 풍천(豊川). 호는 춘강(春江)이다. 아버지는 한학자 임주호(任周鎬)이다.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추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쌍정리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1948년 입대하여 복무하는 중에 6·25전쟁이 일어나자, 9·18수복 시 관민 학생의 협조를 얻어 인민군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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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임무재는 1910년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신돈리에서 출생하였다. 1938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장으로 부임하였으며, 맹동면장 재임 중에 음성 지역 발전과 주민들의 복지 증진에 공헌하였다. 그 공로로 음성 지역 주민들의 칭송을 받았으나, 1953년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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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임익재는 1933년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신돈리에서 출생하였다.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충북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으며, 1958년 충청북도 음성군청에서 첫 공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965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면사무소 재무계장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에는 충청북도 음성군청 산업과에 근무하였다. 1967년에는 충청북도 선거관리위원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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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字)는 성첨(聖瞻), 호(號)는 향초(香樵).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덕우(張悳雨)이다. 장동노는 항상 경로정신이 두터워 부친이 생존시에는 술과 고기를 항상 장만하여 드렸고, 이웃 어른과 노인을 정중히 모셔 부친의 뜻을 기쁘게 하여 드렸다.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여서도 자신이 늙어서 몸과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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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이정주(李鼎周)이고, 남편은 장석영(張錫永)의 손자인 장동엽(張東曄)이다. 청주에 거주하는 시부모에게 효성이 극진하였다. 26세 때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세수하지 않고 의복도 갈아입지 않았으며, 머리도 빗지 않고 음식은 죽만 먹었다. 삼년상이 끝난 후 세수하고 의복을 재개하고 머리를 빗고,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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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 호는 포음(圃蔭). 조선개국일등공신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다. 헌종(憲宗) 때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동음리에서 출생하였다. 9세에 부친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할 때, 장지에 관한 송사(訟事)가 발생하자 장상기가 울며 관가에 호소하니 그 정성에 감복하여 장지 쓰는 것이 허가되었다. 장례를 지낼 때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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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단양. 자는 자류(子類), 호는 금리(琴里). 충신 장충범(張忠範)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장택한(張宅漢)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글을 잘 지어 문행(文行)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머니의 병환에 손가락을 끊어서 피를 들게 하여 소생시켰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묘를 하는데 커다란 범 한 마리가 매일같이 찾아와 같이 지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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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말기 장석영의 효자문.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석영(張錫永)은 충신 장충범의 후손으로, 어렸을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기로 근동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면서 간호를 하고, 어머니가 병이 났을 때는 손가락을 잘라 피를 입 안으로 흘려 넣어 낫게 하였다. 이윽고 부모가 죽어 3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는데, 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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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말기 장용묵의 불망비. 장용묵은 충신 장충범의 후손이며, 장석영(張錫永)의 아들이다. 자는 성언(聖言)이며 호는 금범(錦帆),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 어머니가 병을 앓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마시게 하여 삼일을 더 살게 하였다. 흉년이 들어 인근에 기황(饑荒)이 들자 곡식을 풀어 구휼하였다. 장용묵 보폐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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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제용(齊用).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장사길(張思吉)의 후손이며, 동몽교관(童蒙敎官) 장상기(張相基)의 손자이다. 장제천은 어려서부터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어머니를 위하여 항상 맛 좋은 음식을 준비하고 특별한 음식이 생기면 어머니께 제일 먼저 갖다 드렸다. 모친의 병환이 몹시 위중함에 하늘에 빌며 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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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임진왜란 때 활동한 장충범의 신도비. 장충범은 자는 효칙(孝則), 본관은 단양(丹陽)으로, 생원 장언구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군자감주부로서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향리인 삼생리로 피신하여 치료를 받았다. 1597년(선조 30)에 동지를 규합, 창의하여 삼생리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교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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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삼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장충범의 충신문. 본관이 단양(丹陽)인 장충범(張忠範)[?~1597]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주부로 충주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부상당하여 향리인 삼생리에 와서 피신하며 치료하였다. 1597년(선조 30) 동지를 규합, 창의하여 삼생리의 구진터에서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1605년(선조 38)에 선무원종공신녹권을 하사받고, 1857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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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에 살았던 열녀. 본관은 장수. 남편은 장택한(張宅漢)이고, 아들은 장석영(張錫永)이다.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시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마을 뒤에 있던 샘터에서 매일 샘물로 목욕재계하고 3개월 동안 치성을 드리니 시아버지의 병이 완쾌되었다. 1856년(철종 7)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 만동묘(萬東廟)에 효부로 표창되었다. 1858년(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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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장현팔은 1898년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신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915년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서울시 배재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임시토지조사국 사무원급 기술원양성소를 졸업하였으며, 1922년 전라북도 도청에서 공무원을 시작하였다. 그 후 전라북도 임실, 정읍, 고창, 전주 등에서 군속을 하였으며, 만주국 봉천공서, 봉천, 용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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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전재명은 무극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평양기계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경성지방체신국 제일국무출장소 근무를 시작으로 서울에서 활동하였다. 1947년 서울중앙전신국 제2기술과에서 근무하다가 1954년 지방 공무원 전형 시험에 합격하였다. 그 후 음성군으로 내려와 생극면에서 근무하였으며, 1961년에는 원남면에서 근무하였다. 그리고 1962년에 생극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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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열녀. 본관은 광주(廣州). 내사령(內史令) 이자성(李自成)의 후손인 이장회(李章會)의 셋째 딸이다. 전재학(全載學) 처 광주이씨(廣州李氏)는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4세의 어린 나이에 전재학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광주이씨는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자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으나, 남편은 19세에 사망하였다. 이때 나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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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을 시조로 하고 이창완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신라 때 사공(司功)을 지낸 이한(李翰)이다. 태조 이성계의 후손 분파는 일반적으로 99파로 알려져 있으나 미혼으로 죽었거나 후사가 없는 대군(大君)과 군(君)이 20명 정도가 되므로 실제로는 그 수가 줄어든다. 2007년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 등록된 파 종회는 모두 89개이다. 태종의 8세손 동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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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작을 시조로 하고 최우령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시조는 고려 정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완주백(完州伯)에 봉해진 최순작(崔純爵)이다. 시조 최순작의 12세손 최우령(崔禹齡)이 한성에서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로 와 세거하였다. 전주최씨 음성 세거지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이다. 조촌리 덕고개에 3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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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제(公濟).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정국노의 5형제가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마을을 5효촌이라 하였다. 정국노는 원래 집안이 가난하여 스스로 산에서 나물을 캐고 식량을 구하여 백여 리 길을 다니기를 거듭하였다. 새벽마다 아버지께 문안을 올렸는데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유쾌하지 못한 일이 있으면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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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공거(公擧).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셋째 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와 정국추(鄭國樞)가 있으며, 동생으로는 정국노(鄭國櫓)와 정국빈(鄭國彬)이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시묘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마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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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2리에 있는 조선시대 효자 정국량의 묘비. 정국량은 본관이 초계(草溪)이며, 자는 공거(公擧)이다.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侍墓)하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을 갔으나 정국량은 초막(草幕)을 떠나지 않았다. 이를 본 왜적이 정국량의 효성에 감동하여 물침기(勿侵旗)를 주었다. 이로 인하여 임진왜란 때에도 효(孝)를 다할 수 있었다.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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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 있는 조선 중기 정국량의 효자각. 본관이 초계(草溪)인 정국량에게는 정국주, 정국추, 정국노, 정국빈 등의 형제가 있었다. 모두 효성이 뛰어나 마을 사람들은 이들을 오효자라고 불렸으나 그중 정국량의 효성이 단연 돋보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 정국량의 부친이 오랜 질병 끝에 돌아가셨는데, 마침 장례도 치르지 못한 상황에서 왜병이 마을로 쳐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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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공간(公幹).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막내아들로, 형으로는 정국주(鄭國柱),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가 있다. 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상평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천성이 효성스럽고 인품이 맑고 높았다. 활쏘기와 말타기 등 무예가 출중하여 무과에 합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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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충신이자 효자. 예로부터 효자 가문에서 충신이 난다고 하였으니, 정국주는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충성을 바쳤으므로 그 효와 충이 아울러 장하다고 칭송을 받았다. 본관은 초계. 정창(鄭昌)의 5세손으로,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그의 맏아들로, 동생으로는 정국추(鄭國樞),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 정국빈(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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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공두(公斗). 정창(鄭昌)의 5대손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정윤공(鄭輪公)이다. 5형제 중 둘째로 형이 정국주(鄭國柱)이며, 동생으로는 정국량(鄭國樑), 정국노(鄭國櫓), 정국빈(鄭國彬)이 있다. 정국추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형과 아우들에게 우애와 정이 두터워 화목하였고, 충성과 의리 또한 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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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명여(命汝), 호는 일옥(一玉). 홍문공 정배걸(鄭倍傑)의 29세손이며 교리 정창(鄭昌)의 15세손이다. 아버지는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 어머니는 안동김씨이며, 부인은 양천허씨이다. 아들은 효자로 이름난 정인상(鄭寅尙)이다. 정규영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서울에서 지내던 중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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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정규영의 효자비. 정규영의 호는 일옥(一玉)으로, 죽계(竹溪) 정창(鄭昌)의 후손이며 감역(監役) 정효선(鄭孝善)의 아들이다. 자는 명여(命汝)이며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일찍이 서울로 올라왔다가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이 일어난 뒤에 고향으로 내려와 부모를 봉양하였다. 모친의 사후 3년 동안 상복을 벗지 않았고, 부친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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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회당 윤응선(尹膺善) 문하에서 배웠다. 약관의 나이에 사서육경을 통독하고 제자백가에도 통달하였다. 박세화·윤응선·신현국 세 사람의 문집 간행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또 효행이 지극하여 10년 동안이나 늙은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내고 세수를 시키며 망건을 씌워 드리는 등 봉양을 하루같이 실천하였고, 상을 당하여 6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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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2년 2월 3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서 출생하였으며, 행정 공무원으로 평생을 살다가 1991년 8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정동헌은 음성군 무극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0년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면 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행정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음성군 원남면 재무담당과 호병계장을 거쳤으며, 음성군 금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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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정범구는 1916년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주로 충청북도의 북부 지역에서 행정가로 활동하였다. 1977년에 60세로 별세하였다. 정범구는 음성군 대소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충청북도 읍·면 이원(吏員)강습소를 수료하였다. 1936년 9월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행정 공무원으로서의 삶을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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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정석오의 묘비. 정석오는 자는 수호(收好)이며,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15년(숙종 41)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문학, 부수찬, 교리 등을 지냈다. 1721년(경종 1) 지평으로 김일경(金一鏡)과 함께 노론 사대신을 논척(論斥)하여 유배케 했으나, 1725년(영조 1) 소론의 실각으로 파직되었다. 1721년(영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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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마산리에 있는 조선 후기 문신 정양순의 묘비. 정양순은 좌의정 정석오(鄭錫五)의 아들이다. 자는 성공(聖功)이라 하다가 후에 회숙(晦淑)으로 고쳤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1745년(영조 21)에 음보(蔭補)로 돈령부참봉(敦寧府參奉),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지내고 1750년(영조 26)에 광흥창수(廣興倉守)가 되었다. 세자우익위(世子右翊衛), 군위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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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양덕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정운영의 효자각. 본관이 초계인 정운영은 일찍부터 공부를 많이 하여 학문이 깊었으나 과거를 보아 출사를 하게 되면 부모님을 봉양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오직 부모님께 효도하기 위하여 과거를 보지 않았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았다. 그러던 중 잉어가 특효약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겨울이라 잉어를 쉽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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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18년 1월 1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에서 출생하였으며, 2001년 5월 2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우리나라 광업과 관련한 주요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며, 대한광산학회, 대한광산지질학회 등에서 연구 활동을 하였다. 정인복은 청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만주 신경국립공업대학 채광공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해방 전에는 미쓰이광산주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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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초계. 자는 주노(周老), 호는 위은(渭隱). 아버지는 효자 정규영(鄭圭永)이고,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부인은 효부로 이름난 현풍곽씨이다. 1906년(고종 43) 현풍곽씨와 혼인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었던 정인상은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부모에게 드렸으며,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문안을 하였다. 8대에 걸친 조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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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곽대용(郭大鎔)의 딸로,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효심이 깊고 우애가 돈독하였다. 1906년(고종 43) 정인상(鄭寅尙)과 혼인하였다. 시부모를 섬김에 극진히 하였는데, 시아버지인 정규영(鄭圭永)이 일찍부터 약주를 좋아하니 넉넉지 않은 집안 살림에도 하루에 세 번씩 약주를 대접하였다. 흉년이 들어 술을 빚을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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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조선시대 정인상의 효자비. 정인상의 본관은 초계(草溪)이며, 호는 위은(渭隱)이다. 어려서부터 효심이 극진하였다. 정인상은 새로운 음식이 생기면 먼저 어른에게 드렸고 아침, 저녁에는 반드시 문안을 올리는 등의 효행을 하였다. 8대에 걸친 조상의 묘소를 치산하고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후진 양성을 위하여 일옥도장을 세우고 후세를 교육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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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42년 8월 25일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내송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성군청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음성 지역 발전을 위해 일하다가 2005년 11월 16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정인칠은 청주중학교, 세광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68년 음성군 금왕읍에서 행정 공무원으로 근무를 시작하였다. 음성군청 내무과, 새마을과, 문화공보실에서 근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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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유림지도자. 위은(渭隱) 정인상(鄭寅尙)의 맏아들로 자는 성윤(聖倫), 호는 구봉(九奉)이다. 정조헌은 재주가 뛰어나고 영특하여 3세 때 천자문(千字文)을 통달하고 20세까지 도장제(道莊齊)에서 한학(漢學)을 깊이 연구하였다. 그 후 가사에 종사하면서 마을 이장직을 23년간 맡아 주민복지에 헌신하였으며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30여 년 동안 연말마다 전국 수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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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 음성향교 앞에 있는 유학자 정조헌(鄭祖憲)을 기리는 비. 음성향교 전교(典校)였던 정조헌(鄭祖憲)의 본관은 초계이며, 자는 성륜(聖倫)이고, 호는 구봉(九峯)이다. 시조 광유후(光儒候)의 31세손이고 효자 위은 정인상(鄭寅尙)의 아들로, 어머니는 효부 현풍곽씨이다. 정조헌은 평생 윤리와 도덕을 몸소 실천하고 유도(儒道) 진흥에 심신을 바쳤다.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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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나주. 아버지는 교리 정수곤(丁壽崑)이다. 형으로 정담(丁聃)이 있다. 1510년(중종 5)에 생원시에 급제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산봉(山峰)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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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음성현감 정현석의 선정비. 정현석은 철종 대의 음성현감이었으며,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비문으로 보아 음성현감 재직 때 선정을 베풀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정비는 1860년(철종 11)에 세워졌고, 현재 음성향교 앞에 다른 비석군들과 함께 있다. 총 높이는 129㎝이며 비신과 개석 2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碑身)은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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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 본관은 초계. 자는 향숙(饗叔). 아버지는 호조참의를 역임한 효자 정국노(鄭國櫓)이다. 조선 선조 때에 태릉참봉을 지내고, 봉사(奉事), 찰방(察訪), 부호군(副護軍)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만년에 고향으로 내려와 김정현, 조옥 등과 함께 향산의 고사(중국 당나라의 향산거사 백낙천의 향산구로회)를 본받아 칠십회(七十會)를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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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조동환의 비. 조동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정암(靜岩)이며, 본관은 풍양(豊壤)이다. 음성읍 평곡리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다.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趙大妃)와 혈연 관계가 있어, 1910년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에 기용되었고 강원도 춘천재무소 주사가 되었다. 1928년부터 2년간 음성면장을 지냈고,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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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의학 박사이자 해군 장교. 조성두는 1949년 서울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51년 해군에 지원·입대하여 종군하다가 1954년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진해(鎭海) 해군병원에서 근무하였고, 1967년 「폐 침수시의 심장 박출량과 혈압의 변동」이라는 논문을 제출하여 서울대학교로부터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1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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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 있는 조선 후기 효자 조용하와 열녀 평택임씨의 효열각. 본관이 순창인 조용하와 처 평택임씨는 아버지가 병환으로 의식이 불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의식을 돌아오게 하였다. 그후 언젠가는 조용하가 병이 들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자 부인 임씨가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 넣어 병을 낫게 하였다. 이와 같은 효행과 효열이 세상에 알려지자 고종 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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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본관은 한양. 자는 탁이(卓爾), 호는 삼외옹(三畏翁). 아버지는 조변(趙卞)이다. 1605년(선조 38)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 가평(가래들)에서 출생하였다. 황실해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성품이 온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버지가 병석에 눕자 향을 피우고 아버지 대신 죽기를 하늘에 빌었으며, 대변을 맛보아 가며 아버지를 정성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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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중기 조유안의 효자문. 조유안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을 극진하게 모셔 근동에서는 하늘이 내린 효자라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어느 해 아버지가 병이 나자 향을 피우고 하늘에 아버지 대신 죽기를 빌면서, 아버지의 변을 손에 받아 맛을 보면서 병을 간호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이 차도를 보이지 않자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여서 소생시켰다. 그러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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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1년 10월 17일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충도리에서 출생하였다. 행정 공무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특히 토목 건설 사업 부분에서 역량을 발휘하였다. 2006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조태철은 음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실천상업학교를 수료하였다. 1943년 충청북도 중원군 노은면 면사무소 근무를 시작으로, 1948년에는 음성군 소이면 면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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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조형의 묘비. 조형(趙珩)은 승지 조희보(趙希輔)의 아들로, 자가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며 본관은 풍양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부교리, 응교, 부수찬을 역임하였다. 1650년(효종 1)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사은사(謝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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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생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조형의 신도비. 조형은 자가 군헌(君獻)이고 호는 취병(翠屛)이다. 1603년(선조 36)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 되었고, 1643년(인조 21)에 부교리를 역임했다. 1650년(효종 1) 춘추관수찬관(春秋館修撰官)으로 『인조실록(仁祖實錄)』의 편찬에 참여했고,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통신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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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서원. 지천서원(知川書院)의 시초는 조선 중종 때 이조참판을 지낸 김세필(金世弼)[1473~1533]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 팔성산 아래에 지은 초옥으로, 김세필은 이곳에서 산수를 벗삼아 여생을 보내며 후학을 교육하였다고 한다. 초옥은 당시 충주목사 박상(朴祥)의 재정적 도움으로 건립되었는데, 박상은 자주 김세필을 찾아와 격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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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팔성리 지천서원 입구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하마비는 그 앞에서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주로 관아(官衙), 향교(鄕校), 서원(書院), 사우(祠宇) 등의 입구나 능묘(陵墓) 앞에 세워 경의(敬意)를 표하게 하였다. 음성군에는 지천서원(知川書院), 음성향교(陰城鄕校), 운곡서원(雲谷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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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姜以式)을 시조로 하고 강시양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진주강씨(晋州姜氏)는 시조를 고구려의 무장 강이식으로, 본관을 진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강계용(姜啓庸)을 파조(派祖)로 하는 박사공파(博士公派), 강위용(姜渭庸)을 파조로 하는 소감공파(少監公派), 강원로(姜元老)를 파조로 하는 관서공파(關西公波), 강민첨(姜民瞻)을 파조로 하는 은열공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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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에 충청북도 음성군 삼성면 용성리에 세워졌던 진주정씨의 열녀 정문. 진주정씨는 삼성면 용성리 출신인 권종원의 처로 시부모님을 극진히 봉양하여 근동의 칭송이 자자하였는데, 남편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일부종사할 목적으로 자결하였다. 이를 조정에서 알고 조선 말기인 고종 연간에 용성리에 열녀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현재는 현판만 후손의 집에 남아 있을 뿐 흔적을 찾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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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순공을 시조로 하고 송저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진천송씨(鎭川宋氏)는 당나라 호부상서(戶部尙書) 송주은(宋柱殷)의 7세손 송순공(松荀恭)의 후손으로 전하나 계대(繼代)가 불명하여 고려 때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낸 송인(宋仁)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1125년(인조 3)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두촌리에서 출생한 송인은 여러 관직을 두루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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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희를 시조로 하고 임광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진천임씨(鎭川林氏)의 시조 임희(林曦)는 고려 혜종의 비(妃)인 의화왕후(義和王后)의 아버지로, 벼슬이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오르고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상산백(象山伯)에 봉해졌다. 가문의 인물로 임간은 우문관대제학(右文官大提學)과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으며, 임희정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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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동일 본관의 가구가 다수를 이루는 마을. 집성촌은 동족 마을이라고도 부르며 동성 동족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집성촌은 동일 조상에 대한 제향, 마을의 대동계, 문중의 크고 작은 일 등을 공동으로 하고 있는 사회·경제적 공동체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는 마을이다. 음성 지역의 집성촌은 한 종족이 어느 한 마을에서 계속해 여러 대에 걸쳐서 살아온 경우와, 여러 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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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보를 시조로 하고 성진헌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창녕성씨(昌寧成氏)는 고려 때에 호장중윤(戶長中尹)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고 있다. 성인보의 손자 성공필과 성한필 대에서 크게 두 계통으로 갈라지고, 6세대에 내려와 성기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성인보의 13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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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인천. 자는 영이(詠而), 호는 우담(雩潭). 아버지는 채유종이다.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서 출생하였다. 경사백가에 통달하고, 특히 역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지리·의학·복서·음율 등에 밝았다. 1630년(인조 8) 천문을 관측해 보고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고향인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 물언덕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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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채신보의 묘갈. 채신보는 자가 자휴(子休), 호는 만계(灣溪)이며, 본관은 인천으로, 사예 채륜(蔡倫)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음성현감을 지냈다. 이후 경산현감(慶山縣監), 평해군수(平海郡守), 남양도호부사(南陽都護府使)를 거쳤다. 1484년(성종 15)에 원남면 삼용리 물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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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삼용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채신보의 신도비. 채신보는 자가 자휴(子休), 호는 만계(灣溪)이며, 본관은 인천으로, 사예(司藝) 채륜(蔡倫)의 아들이다.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었고, 1458년(세조 4)에 음성현감 및 경산현감, 평해군수, 남양도호부사를 지냈다. 1484년(성종 15)에 원남면 삼용리 물언덕에 소산정사(梳山精舍)를 짓고 여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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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말로를 시조로 하고 고덕수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938년(태조 21) 탐라국의 태자 고말로(高末老)로 고려에 입조하여 성주왕자(星州王子)로 봉해졌으며 고씨의 중시조(中始祖)로서 청주고씨(淸州高氏)의 1세이다. 고려조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을 배출하면서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고씨대동보상당군파편』에 의하면, 2세인 고강은 문종 때 병부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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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유를 시조로 하고 김구성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 김대유(金大猷)는 경순왕의 손자 김정구(金正矩)의 16세손으로, 고려 말에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고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이름난 후손으로는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왕도 정치를 펴려다 해를 입은 성리학자 김식(金湜), 효종 때 영의정(領議政) 김육(金堉)과 유명한 청백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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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배걸을 시조로 하고 정중원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초계정씨(草溪鄭氏) 시조는 정배걸(鄭倍傑)로 초계산성에 살았다. 1017년(현종 8) 문과에 장원하였으며 문종 때 예부상서(禮部尙書) 중추사(中樞使)에 이르렀다. 아들 정문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 태자빈객(刑部尙書政堂文學兼太子賓客)이 되었으며, 죽은 뒤 좌복야 참지정사(特進左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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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선비. 본관은 충주. 강원도관찰사 최개국(崔蓋國)의 종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최인정(崔仁禎), 아버지는 최배(崔㠔)이다. 최개국이 을사사화를 입어 삭탈 관직되자 이에 연루된 조부 최인정, 부친 최배는 충주에서 쫓겨 청안으로 피신하여 살았다. 최기오가 나이 들어 1690년(숙종 16)에 다시 충주로 가던 도중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평곡리 토계울에 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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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9년 11월 12일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읍내리에서 출생하였다. 행정 공무원으로 음성군의 지역 발전을 위해 헌신하다가 2006년 11월 5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최돈식은 1948년 보병 제7연대에 입대하여 육군본부 제12경비대대에서 근무하였다. 1952년 6·25전쟁 당시 평창지구 전투에서 무공을 세워 훈장을 받았으며, 1958년에 육군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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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때 효자 최세면을 기리는 비. 최세면은 최기선의 아들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양친이 세상을 떠나자 시묘살이를 하였고, 부모 생존시 제대로 봉양하지 못했다며 좋은 음식과 좋은 옷을 먹지도 입지도 않았다. 효행비는 총 높이가 247㎝이고,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경우 높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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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에서 활동한 농민운동가. 1921년 충청북도 제천군 한수면에서 출생하였으며, 음성군의 농민과 농업 발전을 위한 운동에 힘쓰다가 1989년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최운성은 1935년 한수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에는 서울 소화공과학교 기계과를 졸업하였다. 1943년에 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으로 이주하였다. 근대화된 영농 방법의 연구와 도입을 통하여 보리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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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자. 죽정(竹亭) 선생의 후손으로 부인은 남원양씨(南原梁氏)이다. 1813년(순조 13) 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1826년(순조 26)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수혈하니 마을 사람들이 효자라 칭송하였다. 1839년(헌종 5) 남원양씨와 혼인하였는데, 부인 또한 효부로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눕자 부인 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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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최창옥은 1918년에 충청북도 잠업강습소를 수료하였고, 1920년 음성군농회 근무를 시작으로 1934년 음성면장에 임명되어 고향 발전을 위한 지방 행정 추진에 전력을 다하였다. 1956년 제3대 음성읍장으로 재직하다가 1959년 퇴임하였으며, 1971년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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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문신. 본관은 전주. 자는 경렬(景烈), 호는 소성(小醒). 아버지는 효자 최재기(崔在沂)이다. 1852년(철종 3) 10월 16일에 창경궁 춘당대에서 열린 생원시에서 장원을 하여 철종의 찬사를 받았다. 입격한 시부(試賦)가 남아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 매봉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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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1929년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조촌리에서 출생하였다. 최헌옥은 청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52년 청주사방관리소를 시작으로 임농행정(林農行政)에 몸담아 오다가 1973년에 음성군청 산림과장으로 부임하였다. 1979년 중원군청 산림과장으로 근무하였고, 1979년 말 다시 음성군청 산림과장으로 근무하면서 향토산림행정(鄕土山林行政)에 많은 공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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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행정가. 최형수는 청주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제의 문화 말살 정책이 펼쳐지던 시기에 중국에서 생활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이한 후, 귀국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법무부에서 근무하였다. 이후 시설과장을 거쳐 서울교도소장, 안양교도소장 등을 역임하였다. 1992년 2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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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최홍걸의 시혜비. 최홍걸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본관은 전주이고, 호는 소파(小婆)이다. 시문(詩文)이 청아하고 의사(意思)가 초연하였다고 전한다. 비신(碑身)의 높이는 112㎝, 앞면의 폭은 35㎝, 측면의 두께는 12㎝이다. 비석 앞면에는 ‘소파거사최홍걸시혜불망비(少坡居士崔弘杰施惠不忘碑)’라고 쓰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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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음성읍 용산리에 있는 조선 말기 순국 열사 박세화를 기리는 사당. 본관이 밀양인 박세화(朴世和)[1834~1910]는 1895년(고종 32) 일본 낭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살해되자 분개하여 도사 윤응선(尹膺善)과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나 체포되었다. 그후 석방되어 음성읍 동음리 등지에서 학문에 전념하며 찾아오는 문도(門徒)들을 가르치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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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유촌리에 있는 조선 전기 문신 조인옥(趙仁沃)의 사우. 조인옥은 본관이 한양이며, 자가 군계(君啓)로,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돈의 아들이다. 1373년(공민왕 22)에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고, 1387년(우왕 13)에는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를 거쳐 이듬해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구세력 숙청에 가담하였다. 정도전 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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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을 시조로 하고 지백련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충주지씨(忠州池氏)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 홍농(弘農) 사람으로, 960년(광종 11)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다가 정착하였으며 벼슬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다. 그 후손이 본관을 충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인물로는 공민왕 때 홍건적을 물리쳐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오른 지용수(池龍壽)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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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을 시조로 하고 최기오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 최승(崔陞)은 본래 당나라 무장으로 846년(문성왕 8) 신라에 기근이 들어 도둑무리가 창궐하자 무종(武宗)의 명으로 병마사(兵馬使)가 되어 이를 토벌하였고, 889년(진성여왕 3) 신라에서 원종(元宗)·애노(哀奴)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여 은자광록대부(銀紫光祿大夫)에 올랐고 그 후 예성(蘂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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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형명을 시조로 하고 염주관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파주염씨(坡州廉氏)는 중국 교목 세가의 후손 염형명(廉邢明)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후당(後唐)의 정국이 어지러지자 신라에 들어와 대사도(大司徒)를 지냈다. 그의 5세손 염한은 문종 때 북쪽에서 침범한 동번족을 물리치는 데 공을 세워 병부상서(兵部尙書) 상주국(上柱國; 고려 때 공을 세운 정2품관에게 주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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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숭겸을 시조로 하고 신항구를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평산신씨(平山申氏) 시조는 신숭겸(申崇謙)이다. 918년(태조 1) 궁예를 폐하고 왕건을 추대하여 고려가 창업하는데 공을 세워 고려 개국원훈(開國元勳)으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927년(태조 10) 공산(公山)에서 벌어진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왕건을 대신하여 전사하여 장절공(壯節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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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을 시조로 하고 이사온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이광(李匡)은 고려 명종 때 태사(太師)를 역임하고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올라 백오군(白烏君)[백오는 평창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이광의 8세손 이천기(李天驥)가 고려 말에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역임한 후 고려가 망하자 아들 이륙·이갈·이과 삼형제를 데리고 장단으로 내려가 절의를 지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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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만승을 시조로 하고 심한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풍산심씨의 시조는 심만승(沈滿升)이다. 중국 절강성 출신으로 1110년(예종 5) 호종차(胡宗且)·유재(劉載)·안신지(安愼之) 등과 함께 고려에 들어와 상서봉어(尙書奉御)를 지내고 풍산현에 정착하였다. 심만승의 8세손 심승경이 고려 말에 상호군(上護軍)을 지냈고 심만승의 아들 심구령이 1398년(태조 1) 1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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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온을 시조로 하고 임후곤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풍천임씨(豊川任氏)의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사람으로, 고려에 들어와 황해도 풍천에 살았다. 후손들도 시조의 6세손 임주에 이르기까지 풍천에 살았다. 고려 충렬왕 때 안찰사(按察使)를 지낸 임주의 아들 임자송·임자순 대에서 백파와 중파로 나뉘었다. 조선조에 문과 급제자 144명을 배출하였으며 선조 이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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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덕정리에 있는 조선 말기 효자이며 애국지사인 하석환을 기리는 비. 하석환(河碩煥)은 하재철(河載鐵)의 아들로, 자는 광국(光國)이며 호는 일재(一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부모를 잘 봉양하였으며 1905년(고종 42)에 부친이 죽자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모친이 죽었을 때는 6년간 시묘를 살았다. 이때 큰 호랑이가 와서 지켜준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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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수를 시조로 하고 조경과 조도흥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한양조씨(漢陽趙氏)의 시조는 고려 때 첨의중서사인(僉議中書舍人)을 지낸 조지수(趙之壽)이다. 한양조씨 가문에서는 조선 개국공신이 2명이 배출되었는데,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낸 조인옥(趙仁沃)과 태종 때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조온(趙溫)이다. 조인옥의 후손인 조경(趙經)이 임진왜란 후 음성군 금왕읍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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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효부. 본관은 동래. 아버지는 정형조(鄭亨朝)이다. 일찍이 남편이 죽고 반나절을 기절하였으나 시부모가 살아 있음을 알고 일어나 효를 다하였다. 시부모가 죽은 뒤 장례를 마치고는 “내 할 일을 다 하였으니 살아서 무엇 하랴, 지아비를 따라가겠노라.”하고 탄식하며 죽으니 동리에서 효부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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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감곡면 사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 문신 한이원의 묘비. 한이원은 한치상(韓致相)의 아들로 자는 숙기(叔起),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1675년(숙종 1)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이후 감찰이 되었다. 1692년(숙종 18)에는 결성현감을 지낸 후 전적을 역임하였다. 1715년(숙종 41) 『가례원류(家禮源流)』 사건으로 소론인 교리 송성명(宋成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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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온을 시조로 하고 최유창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시조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널리 알려진 최충(崔沖)의 아버지 최온(崔溫)이다. 여러 벼슬을 거친 후 해주의 수양산 아래에서 세거하였다. 이에 후손들이 본관을 해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후손 중 대표적 인물은 유학의 비조인 최충, 최충의 아들 최유선(崔惟善)과 최유길(崔惟吉)이 있고, 『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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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을 시조로 하고 곽영을 입향조로 하는 충청북도 음성군 세거 성씨. 현풍곽씨(玄風郭氏)는 중국 관서 홍농 사람인 곽경(郭鏡)을 시조로 하고 있다. 곽경은 송나라에서 문연각(文淵閣) 한학사(翰學士)가 되었고, 1133년(인종 11) 일곱 명의 학사들과 함께 고려에 왔다. 1138년(인종 16)에 등과하여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냈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라 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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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에 있는 현풍곽씨의 효열 행적을 기리는 비. 1969년 성균관 유림에서 추천하여 정인상의 아들인 정조헌이 1978년 건립한 비각인 상모각(常慕閣) 안에 시아버지인 효자 정일옥의 효자비, 정규영 효자비, 남편인 정인상 효자비와 함께 놓여 있다. 비 앞면에는 ‘효부유인현풍곽씨기적비(孝婦孺人玄風郭氏紀蹟碑)’라고 쓰여 있다. 현풍곽씨의 효열 사실은 『한국효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