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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180
한자 月谷里-農所面-
영어음역 Wolgok-ri[Nongso-myeon]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6.15㎢
가구수 423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929명(남자 471명, 여자 458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에 속하는 법정리.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농소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밤실·용시·남곡·못골이 통합되어 김천군 농소면 월곡동이 되었고, 1949년 금릉군 농소면 월곡동으로 개칭하였다. 1971년 월곡1동·월곡2동·월곡3동·월곡4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월곡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농소면 월곡리가 되었다.

[현황]

월곡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6.1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423세대에 929명(남자 471명, 여자 45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월곡1리·월곡2리·월곡3리·월곡4리 네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김해 김씨·밀양 박씨·경주 이씨 집성촌이다. 옛날에는 마을 뒷산인 소대산을 중심으로 밤나무가 많아 밤 산지로 유명했으며 지금은 벼농사와 자두를 주로 경작한다. 마을 앞들은 1964년 최초로 경지 정리를 할 때 군 공병 장비들이 마을에 상주하며 공사를 펼쳐 전국적으로 눈길을 모았던 곳으로 지금은 국도 4호선이 들 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다.

자연 마을로는 밤실·용시·남곡·못골 등이 있다. 밤실은 국도 4호선 옆 소대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마을을 개척할 당시 마을 뒷산인 소대산에 야생 밤나무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달리 ‘밤 율(栗)’자를 써서 율곡이라고도 한다. 1510년 밀양 박씨 규정공파(糾正公派) 22세손 박선호(朴善好)가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이주해 와 소대산 아래[지금의 박위태 소유의 자두밭 일대]에 정착한 이래 대대로 밀양 박씨가 집성을 이루었고, 1720년 개령면 황계리에서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 22세손 김종기(金鍾虁)가 이주해 오면서 김해 김씨도 집성을 이루게 되었다.

1936년 수해 때 율곡천이 범람하여 원래 마을인 윗밤실이 유실되어 지금의 아랫밤실로 집단 이주하였다. 이때 윗밤실에 살던 박희중(朴喜重)이 지금의 농소면사무소 자리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이 새로 형성되었는데, 작은 냇가를 넘어가 살았다 하여 월천동(越川洞)이라 하였다. 이후 점차 두 마을 사이에 집이 들어서면서 밤실로 한마을이 되었다.

마을 앞으로 용시를 지나 신촌리에 이르기까지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는데 1964년 전국에서 최초로 경지 정리를 실시한 곳으로 준공식 때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마을 뒤의 소대산은 옛날 입석의 김해 김씨 집안에서 키우던 암소가 사라져 산 정상에서 송아지를 낳았다 하여 길지로 이름이 났었다.

용시는 밤실에서 국도를 건너 아포 방면으로 따라가다 삼태봉(三台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1906년까지 농소면사무소가 있었을 만큼 농소면의 중심 마을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참가하여 공을 세운 경주 이씨 이정용(李正用)이 1629년(인종 7) 낙향한 이래 대대로 경주 이씨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예부터 마을 일대 농경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되었으므로 농소(農所)라 한 것이 음이 변하여 용시가 되었다. 현재 농소면이라는 지명도 농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마을 뒷산 삼태봉이 용(龍)의 형상이어서 용이 머무는 곳, 즉 용소(龍所)라 했는데 음이 변하여 용시가 되었다고도 한다.

마을 주민 대부분은 후자인 용과의 관련성을 믿고 있으며, 삼태봉을 용으로 여겨 무단 벌채나 시신 매장, 토사 채취 등 원형을 훼손하는 일체의 행동을 주민 동의 없이 할 수 없다는 불문율이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다. 1930년 마을의 모든 주민이 동원되어 청룡끝이라 불리는 용의 꼬리에 해당하는 지점에 토성을 쌓고 나무를 심어 북풍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고 마을 기운이 흩어지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때 쌓은 토성 흔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고, 지난날 도로 공사 때 일부가 훼손된 것을 아직도 안타까워할 만큼 주민 모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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