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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52
한자 江曲里
영어음역 Ganggok-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순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10.85㎢
가구수 201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469명(남자 230명, 여자 239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강평(江平)의 ‘강(江)’자와 구곡(九曲)의 ‘곡(曲)’자를 따서 강곡(江曲)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구곡·월곡(月谷)·강평이 통합되어 김천군 조마면 강곡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조마면 강곡동이 되었고, 1962년 강곡1동·강곡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강곡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조마면 강곡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감천 지류인 강곡천을 따라 넓게 자리 잡은 마을로 불두산가재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강곡천에는 빗내바위가 있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들 때문에 마을이 수해를 입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수직으로 내려오던 냇물이 마을 앞을 가로막고 빗장처럼 튀어나온 이 바위에 부딪혀 물살이 비켜 흐르게 되어 마을이 해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을 입구에서 강곡천을 건너 산 아래에 있는 메기바위는 남녀가 교접을 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마을에서 신성시하며 기우제를 지내 왔다.

[현황]

강곡리조마면 소재지로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10.85㎢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01세대에 469명(남자 230명, 여자 239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강곡1리·강곡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선산 김씨진양 강씨 집성촌이다. 진양 강씨의 김천 입향은 김천도찰방을 지낸 14세손 강부(姜符)의 손자 남와(南窩) 강설(姜渫)[1583~1651]이 구성의 명문가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명성을 떨치고 지례현감을 지낸 감호(鑑湖) 여대로(呂大老)[1552~1619]의 사위가 된 사연과 무관하지 않다.

강설은 충청남도 회덕 태생으로 당시 영남 남인학파를 이끌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는 사람을 누되게 한다.”라며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1628년(인조 6) 처가가 있는 구성으로 낙향했다. 낙향한 강설은 전쟁 때 불탄 김산향교 중건을 위해 힘을 기울였고, 강설의 유훈을 받든 아들 강여구(姜汝榘)강여호(姜汝㦿) 대에 이르러 김산향교의 면모를 일신해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 부자의 문덕(文德)을 추앙하던 안동 병산서원장 이제(李鑇)를 비롯한 영남 유림 555인의 발의로 1804년 마을에 서원을 세우니 이것이 바로 자동서원(紫東書院)이다.

자연 마을로는 구곡·월곡·강평 등이 있다. 구곡은 개령면 남전리와 함께 선산 김씨 농암공파(籠岩公派) 집성촌이다. 조선 헌종 때 김희택(金希澤)이 선산에서 입향한 이래 대대로 집성을 이루어 세거해 왔다. 처음 마을을 세울 때 아홉 굽이의 산모퉁이를 돌고 돌아 자리를 잡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달리 마을 앞 감천이 비단을 펼쳐 놓은 듯 아름다워 금단(錦丹)이라고도 한다.

월곡은 구곡과 이웃한 마을로 1936년 수해 때 인근 장암이 큰 수해를 입자 주민들이 이전해 새로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 앞 감천에 비친 달이 아름답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월’이 ‘엉거’로 변해 엉거실 또는 얼거실이라고도 한다.

주민들 사이에는 선산 김씨 일가가 집성을 이루게 된 사연과 관련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원래 마을에 터를 잡고 있던 모씨가 시주 온 승려를 박대하자 서운하게 생각한 승려가 꾀를 내어 가문의 번성을 핑계로 명당에 자리 잡고 있는 조상의 묘소를 이장할 것을 권하였다. 이 말을 곧이들은 모씨가 승려의 말대로 묘소를 파 보았더니 연기가 피어오르면서 학이 솟아올랐고 이후부터 집안이 쇠락하여 다른 곳으로 흩어지고 뒤늦게 들어온 선산 김씨가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 가마골에는 김취성(金就成)을 배향한 선산 김씨 재실인 경락당(景樂堂)이 있다.

강평은 동남쪽 염속산과 남쪽 매봉산 사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의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한양 조씨 일가가 정착해 마을을 이루었고 1761년(영조 37) 진양 강씨 찰방공파(察訪公派) 강이화(姜履和)구성면 광명리 기를[기로동(耆老洞)]에서 이거한 이래 진양 강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예부터 강곡천 변의 들판이 기름지고 넓어 ‘시내 강(江)’자와 ‘평평할 평(坪)’자를 써서 붙인 이름이다. 달리 강바대라고도 하는데 그 내력은 알 수 없다. 다만 호은공(湖隱公)이 남긴 문집 등에 강해촌(江海村)이라고 기록된 점 등으로 미루어 마을의 들이 바다처럼 넓어 강바다라 한 것이 강바대로 변음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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