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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97
한자 蓮花里
영어음역 Yeonhwa-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순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9.97㎢
가구수 94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191명(남자 93명, 여자 98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옛날 마을 앞 연못에 연꽃이 만발해 붙인 이름이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지례군 상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여내실·소태실이 통합되어 김천군 대덕면 연화리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대덕면 연화리로 개칭되었고, 1960년 연화1리·연화2리로 나누어졌다. 1995년 김천시 대덕면 연화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마을 앞에서 덕산천과 감주천이 합류하여 동쪽으로 흐르고, 하천 양쪽으로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현황]

연화리대덕면 소재지인 관기리에서 약 3㎞ 떨어져 있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9.97㎢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94세대에 191명(남자 93명, 여자 98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관기리, 남쪽으로 외감리, 북쪽으로 조룡리와 이웃하고 있다. 연화1리·연화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임진왜란 때 상주판관을 지내다 전사한 쌍호(雙湖) 장홍한(張鴻翰)의 처(妻) 연안 이씨가 어린 아들 장귀동(張貴東)과 함께 정착한 이래 대대로 인동 장씨 판관공파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산악 지대임에도 비교적 들이 넓어 벼농사를 많이 짓고 최근에는 양파를 많이 재배한다. 문화 유적으로 인동 장씨 문중에서 세운 정자인 쌍호정(雙湖亭), 쌍호 장선생 유허비(雙湖張先生遺墟碑), 장홍한을 배향한 재실인 충의사(忠義祠)가 있다. 충의사는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에서 5년간 목재를 소와 지게로 옮긴 끝에 건립했다는 일화로도 유명하다.

자연 마을로는 여내실[일명 연화실, 연화] 소태실[일명 소태] 등이 있다. 소태실은 임진왜란 때 안동 김씨 김응보(金應宝)가 피난 와서 정착한 이래 형성된 마을이다. 조선 시대 왕자의 태(胎)를 마을 굴밧골 뒷산에 안치하고 마을 이름을 태실(胎室), 태를 묻은 산을 태봉산(胎封山)이라 하였다가 뒤에 왕자의 태를 다른 곳으로 옮기자 ‘예전의 태실’이라는 뜻에서 소태실(小胎室)이라 했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한자 표기가 바뀌어 소태(小台)가 되었다. 태봉산은 삼각 형태로 우뚝 솟아 한눈에 보기에도 비범한 산임을 직감할 수 있었는데 어떤 사유로 태실이 이안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태봉산으로 오르는 길 오른쪽 산지당골에는 옛날 이 마을에 살던 강필수라는 총각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었으나 지난 2002년 수해 때 유실되었다. 강필수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도 위풍당당하여 지체 높은 양반이 말을 타고 거만스럽게 지나가다가도 강필수 앞에서는 말이 제자리걸음을 했다고 한다.

원래 마을 중앙에 있던 신당을 지금의 산지당골로 옮긴 후 이를 주도한 마을 주민에게 흉사가 끊이지 않았다고도 하고, 매년 정월 초이튿날 제를 올릴 때 제수로 사용할 곡식을 밖에 내어 두어도 들짐승이며 날짐승이 가까이 오지 않는다는 등의 기이한 일들이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6·25전쟁 와중에도 마을이 무탈할 수 있었던 것도 이 신당에 모신 강필수 총각이 마을을 지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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