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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 시위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27
한자 龍頭洞示威運動
영어음역 Yongdu-dong Siwi UndongUndong
영어의미역 Yongdu-dong Demonstration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919년 3월 24일연표보기
종결 1919년 4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용두동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용두동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인수|김윤상|최응수|김영훈|조일영

[정의]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용두동에서 벌어진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상북도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24일 밤 11시 김천군 용두동[현 김천시 용두동]에서는 김인수(金仁守)·김윤상(金允祥)·최응수(崔應洙)·김영훈(金泳勳) 등이 청년 20여 명과 함께 조일영(趙日永)의 집에 모여 만세 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하였다. 참석자들은 곧바로 시위를 실행에 옮겨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거리로 뛰쳐나갔다. 그러나 시위자들은 얼마 나아가지 못하고 일본 경찰의 진압에 가로막혔다. 이들 중 네 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결과]

용두동 시위운동에서 붙잡힌 네 명의 시위자는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각각 태형 90대씩을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용두동 시위운동은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아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인 3·1운동은 임시 정부의 수립을 가능케 했으며, 공화정을 정착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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