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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39
한자 現代
영어음역 Hyeondae
영어의미역 Present Ag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45년 8·15 광복 이후부터 현재까지 경상북도 김천시의 역사.

[변천]

1. 미군정 시대

8·15 광복 이후 김천은 정부 수립과 6·25 전쟁에서 주요한 위치에 선 지역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다. 김천에서도 해방의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국가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다. 8·15 직후 김천에서는 지역의 주요 인물과 세력이 함께 국가 건설을 위한 김천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그 아래 치안을 유지 담당하기 위한 김천치안유지대가 조직되었다. 김천건국준비위원회는 이후 김천인민위원회로 전환되어 김천의 치안을 담당했으나 미군이 주둔한 이후에는 세력이 약해지고 미군이 통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1946년 대구에서 발생한 10·1 항쟁이 전국으로 파급되었으나 김천의 경우는 그 영향이 크지 않았다.

2. 1950년대

김천은 1950년 7월에 접어들면서 6·25 전쟁의 격랑 속으로 빠져들어 갔다. 7월 대전 방어를 위한 금강 변 방어선이 무너지자 정부는 대전을 포기하고 대구로 이동하였다. 공산군은 경부선을 따라 영동·김천을 거쳐 대구로 향하였다. 7월 30일에 공산군 10사단은 무주를 거쳐 경주 방면으로 나아갔다.

김천의 각급 학교는 7월 초순에서 중순에 걸쳐 일제히 휴학하였다. 7월 중순 남하하는 국군과 경찰은 공산군과 김천 인근에서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 7월 31일 김천 소개령이 내려졌고, 밤 11시에 마지막 경부선 열차가 왜관을 거쳐 대구로 운행하였다.

김천은 7월부터 약 50일 정도 공산군의 점령 아래 놓여 있었다. 김천은 낙동강 전투에서 낙동강을 건너려는 공산군의 중요 전진 기지가 되었다. 8월 15일까지 대구를 함락시키고 부산으로 진격하려던 공산군은 낙동강 영천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인해 김천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천에서는 공산군 점령 아래 설치되었던 김천인민위원회 등 모두 기구들이 해체되고, 전쟁 이전의 상태로 복구되었다. 그러나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 이후 패퇴한 공산군은 수도산을 비롯한 산악 지대에서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쟁 중 후방 교란 방지를 목적으로 한 보도 연맹원에 대한 학살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3. 1960년대

1960년 부항면사무소 이전을 둘러싼 지역 내 갈등, 4월 혁명으로 치러진 7·29 총선거, 감천댐 건설 추진에 대한 지역 주민의 반대 운동 등이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김천의 4·19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19 직후 김천고등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내 고등학교 학생 대표들이 은밀히 모임을 갖고 데모를 계획했으나 학교 당국과 경찰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4월 26일 오전 10시부터 김천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동교 교정에서 부정 선거 규탄 궐기 대회를 가진 뒤 교문 밖으로 뛰쳐나와 가두시위에 들어갔다. 이들은 국도 송설로와 역전을 거쳐 김천시청 쪽으로 행진하면서 구호를 외치면서 독재 정권을 성토하였다. 그동안 학생 데모를 막는 데 열중했던 각급 학교 교직원들도 먼발치에서 데모 대열을 뒤따랐으며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김천시 모암동 삼각로타리를 지나 감천교까지 행진을 계속하였다. 이날 대통령 하야 소식이 전해지자 학생들은 다시 저녁 8시 무렵 역전 광장에 모이기 시작하였다. 약 500여 명이 대오를 짠 후 노래와 구호를 외치면서 시청과 경찰서를 통과하여 김천시 남산동 성결교회를 거쳐 남산공원 앞을 지나 황금동 거창가도로 접어들었다.

학생들이 중심이 된 데모대는 다시 경찰서까지 진출하여 경찰들과 대치하였다. 데모대는 경찰서 안으로 진입을 시도하였고, 경찰들은 이를 저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가 있었다. 경찰의 발포로 김천고등학교 2년 이연화 학생이 사망하고, 전기 회사 전공을 비롯한 수십 명의 시민들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발포 명령을 내린 당시 경찰서장은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관련 경찰관들도 해직 또는 징계되었다.

4. 1970년대

1970년대는 1972년 제4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제3~4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조국 근대화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 활발히 경제 개발을 추진하던 시기였다. 1972년 초부터 잘살기 운동 및 의식 개혁 운동인 새마을 운동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 금릉군에서도 부군수제가 신설되고 향토방위를 위한 민방위과와 새마을 담당 부서로 새마을과가 신설되어 산업 기반 부문, 소득 증대 부문, 복지 환경 부문 등 3대 산업을 중점 시책으로 추진하였다.

김천 지역의 초기 새마을 운동은 농촌 환경 개선 사업부터 시작되었다. 1970년 전체 마을에 시멘트 335포대가 무상으로 지원되어 마을 진입로 정비, 공동 우물, 빨래터, 퇴비장, 소류지가 정비되었다. 사업 시행 과정에서 주민 간 협동과 자립에 대한 성과가 크게 나타났다. 1972년 마을 가꾸기와 지붕 개량, 마을금고 육성, 농로 개선 사업을 통해 새마을 운동의 생활화와 소득화, 지속화에 집중하였다.

1973년에는 새마을 운동의 종합적인 체계화를 기본 방향으로 하천과 국토 대청결, 생산 시설 사업, 소득 개발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4년에는 새마을 운동의 자율적 확대와 마을 단위 광역 협동 사업을 목표로 새마을 시민 교육과 지역 협동권 사업을 전개하였다. 1975년에는 경제 난국 극복과 도시 새마을 운동 전개를 목표로 소득 기술 교육 강화와 협동권 사업을 확대하였다.

1976년에는 낙후 마을에 대한 집중 육성에 그 방향을 두고 부진 마을 집중 지원과 범국민 저축 운동을 전개하였다. 1977년은 새마을 자립 기반의 완성을 목표로 농외 소득원 개발과 반상회 운영 강화, 직장 새마을 운동을 강화하였다. 1978년에는 선진 농촌 구현을 위해 생산 소득 기반 확충과 공장, 직장 새마을 운동 확산에 주력하였다. 1979년에는 미래지향적 농촌 건설을 위해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3대 질서 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였다.

김천 지역의 경우 경지 정리 사업을 통해 1960년대 초반에는 김천시 어모면 중왕리, 농소면 신촌리, 개령면 동부리·광천리, 구성면 광명리, 감천면 금송리, 조마면 신안리 일원 15.27㎢의 농경지를 정리하였고 1960년대 후반에는 아포읍 대신리·국사리, 조마면 장암리, 개령면 서부리·황계리 등 일부 지역 23.14㎢의 농경지를 정리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경지 정리 사업의 대상지가 점차 줄어들어 김천시 아포읍, 감문면, 봉산면 등의 평야 지역 5.86㎢의 농경지가 정리되었다. 1980년대에는 김천시 대항면 대룡리 일대와 감문면농소면 대부분의 평야 지역의 경지 정리가 이루어졌는데 경지 정리 규모는 6.64㎢이었다. 1990년대에는 김천시 개령면 남전리, 어모면 남산리, 농소면 용암리, 증산면 평촌리를 끝으로 1.32㎢의 농경지가 정리되었다.

한편, 1970년에 「농촌근대화촉진법」이 제정·공포된 후 국고 지원을 통해 사업비의 50%를 지원하고 환지(換地) 보상 등이 이루어짐에 따라 경지 정리 사업은 보다 순조롭게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게 되었다.

5. 1980년대

1980년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이 공포되면서 제5공화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당시 김천시에서는 대통령령 제11027호[1983년 1월 10일 공포]로 금릉군·농소면·덕곡동·개령면·대광동·어모면·응명동감천면·양천동을 김천시로 편입하고 감문면 봉남동·소재동을 선산군 선산읍에 편입·분리하는 등의 행정 구역 개편이 있었다. 그리고 김천시 조례 제986호[1983년 2월 8일]로 행정동의 명칭 및 관할 구역의 일부를 조정하여 22개 동에서 13개 동으로 통합하였다.

한편, 신민당에서 핵심 지도자인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이 이탈하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고 각 지방에서 지구당을 창당하게 되자 신민당의 세력이 급속도로 팽창하게 되어 이를 방해하는 폭력 사태가 일어났다. 김천에서는 1987년 4월 27일에 이와 관련한 사건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6·29 선언 이후 직선제 및 국회 의원 선거구의 소선거구제라는 민주적 개헌안이 제정·공포되면서 제6공화국이 탄생되었다. 김천시와 금릉군도 1988년 금릉군 조례 제1021호[1988년 5월 1일 공포]로 동을 리로 개칭하고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774호[1995년 8월 3일]에 의거 김천시와 금릉군을 통합하여 15개 면·13개 동 지역을 행정 구역으로 하는 김천시가 발족하였다.

6. 1990~2000년대

1990년대 들어서 정부는 낙동강 중하류 지역의 용수 공급과 홍수 조절을 위해 감천댐 건설을 계획하였고, 1996년 4월부터 1997년 4월까지 타당성 여부 조사를 하려다 현지 주민에 의해 발각되었다. 이에 1996년 8월 8일 지례면민이 감천댐건설반대위원회를 결성하였고, 8월 19일에는 부항면, 8월 23일에는 구성면에서도 위원회가 차례로 결성되었다. 8월 24일에는 3개 면 연합 대책 위원회를 결성하고, 면마다 궐기 대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97년 4월 25일에는 8만 1847명이 연서한 진정서를 건설교통부에 내고 건설 반대 의사 표명을 하였다. 그러나 2005년 7월 건설교통부는 총 사업비 4191억 원 규모가 투입될 부항댐[감천댐] 건설 사업을 본격화하였다. 부항댐 건설 공사는 총 사업비 4764억 원, 공사 기간 2006년~2011년까지 58개월에 걸쳐 추진된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 김천시에는 경부고속철도 역사 유치, 2006년 전국 체육 대회 유치, 혁신 도시 유치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 도시 기반 시설 부분에서는 직지천 변 우회 도로를 6차선으로 확장하고, 국도 대체 환상 우회 도로를 개설하였고, 대전 통로 및 거창 통로를 확장, 김천대교, 대동교, 교동교, 삼도봉터널, 중부내륙고속도로 등을 개통 및 개설하였다. 또한 시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직지문화공원, 강변공원, 조각공원, 환경공원 및 소공원 250여 개소를 조성하였다. 문화·예술 및 교육 인프라 부분에서는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영남제일문, 김천시민 대종, 빗내농악전수관 등을 건립하였다. 복지 서비스 향상 부분에서는 노령 사회에 대비한 복지 시설 확충으로 김천시 노인종합복지관, 김천시 장애인종합복지관, 경상북도 청소년수련관 등을 건립하였다.

[행정 구역]

1949년 김천시의 승격으로 시군이 분리되어 김천군금릉군으로 개편되었다. 1960년 부항면사무소 이전 파동 이후 금릉군 부항면에 유촌출장소가 설치되었으며, 1973년 봉산면 복전동이 대항면에 편입되었다. 1983년에는 금릉군 농소면 덕곡동, 개령면 대광동, 어모면 응명동, 감천면 양천동이 김천시로 편입되었으며, 감문면 봉남동·소재동이 선산군 선산읍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1월 1일 도농 통합에 따라 김천시와 금릉군이 새로운 김천시가 되었으며, 3월 1일 아포면이 아포읍으로 승격되었다.

[교육 기관]

2013년 현재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전문 대학 1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 문화 시설로는 시립 도서관 1개, 작은도서관 10개, 김천문화원이 있다.

[산업·경제]

2011년 2월 현재 김천의 총면적은 1,009.5㎢로, 이중 논은 70.3㎢이고, 밭은 123.0㎢로 논보다는 밭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금릉평야개령평야를 중심으로 한 쌀·보리 등의 주곡 이외에 포도·사과·배 등의 과일과 참깨를 비롯한 특용 작물이 많이 생산된다.

김천에서는 경기도 안성과 같이 예로부터 유기(鍮器)가 유명했으며 소리를 생명으로 하는 징과 꽹과리가 대표적이다. 과하주는 김천시 남산동 지게마을 서쪽에 있는 과하천의 물과 누룩, 찹쌀로 빚어내는 전통 민속주로 향긋하고 담백한 맛으로 유명하다. 과하주는 일제 시기 품평회에서도 특상을 비롯한 여러 상을 수상할 정도로 맛이 뛰어났다.

김천의 산업은 1990년 들어 김천시 구성면의 직강 공사로 인한 지방 공업 단지가 조성되면서 곳곳에서 산업 기반이 이루어지고 있다. 1988년부터 산업 단지가 개발되면서 1차·2차 김천산업단지가 조성되었으며, 농공 단지로는 대광농공단지, 지례농공단지, 감문농공단지, 아포농공단지가 운영되고 있다.

[역동의 혁신 도시, 희망! 김천]

2010년 현재 현안 사업으로는 ‘자연 박물관 건립’, ‘경북드림밸리 김천혁신도시 건설’, ‘KTX 김천역사 건립’, ‘김천일반산업단지 조성’, ‘그린촌 광역 친환경 농업 단지 조성’, ‘삼애원 이전 및 신시가지 조성’, ‘농촌 마을 종합 개발 사업’, ‘수도산 자연휴양림 조성’, ‘생태 하천 조성’, ‘김천녹색미래과학관 건립’, ‘광역 철도망[김천~전주, 진주 간] 부설’, ‘신·재생 에너지 클러스터 조성’, ‘김천시 인재양성재단 설립’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산하 기관을 통하여 ‘가족과의 행복한 동행’이나 ‘한여름 밤의 음악회’ 등 문화·예술 행사나 ‘결핵 엑스선 이동 순회 검진’, ‘취업지원센터 설치’ 등 주민 사업도 시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4.09.04 [교육기관] 수정 <변경 전> 2010년 현재 초등학교 33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전문 대학 1개교, 대학교 1개교, 기타 학교가 2개교[미용예술학교 1개교, 방송통신대학교 부설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변경 후> 2013년 현재 초등학교 31개교, 중학교 15개교, 고등학교 10개교, 전문 대학 1개교, 대학교 1개교가 있다.
이용자 의견
ㅇ* 현재 김천에는 초등학교가 31개교가 있다고 합니다.
  • 답변
  • 디지털김천문화대전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부분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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