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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연맹 사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44
한자 保導聯盟事件
영어음역 Bodoyeonmaeng Sageon
영어의미역 Reprters' League Incid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950년 6월연표보기
종결 1950년 7월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집단 학살 사건
관련 인물/단체 국민보도연맹

[정의]

1950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들이 집단 학살당한 사건.

[역사적 배경]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10월에 이승만 정부가 좌익 세력 척결을 위해 만든 단체로, 좌익의 사상 전환을 통해 생활을 보장한다는 미명하에 조직되었다. 이 연맹은 공산주의자는 물론 이에 가담했다가 형을 받았거나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자와 자수한 사람 등을 가입시켜 사상을 전환시킬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에는 좌익만이 아니라 중도파도 상당히 포함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가입자의 대다수는 6·25전쟁 발발을 전후하여 집단 학살당하였다.

[경과]

김천군 국민보도연맹의 주요 간부를 보면, 위원장에 검찰지청장이, 부위원장에 정열모(鄭烈模), 지도 위원에 경찰 간부와 지방 유지가 임명되었다. 또 연맹의 간사로는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에서 좌익 운동을 주도해 온 임종업(林鍾業)이 선임되었다. 김천군 국민보도연맹은 가맹 자격을 확대하여 여러 장의 신청서를 나누어 주면서 아무나 가맹 신청서에 도장을 받아오게 해 연맹원의 수가 1,000명을 넘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보도연맹원은 공산군의 공격을 규탄하는 벽보를 붙이는 선전 활동에 동원되었다. 그러다 정부 측에서 보도연맹원의 후방 교란을 의심하여 수용령을 내렸다. 김천은 이들을 경찰서에 집단 수용했다가 공간이 협소하다는 이유로 교도소로 이송하였다. 공산군의 남하 속도가 빨라져 대전에 이르렀을 때, 군 당국에서 보도연맹원 전원을 즉결 처분하기로 전국에 작전 명령을 내렸다.

이는 소개령이 내리기 이틀 전인 7월 28일에 새벽부터 보도연맹원 명단을 인수한 헌병 당국이 연맹원의 진위도 가리지 않은 채 전원 트럭에 분승시켰다. 삼엄한 경호 아래 직지사 근처, 구성면 송죽동[현 구성면 송죽리] 근처, 상주 가도 등으로 끌고 가 산골짜기에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도열시켜 총살하였다.

[결과]

구성면 송죽동에서만 트럭 5대, 사망자 수는 300명으로 추산되며, 김천 지방 전체 희생자는 1,000명 정도로 추측된다. 이들 가운데는 좌익 경력이 없으면서 친구나 주변의 권유로 보도연맹 입맹 원서에 단순히 서명한 탓으로 끌려가서 희생된 사람도 상당수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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