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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84
한자 李崇元
영어음역 Yi Swungwon
이칭/별칭 중인(仲仁),충간(忠簡),연원군(延原君)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28년연표보기
활동 1453년연표보기
활동 1454년연표보기
활동 1459년연표보기
활동 1469년연표보기
활동 1472년연표보기
활동 1477년연표보기
활동 1478년연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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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491년연표보기
활동 1491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연안(延安)
대표 관직 병조판서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중인(仲仁). 증조할아버지는 이량(李亮)이고, 할아버지는 이백겸(李伯謙)이며, 아버지는 예조참판을 지낸 이보정(李補丁)이다. 외할아버지는 이숙(李淑)이고, 조부가 이숙(李淑)이다.

[활동 사항]

이숭원(李崇元)[1428~1491]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청렴하고 평온하며 공경하고 검약하여 산업(産業)을 일삼지 아니하였다. 여러 차례 권세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근신하고 주밀하여 뇌물이 통하지 않았으며, 비록 명예와 지위는 이미 높았으나 집이 가난하였는데도 평안하게 살았다.

사마시 생원과를 거쳐 26세가 되던 1453년(단종 1) 증광시(增廣試) 을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명(文名)을 떨쳤다. 사재감주부와 감찰어사를 거쳐 1454년 자급이 오르면서 사간원좌정언이 되었다. 이때 이유 등의 재산 몰수와 원종공신이 되기를 바라는 자에게 죄 줄 것을 청해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게 하였지만, 자신은 1457년(세조 3)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59년(세조 5) 사헌부지평이 되어 양녕대군이 전라도와 경상도를 지나면서 일으킨 작폐를 진언하였고, 그 결과 종자와 김해부사가 추국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파직을 당하였으나 형조정랑(刑曹正郞)에 재등용되었으며, 이후 이조정랑(吏曹正郞)·부지통례문사·의정부검상 등을 역임한 뒤 의정부사인으로 승진하였고 군자감정(軍資監正), 사헌부집의가 되었다.

1469년(예종 1)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두 달 뒤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되어 금강산에 가서 최안(崔安) 등을 선위(宣慰)하기도 하였다. 성종이 즉위하면서 승정원우부승지가 되었으며, 1470년 왕의 명으로 선종감에서 기우하는 불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때 대왕대비와 함께 가뭄과 직전, 형벌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를 하였다. 1471년(성종 2) 좌리 3등 공신 녹훈과 함께 가선대부 연원군에 봉해졌다. 다음 해 승정원도승지가 되어 청현(淸顯)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성종은 1473년(성종 4) ‘옥관자’를 내려 주어 집안이 가난해도 뜻이 더욱 확고하고 지위가 높아도 더욱 겸손한 인품을 높이 평가하였다. 1474년 포도대장 이양생(李陽生)의 부정과 불법을 탄핵하였으며, 원각사·내불당 등에서 왕비를 위해 기도하게 할 것을 제의하기도 해 유자(儒者)의 행보에 오해를 받기도 하였으나, 항상 군자의 면모를 유지하여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것은 청렴하고 근신한 태도를 높이 평가한 것이었다.

1477년(성종 8) 사헌부대사헌이 되고, 1478년 경상도관찰사가 되었으나 곧 한성판윤으로 자리를 옮겼다. 1482년(성종 13)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옥사와 민폐 제거에 힘쓰고 변방의 방어와 경계는 물론, 국경의 중국인들과의 분쟁을 종식하였다. 또한 야인들의 근경 사냥과 입조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신 왕래 시 발생하는 폐단을 근절하여 지방민의 고통을 덜어 주었다. 1483년(성종 14)에는 유생들이 책이 없어 읽고 익히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중앙 정부에 책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평안도 각 고을 향교에 『소미통감(少微通鑑)』, 『좌전(左傳)』, 『속편절요(續編節要)』 등을 보급하였다.

1483년 이조판서가 되어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으나, 청백(淸白)한 절개만은 더욱 절실하였다. 지위는 권요(權要)만을 역임하였어도 가계는 영락하기만 하였다. 1485년(성종 16) 이조판서의 사직을 수차례 요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았으나 곧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1487년(성종 18) 정조사가 되어 북경을 다녀왔으며, 이듬해 원접사의 임무를 맡으면서 의정부좌참찬이 되었다. 1491년(성종 22) 4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병을 얻어 사직하였다가 세상을 떠났다.

[상훈과 추모]

1457년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 1471년 좌리 3등 공신 녹훈과 함께 가선대부 연원군에 봉해졌다. 중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1648년(인조 26)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도동서원에 제향되었다.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비명이 전한다.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경덕사(景德祠)에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셔졌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5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1) 1469년(예종 1) 장례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1469년(예종 1)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고 2) 옥사와 민폐 제거에 힘쓰고 병방의 방어와 경계는 물론 ->옥사와 민폐 제거에 힘쓰고 변방의 방어와 경계는 물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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