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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86
한자 李約東
영어음역 Yi Yakdong
이칭/별칭 약동(藥童),춘보(春甫),노촌(老村),평정(平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416년연표보기
활동 1441년연표보기
활동 1451년연표보기
활동 1458년연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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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년 1493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묘소|단소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경상북도 김천시 성내동 경렴서원
사당|배향지 제주특별자치도 영혜사
사적비 제주특별자치도
성격 문신
성별
본관 벽진(碧珍)
대표 관직 호조참판

[정의]

조선 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벽진(碧珍). 호는 춘보(春甫)·노촌(老村)·평정(平靖), 초명은 이약동(李藥童). 할아버지는 군기소감(軍器少監)을 지낸 이존실(李存實)이고, 아버지는 남해현령을 지낸 이덕손(李德孫)이다. 어머니는 정부인 고흥 유씨(高興柳氏)이며, 외할아버지는 공조전서를 지낸 유무(柳務)이다. 부인은 정부인 완산 이씨(完山李氏)이며, 장인은 안변부사(安邊府使)를 지낸 이지명이다. 자녀는 3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첨지 이경원, 통정 이승원, 좌랑 이소원이고, 사위는 상장군 김순성, 여윤성, 사직 김예강, 현감 강효순이다.

[활동 사항]

이약동(李約東)[1416~1493]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인 하로촌(賀老村)에서 금오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초명이 약동인 이유는 아들을 얻기 위해 금오산의 약사암에서 정성 드린 것에서 유래한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절개가 곧았으며 김종직(金宗直), 조위(曺偉) 등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1441년(세종 23) 진사가 되었으며 36세가 되던 1451년(문종 1) 증광시 정과로 급제하여 사섬시직장(司贍寺直長)이 되었다. 이후 사헌부감찰을 거쳐 황간현감(黃澗縣監)으로 외직에 나가 선정을 베풀면서 청백리의 기틀을 다졌다.

1458년(세조 4)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고, 특별히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1459년(세조 5) 부모님이 연로하여 사직하였으나 청도군사로 봉양을 허락 받고 지극한 효성을 보여 주위로부터 명망을 얻었다. 1461년(세조 7)부터는 청도군사직 마저 사임하고 부모님 약을 직접 챙기며 모시기를 한결같이 하였지만 다음 해 돌아가셨다.

1464년(세조 10) 상기를 마치자 선전관으로 복직되었고, 이해 종부시정을 거쳐 당상관이 되어 귀성절제사(龜城節制使)가 되었다. 1467년 4대를 이끌고 이시애(李施愛) 토벌에 참여하여 종고대(終高臺), 북청(北靑)에 주둔하면서 전공을 세웠다. 1468년(세조 14)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1470년(성종 1) 제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산천단을 이설하게 하고, 제주의 관아 이속들의 부정과 불법을 중심으로 민폐를 말끔하게 제거하였으며, 공진하는 물건의 수량을 감하는 등의 선정으로 목민관의 모범적인 자세를 보여 칭송과 명성을 얻었다. 제주도민은 그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곰솔공원에 사적비를 새겨 지금도 은공을 기리고 있다.

1474년(성종 5) 경상좌도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가 되어 제주도를 떠날 때 평소 착용하던 의복과 기물을 그대로 두는 것은 물론, 말채찍조차도 관물이라는 이유로 성을 떠나면서 성루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이 일은 후임자들에게 아름다운 경계가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채찍이 없어진 후에는 백성들이 바위에 채찍 모양을 새겨 이를 기리고자 하였다. 그 바위가 바로 괘편암(掛鞭岩)이며, 이 일화는 지금도 제주도민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제주도를 떠난 배가 갑자기 풍랑으로 파선의 위기에 처하였다. 이약동은 이것이 하늘을 속인 벌이라 여기고 배 안을 살펴 자신도 모른 채 실려 있는 갑옷을 찾아냈다. 갑옷은 부하들이 전별 선물로 몰래 실은 물건이었다. 이약동은 한없이 부끄러움을 느끼며 갑옷을 강물에 던졌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투갑연(投甲淵)으로 상세한 내용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에 실려 전한다.

1477년(성종 8) 사간원대사간이 되어 법제적인 언론 활동은 물론,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제주도의 말을 훈련시켜 봉진하게 하였고, 수령을 문무로 교차하게 하였다. 선군의 역을 덜어 주게 하였고, 경상도의 군량 비축과 중국 물건의 무역 금지, 하삼도의 축성과 경상도의 군수 확보 방안 등은 그의 덕택이었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어 천추사의 직임을 띠고 북경에 다녀왔다.

1478년(성종 9) 귀국하여 경주부윤이 되었고, 1482년(성종 13) 호조참판으로 중앙 정계에 돌아왔다. 1485년(성종 16)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나이가 70세가 되어 치사하기를 여러 차례 간청하였으나 성종은 허락하지 않고 이듬해 전라도관찰사를 제수하였다. 이때 수적을 체포하는 등 민폐를 제거하여 민생을 안정시켰고, 1487년(성종 18) 한성부좌윤이 되어 한양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성종의 특지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1489년(성종 20) 이조참판의 임무가 가볍지 않고 70세가 넘어 정신이 흐려질 뿐만 아니라 용렬하고 어리석다는 이유를 들어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급이 올라 개성유수가 되었다. 1490년(성종 21) 자헌대부로 자급이 올랐으나, 나이가 개성유수의 직임을 감당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결국 병을 얻은 끝에 1491년(성종 22) 사직이 허락되었다. 이에 이약동은 곧바로 고향 김천으로 돌아왔다.

관직 생활을 하면서 청렴 개결하였고 은혜로운 정사가 많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집은 겨우 비바람을 막았고 아침저녁 끼니를 걱정할 정도였으나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였다. 78세가 되던 1493년(성종 24) 세상을 떠났는데, 여생을 마치기를 이약동같이 한 사람도 세상에 드물다고 평가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에는 『노촌실기(老村實記)』가 있다.

[묘소]

묘소는 김천시 구성면 양각리 모산마을 묵방골 끝자락에 있다.

[상훈과 추모]

이약동이 세상을 떠나자, 성종은 정무를 중지하고 시호 평정(平靖)과 함께 부의를 보내 예로 제사지내게 하였다. 1514년(중종 9)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이 청백리(淸白吏)를 천거하였다. 김천시 성내동에 있었던 경렴서원(景濂書院)과 제주도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제주도의 곰솔공원에 사적비가 세워졌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영혜사(永惠祠)[제주]와 청백사(淸白祠)도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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