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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78
한자 林椿
영어음역 Im Chun
이칭/별칭 기지(耆之),서하(西河)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이균옥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거주|이주지 경기도 파주시
학교|수학지 경기도 파주시
사당 경상북도 예천군 옥천정사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예천(醴泉)

[정의]

고려 전기 김천 지역에 기거한 문인.

[가계]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 공신의 자손으로 할아버지는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은 임중간(任仲幹)이고, 아버지는 한림원학사를 지내 귀족 사회에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닌 임광비(任光庇)이다. 역시 한림원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임종비(任宗庇)에게 학문을 배웠다.

[활동 사항]

임춘(林椿)은 20세 즈음에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일생의 일대 전환을 맞게 되는데, 이때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조차 일개 병사에게 빼앗겼다. 개경에서 5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친척들로부터도 소외당하자 상주의 개령[현 김천시 개령면]으로 옮겨가 7년여 동안 살았다. 임춘의 많은 글은 당시의 것인데,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내용이다.

임춘은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을 통해 여러 번 정권에 들어가려고 하였다. 1180년(명종 10)과 1183년에 절친한 친구인 이인로오세재가 연이어 과거에 합격하였는데, 이때쯤 개경으로 다시 올라가 과거 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현 파주시]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하였다.

이인로·오세재 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나가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고려 전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중 한 사람으로 꼽힌다. 주기론(主氣論)을 바탕으로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하였다. 고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변려문을 많이 남겼으나, 한유(韓愈)가 주장하였던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찬동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인로임춘의 작품을 모아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을 엮었다. 작품 가운데 「국순전(麴醇傳)」은 술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 작품이다. 술의 내력·성질·효능·폐단, 그리고 그에 대한 세론(世論)과 후일담을 의인전기(擬人傳記)라는 형식으로 나타냈다. 평결부에 사신(史臣)의 말을 빌려 신하된 자의 소임과 중신(重臣)의 선임이나 천거의 신중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무신란 시기에 불우한 처지에서 비롯된 비판적·풍자적인 시각이 반영되어, 당시 무신들의 타락상과 세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모습을 고발 비판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 임춘의 유고집인 『서하선생집』과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공방전(孔方傳)」은 돈을 의인화하여 지은 가전 작품인데, 공방(孔方)은 엽전에 뚫린 네모난 구멍을 가리키는 말이다. 돈의 사용과 유통을 둘러싼 고사들을 인간사로 의인화한 작품으로, 단순히 돈에 얽힌 일화를 평면적으로 서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겉은 원만한 듯 보이지만 속은 모가 나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신하를 풍자하고 있다. 평결부에서는 벼슬자리에 올라 나라를 망치고 있는 무리에 대한 비판을 강하게 하고 있다. 이런 비판 의식은 무신 집권기 때 정치적·경제적으로 소외된 지은이의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서하선생집』과 『동문선』에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예천군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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