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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32
한자 呂中龍
영어음역 Yeo Jungryong
이칭/별칭 무현,남은(南隱)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손경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56년 3월 6일연표보기
활동 1895년연표보기
활동 1903년연표보기
활동 1904년연표보기
활동 1906년 4월연표보기
몰년 1913년연표보기
추모 1977년연표보기
활동 1990년 12월 24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 지도보기
묘소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92-1
성격 의병
성별
대표 경력 의병 활동|충의사 결성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의 의병.

[활동 사항]

여중룡(呂中龍)은 1856년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금평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무현, 호는 남은(南隱)이다. 여중룡은 40세 때인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발생하자 허위(許蔿), 강심형(姜心馨), 조동석(趙東奭) 등과 함께 김산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부항면 대야리에서 이를 제지하려는 관군과 싸우다 지고 말았다.

서울로 올라온 여중룡은 1904년 전국의 애국지사 133명을 규합하여 독립 단체인 충의사를 결성했다. 이후 『황성신문』을 통해 우리나라 외교·정치·군병·제정 등의 혁신을 주창하는 경국론(經國論)을 펴서 당시 허약한 정부에 매운 자극을 주었으며, 우용택(禹龍澤)·이병구(李炳九) 등과 정부에 여러 번 정서(呈書)를 보내 침체된 국권 회복과 배일 자강책을 건의했다. 또한 일본에 대해서는 침략 행위를 규탄하고 군사를 거두어 귀국할 것을 강요했으며, 고종황제에게는 을사조약의 무효화 선언과 오적(五賊) 토주(討誅)를 상소하는 한편, 각국 공사관에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후원을 요청하는 공한을 누차 보냈다. 이 일로 여중룡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회유와 협박을 받았으나 “신라 박제상이 너희 나라에 잡혔을 때 신라의 귀신이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고 하다가 죽었는데, 지금 나 역시 그와 똑 같은 심정이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1906년 4월 여중룡은 말과 글로써는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없음을 깨닫고 우용택·이병구·조우석(趙瑀錫) 등과 주한일본공사관을 폭파하여 궐기의 신호등을 켜려고 계획하였다. 그러나 지모 씨의 가택 수속으로 비밀문서가 발각돼 체포되어 심한 고문으로 늑골이 부러지는 등의 심한 상처를 입었다. 1907년 7개월 만에 방면된 여중룡허위, 이강년(李康年), 강형원(姜馨遠) 등과 서울 혜화동에 모였다. 그리하여 허위와 강형원은 안동 풍기에서 기병하여 원주를 거쳐 상경하고, 이강년은 상주 문경에서 기병하여 충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하였고, 여중룡은 김산에서 기병하여 전주 최익현 군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전군이 모여 항일전을 크게 벌이기로 혈서로써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킬 사명을 띠고 김산으로 돌아온 여중룡은 쉴 사이 없이 활약하면서 김산군 무기고에서 포 80자루를 거두고, 군병 180명을 모았다. 날이 갈수록 의병군에 많은 군사가 모이자 8월 10일 무주를 거쳐 전라도로 행군하기로 작정하고 9일 밤 만반의 준비를 끝냈으나, 연일 격무에 고문으로 얻은 병이 악화되어 많은 피를 토하고 쓰러지고 말았다. 결국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여중룡은 1913년 “내 비록 살아서 적을 쳐부수지 못했을망정 죽어서 사나운 귀신 되어 꼭 원수를 갚고야 말겠다. 어디 두고 보자.”라고 뼈에 사무친 유언을 하고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1903년 전국의 의사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국난에 대처해야 한다는 「오백의사론(五百義士論)」을 비롯한 「양병론(養兵論)」을 발표하여 세론을 환기시켰다. 또한 을미사변 이후 을사조약이 체결될 무렵까지 작성한 상소문과 「한관만차(漢館漫箚)」 등으로 민족의 의식을 고취하는 데에 기여했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천시 남산공원에 순충기념비(殉忠紀念碑)가 세워졌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3.02.02 내용 수정 이강년은 상주 문경에서 기병하여 전주 최익현 군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한 후 전군이 모여 대대적인 항일전을 벌일 것을 혈서로 맹세하였다. -> 이강년은 상주 문경에서 기병하여 충주를 거쳐 서울로, 여중룡은 김산에서 기병하여 전주 최익현 군병과 합세하여 서울로 진격하고 전군이 모여 항일전을 크게 벌이기로 혈서로써 맹세하였다.
2011.07.26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김천시 남산공원에 순충기념비(殉忠祈念碑)가 세워졌다. ->김천시 남산공원에 순충기념비(殉忠紀念碑)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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