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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61
한자 金壽煥
영어음역 Gim Suhwan
이칭/별칭 스테파노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근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22년 5월 8일연표보기
수학 1941년연표보기
활동 1944년연표보기
수학 1945년연표보기
수학 1946년 12월연표보기
출가|서품 1951년 9월 15일연표보기
활동 1955년연표보기
수학 1956년 7월연표보기
활동 1964년연표보기
활동 1966년연표보기
활동 1966년 5월 29일연표보기
활동 1968년연표보기
활동 1969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1970년연표보기
활동 1981년연표보기
활동 1981년연표보기
활동 1984년연표보기
활동 1988년연표보기
활동 1998년연표보기
활동 1999년연표보기
활동 1999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2000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2000년연표보기
활동 2000년 5월 27일연표보기
특기 사항 2001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2002년연표보기
몰년 2009년 2월 16일연표보기
출생지 대구광역시 남산동
묘소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 산31-1
성격 천주교 성직자
성별
대표 경력 김천황금동성당 주임신부|성의중학교·성의고등학교 교장|추기경

[정의]

김천황금성당 주임신부 겸 성의중학교성의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가톨릭 성직자.

[활동 사항]

김수환(金壽煥)은 1922년 2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남산동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세례명은 스테파노이다. 할아버지 김보현은 1866년 천주교 병인박해 때 논산군 연산에서 순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아버지 김영식은 유복자로 태어나서 어릴 때 박해를 피해 옹기장수로 전국을 떠돌다가 1895년 경상도 장자골 옹기굴 신자촌에 정착하고 서중하와 혼인을 했다.

김영식·서중하 부부는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 가운데 넷째 김동환과 막내 김수환이 천주교 성직자로 자맀다. 김수환의 나이 다섯 살 때 가족이 모두 군위군으로 이주했다. 김수환은 군위보통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했다. 어머니 서중하는 ‘아비 없는 자식’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웠다. 김수환의 어릴 적 꿈은 장사꾼이었으나, 어머니의 깊은 신심으로 성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군위보통학교 5학년 때 가족이 대구로 이사하여 김수환은 성유스티노신학교 부설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졸업 후 김수환은 성유스티노신학교를 거쳐 서울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김수환은 천주교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대학[上智大學] 철학과에 입학했다가 1944년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 당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김수환은 상지대학에 복학했고, 1946년 12월에 귀국하여 서울 성심대학[현 가톨릭대학교]에 편입했다가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이후 김수환은 대구 대교구 안동천주교회 주임신부가 되었으며, 1955년 대구 대교구 김천황금성당 주임신부 겸 성의중학교성의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56년 7월 독일 뮌스터대학교로 유학을 간 김수환은 뮌스터대학교 대학원에서 신학과 사회학을 전공하고 1964년에 귀국하여 주간 『가톨릭시보』 사장에 취임했다.

1966년 마산 교구가 설정됨과 동시에 마산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5월 29일 주교가 되었다. 1968년 제12대 서울 대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대주교가 되었다. 1969년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되었다. 1970년 이후 한국 주교회의 의장,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준비위원장, 교황청 세계주교회의[시노두스] 한국 대표를 지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성회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가운데 개최하였으며, 1998년 서울 대교구장을 은퇴하였다. 2000년 5월 27일 김수환김천황금성당 10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새 성전을 축성하기도 했는데, 개인적으로 김천황금성당을 몇 차례 방문했다고 전한다.

47세 때 세계 최연소이자 동아시아에서는 세 번째로 추기경에 임명된 김수환은 평생을 두고 “사랑하라, 용서하라”고 부르짖고 몸소 실천하면서 성자의 길을 걸었고, 민주화 운동에는 정의와 용기로 대처하여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지학순 주교가 연루되어 경찰에 구금되었을 때, 김수환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고 면담하는 자리에서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1980년 12·12사태 때는 실권자 전두환 소장이 김수환 추기경을 인사 차 찾아오자 “서부 활극을 보니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이 정권의 뿌리는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면전에서 직언을 했다.

1987년 6월 학생들이 유신 체제를 반대하며 거리에서 데모하다 경찰에 쫓기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을 때는, 학생 데모대를 연행하려고 찾아온 경찰 간부들에게 “학생들을 잡아가려면 먼저 나를 밟아 넘어야 하고, 다음에는 신부를 넘어야 하고, 마지막에는 수녀들을 밟아 넘어야 한다.”면서 기지로 대응하여 학생 연행을 막은 일도 있었다.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고 정치·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공헌한 업적으로 1974년 서강대학교를 위시해 미국 노트르담대학, 일본 조치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힐대학, 연세대학교, 대만 후젠가톨릭대학, 필리핀 아데네오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9년 2월 16일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기 위한 조문객이 명동성당부터 퇴계로 4가, 명동역, 명동역 골목을 잇는 3㎞가 넘는 행렬을 이루었고, 3~4초간의 조문을 위해 평균 3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1990년 김수환은 장기 기증에 서약했는데, 2009년 선종 후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 기증 의사를 밝혔고 이를 접수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고 한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 『하느님은 사랑이다』[1981년], 『평화를 위한 기도』[1981년], 『이 땅에 평화를』[1988년],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1999년],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1999년] 등이 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묘현면 오산2리 산31-1 천주교 용인공원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훈장, 2000년 심산상[성균관대학교], 2000년 제2회 인제인성대상[인제대학교], 2001년 독일연방공화국 대십자공로훈장, 2002년 칠레정부 베르나르도오히긴스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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