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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계동 연일정씨 문중 가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644
한자 鳳溪洞延日鄭氏門中家禮
영어음역 Bonggye-dong Yeonil Jeongssi Munjung Garye
영어의미역 The Family Customary Formalities of the Yeonil Jeong Clan of Bonggye-dong
분야 생활·민속/민속,문화유산/무형 유산
유형 의례/제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집필자 임삼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의례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성격 가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거주하는 연일정씨 가문의 예법.

[개설]

봉계동 연일정씨 문중가례는 노론계의 영향을 받은 봉산면연일정씨 문중에서 전해 내려오는 예법을 말한다. 1991년 연일정씨들이 세거하고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가례[관·혼·상·제]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김천문화원에서 발간한 『김천민속지』에는 「연일정씨 문중의 가례」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의 집필자는 미상이지만 당시에 인터뷰를 한 명단을 볼 수 있다. 정선영(鄭旋永)[봉산면 신리, 당시 72세]·조경호·조병훈·조명환 등이다. 정선영은 연일정씨 가문 후손으로 생각되고, 조경호·조병훈·조명환 등은 연일 정씨 집안과 혼맥을 맺고 있는 집안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로 연일정씨 집안과 관련된 청혼서, 허혼서, 축사, 문안지 등이 이 세 명의 집안에서 소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연일정씨 문중의 가례」의 부록에는 문안지, 청혼서, 허혼서, 사돈지, 축사 등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연원 및 변천]

연일정씨 집안은 12대조부터 붕당과정에서 노론계로 분류되었다. 12대조에게 4형제가 있었는데 셋째 집이 율곡 이이(李珥)[1536~1584] 선생의 질서(姪壻)가 되어 노론의 풍습을 따랐다. 그 분화를 보여 주는 것이 축문이다. 묘사를 지내도 12대조 윗대까지는 남인축만 쓰고, 그 아래로부터 남인축과 노론축을 각각 쓴다고 한다. 축의 문틀은 거의 같다. 그렇지만 축문의 끝부분에서 노론축은 ‘세전일제(歲餞一祭)’, 남인축은 ‘불귀감모(不腃感慕)’라고 쓴다. 이렇게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일상생활에서는 큰 차이 없이 화목하게 지낸다고 한다.

1990년대까지 연일정씨 집안에서 사용하는 예의 기본은 정선영의 8대조 조후상이 엮은 『간식유편(簡式類編)』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일상적인 문안 서신의 용어 및 서식, 각종 의례의 절차, 일반적인 교양에 해당하는 지리와 역사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연일정씨 집안에서는 묘사를 중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묘소와 묘사의 제반 사항에 대해 담고 있는 『태평(太平)』 또는 『태평지(太平誌)』를 발간하였으며, 4개 파 종손이 소장하고 있다. 이 책명은 선조의 묘소가 집단으로 모셔져 있던 봉산면 태평동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는 책을 쓴 동기, 묘소의 위치, 재궁(齋宮)의 구조와 용도, 묘사를 지내는 과정과 내용, 홀기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한다.

[현황]

2021년 현재도 문중 시제 때 고례의 예법에 따라 의례가 행해지고 있다.

1. 혼례

연일정씨 집안에서의 혼례 절차는 의혼(議婚), 납채(納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으로 되어 있다.

1) 의혼: 대개 처갓집, 외갓집, 대고모집 등이 양가를 오가면서 혼인을 연결시킨다. 이 경우, 안측에서 사람을 보내 공공연하게 간다고 말을 하거나 혼인할 집안이 살고 있는 마을로 시집간 딸 혹은 그곳에 살았던 며느리를 연줄로 하여 신부의 용모와 몸가짐, 신부 집안 형편 등에 대해 알아본다. 의혼이 오고간 뒤 신랑 댁과 신부 댁에서 궁합을 본다. 궁합은 혼인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궁합이 나쁘면 혼담이 깨어지기도 한다. 신부 측 어머니가 신랑 측의 사주를 들고 점치는 사람에게 궁합을 본다. 혼사가 이뤄지면 중매인에게 대개 두루마기 한 벌을 사례로 선물하였다.

2) 납채: 혼담이 무르익으면 양가에서 청혼서와 허혼서를 교환하게 된다. 이 혼서지 교환이 이루어진 뒤, 신랑 측에서는 신랑의 생년월일시를 적은 사성(四星)을 신부 측에 보낸다. 이때 사성은 안으로 청색, 밖으로 홍색 보자기로 싼다. 사성을 신부 측에 전달해 주는 사람은 산지기나 서당을 지키는 사람 중에서 혼인을 해 어린애를 잃지 않고 자식이 많은 사람이다. 신랑의 사성을 신부는 평생 동안 옷장 깊숙한 곳에 보관해야 한다. 신부 측에서는 사성을 받아 궁합을 보며, 궁합이 맞으면 혼인 날짜를 정하여 적은 ‘택일단자(擇日單子)’ 혹은 ‘연길(涓吉)’을 보낸다. 복 많은 사람이 택일단자를 신랑 측에 전달한다.

3) 납폐: 신부 댁으로부터 택일단자를 받은 신랑 측에서는 혼수 함을 신부 댁에 보낸다. 함 속에는 윗옷[청색], 치마[홍색], 다른 옷[보통 속옷 등] 등을 넣어 보내며, 윗옷은 꼭 보내야 한다. 이들 물목은 붉은 보자기로 싸서 묶는다. 옛날에는 팥, 콩을 넣어 보내기도 했다. 혼수 함을 신부 댁에 보낼 때는 두 집안이 사전에서 정한 날짜에 맞추어 보내며, 보통 혼인하기 한 달 전에 보낸다. 혼수 함은 신부가 1년을 묵고 나서 시집에 올 때 다시 가져간다. 농이나 다른 물목은 혼인식 때 보내기도 한다.

4) 친영: 친영은 초행(初行),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 상견례(相見禮), 신방(新房), 동상례(東床禮), 신행(新行), 현구례(見舅禮), 근친(覲親)의 절차를 거친다.

혼인 당일 신랑은 시각에 맞춰 집을 나서기 전 사당에 가서 혼인함을 알리고, 초례를 하며, 부모의 당부 말을 듣고 혼인식이 이루어질 신부 댁으로 간다. 이 절차는 신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전부터 연일정씨 집안에서 이러한 절차는 사라졌거나 다른 절차에 흡수되었다.

2. 묘제(墓祭)

연일정씨는 묘제를 ‘세일제(歲一祭)’라고 부르기도 한다. 봉계동에 거주하는 연일정씨 만취당파(晩翠堂派) 4개 종손들만이 소장하고 있는 ‘연일정씨만취당파대종중소장태평사기(延日鄭氏晩翠堂派大宗中所藏太平史記)’인 『태평』에 소개된 묘제의 내용을 근거로 연일정씨 문중의 묘제에 대해 살펴본다. 태평은 연일정씨 소유 선산으로 모두 15위[13위 조상, 후손이 없어 결손이 된 선조를 한 곳에 모시는 외단(外檀), 직계 가족이 없는 선조 방선조위(旁先祖位)]가 모셔져 있다. 각 묘소에는 위토를 붙이면서 묘소를 관리하며, 묘사 때 쓰일 떡을 준비해 주는 ‘묘직’이 있다.

1) 세일제: 매년 10월 상순에 행한다. 먼저 유사가 3일 전에 묘소에 가서 재배를 하여 선조들에게 아뢰며, 묘소를 살펴 풀들을 없애고 청소를 한다. 다시 재배를 하고 물러난다. 그 뒤 재궁(齋宮)에서 실당(室堂)을 청소하고, 제기를 씻어 닦고, 병(瓶)에 술을 채우고, 제수를 준비한다. 당일에 묘 앞에 돗자리를 깔아 둔다. 만약 재궁에서 행사를 하면 먼저 상탁(床卓)을 깐다.

참제자(參祭者)들은 연령과 항렬의 순서로 서고, 가제의(家祭儀)와 함께 제수를 진설한다. 연령과 항렬이 가장 높은 사람이 초헌관이 되며, 초헌관은 향제(香祭) 앞에 꿇어앉아서 분향하고, 다시 재배하고 꿇어앉아서 강신한다. 집사자 한 명이 술을 들고 서고, 우집사자 한 명이 헌관에게 잔반(盞盤)을 주면 헌관은 잔반을 받들고 집사자가 그 잔에 술을 따른다. 헌관이 모상(茅上)에 붓고 잔을 집사에게 주면, 집사는 잔을 신위 앞에 바친다. 헌관이 머리 숙여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재배한다. 그 뒤 재위자(在位者) 모두 참신 재배한다. 헌관은 향안 앞에 꿇어앉는다. 집사자는 술을 들고 서 있고, 우집사자가 신위 앞에서 가지고 온 잔반을 헌관에게 준다. 헌관이 잔반을 받들고, 집사가 잔에 술을 따른다. 헌관이 모상에 3번 비우고 잔반을 집사에게 준다. 집사는 신위 앞에 바친다. 집사가 적(炙)을 가지고 오면, 헌관이 그것을 받아 들고 술잔의 남쪽에 바친다. 계반개(啓飯盖) 삽시(揷匙) 정저(正筯)한다. 축은 왼쪽에 꿇어앉아서 읽기를 마치고, 헌관은 머리 숙여 엎드렸다가 축문 읽기가 끝나면 일어나서 재배한다. 아헌례, 종헌례는 초헌례와 절차가 같다. 합문(闔門)의 절차 없이 유식(侑食)을 하고 진다(進茶)를 한다. 잠시 서 있다가 재위자 모두 사신재위(辭神在位)를 하고 분축하여 철상한다. 철상한 후 음복례를 행한다.

2) 외단 묘제: 각 파 종손들이 의논하여 별도의 제단을 만들어 모든 묘소의 제사를 올린 다음날에 묘제를 올린다. 축문의 내용을 보면 외단 묘제를 지내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축문에는 “방친(傍親)의 여러 내외위의 영(靈)은 이미 사속(嗣續)이 끊어졌고, 따뜻한 가을 제사를 받아 보는 것도 없어졌다. 산소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쉬워서 오늘 조상님의 시제지일(時祭之日)이 돌아왔으니 간략하게 밥, 국, 술, 과일로 상을 차려서 조상을 받들어 모시니 흠향하소서.”라고 기재되어 있다.

한편, 태평재(太平齋)에서 묘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유가 『태평』에 실려 있다. 『태평』에 따르면, “묘사는 묘에서 행함이 바른 예이지만, 10월에 풍설(風雪)이 있으면 선세(先世)에 특별히 재궁을 묘 아래에 만들어, 그곳에서 묘제를 지냈다. 또한 교리공(校理公)[입향 선조] 이하 모든 제위는 풍아가 몰아쳐도 지패(紙牌)를 모시고 행사를 했다. 그러나 교리공 원비 안동 권씨의 묘를 실전(失傳)하여 묘소의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고, 병절공 원비 전주 이씨의 묘가 멀리 경기도 용인에 있어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묘상(墓上)에서 제사를 지내면 허설(虛設)할 수 없고 지패로 제사를 모시면 병설(幷設)로 해야 한다. 이것이 재궁행사(齋宮行事)의 옮음이다…….”

태평재에서 묘제를 지내는 것을 두고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다. 어떤 사람들은 묘에서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후손들이 조상들 묘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주장에 반박하여 어떤 사람들은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면 권씨, 이씨의 영(靈)이 자손의 지패 행사를 받지 못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매번 묘사 때마다 이것을 두고 논의하였으나 해결을 하지 못해 그 정당함을 지례지가(知禮之家)에 물어 해결했다고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8.02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1) 뒤 재궁(斎宮)에서 실당(室堂)을 청소하고 ->뒤 재궁(齋宮)에서 실당(室堂)을 청소하고 2) 친영은 초행(初行), 존안례(尊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 ->친영은 초행(初行), 전안례(奠雁禮), 교배례(交拜禮), 합근례(合巹禮) 3) 한편, 태평재(太平斎)에서 묘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한편, 태평재(太平齋)에서 묘제를 지내는 경우도 있다 4) 묘상(墓上)에서 제사를 지내면 허설(虛說)할 수 없고 ->묘상(墓上)에서 제사를 지내면 허설(虛設)할 수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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