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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756
한자 崔再善
영어음역 Choe Jaeseon
분야 종교/기독교,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종교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고수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12년 1월 7일연표보기
수학 1934년 6월연표보기
수학 1938년 6월연표보기
활동 1938년 6월연표보기
출가|서품 1938년 6월 11일연표보기
활동 1942년 5월연표보기
활동 1942년 5월연표보기
활동 1943년 11월 12일연표보기
활동 1943년 1월 15일연표보기
활동 1943년 1월 15일연표보기
활동 1944년 4월 11일연표보기
활동 1945년 5월 5일연표보기
활동 1946년 3월연표보기
활동 1950년 3월연표보기
활동 1954년 6월 6일연표보기
활동 1955년 5월 11일연표보기
활동 1955년 5월 12일연표보기
활동 1957년 1월 26일연표보기
활동 1957년 4월 30일연표보기
활동 1957년 5월연표보기
출가|서품 1957년 5월 30일연표보기
활동 1962년 10월 26일연표보기
활동 1962년 3월 10일연표보기
활동 1970년 2월 10일연표보기
활동 1972년 1월 22일연표보기
활동 1973년 11월 6일연표보기
활동 1973년 11월 7일연표보기
활동 1973년 11월 7일연표보기
활동 1973년 9월 19일연표보기
활동 1975년연표보기
활동 1976년 12월연표보기
활동 1979년연표보기
활동 1979년 4월 26일연표보기
활동 1982년 2월연표보기
활동 1982년 2월연표보기
활동 1985년 5월 15일연표보기
몰년 2008년 6월 3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남도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413
묘소 경상남도 양산시 상북면 상삼리 8-4 천주교부산교구 공원묘지 성직자 묘역
성격 천주교 성직자
성별
대표 경력 초대 천주교 부산교구장

[정의]

천주교 김천황금성당 주임신부 겸 성의중학교성의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한 가톨릭 성직자.

[활동 사항]

최재선(崔再善)은 1912년 1월 7일 지금의 경상남도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 413번지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요한이다. 1932년 9월부터 1934년 6월까지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 철학과를 다녔고, 1938년 6월까지 같은 대학 신학과를 다녔다. 1938년 6월 11일 사제 서품을 받고, 1938년 6월부터 1942년 5월까지 전라북도 수유성당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42년 5월부터 1943년 1월 15일까지 경상북도 영천성당 주임, 1943년 1월 15일부터 1943년 11월 12일까지 대구 계산성당 보좌와 주임, 1944년 4월 11일부터 경상북도 김천에 있는 지좌성당 주임신부를 역임했다.

최재선은 1945년 5월 5일부터 1955년 5월 11일까지 김천황금성당 주임과 김천 성의중학교성의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10년 인가를 받은 성의학교는 재정 문제와 조선총독부의 끊임없는 간섭과 통제 강화로 1918년 문을 닫았다. 그 후 1923년 당시 김천본당 주임신부 이약실의 노력으로, 재래의 ‘학교’라는 명칭은 1922년 3월 28일 개정 공포된 사립학교 규칙에 의거한 기본 재산과 설비를 갖추지 못해 사용할 수 없어 ‘학원’으로 인가를 받아 운영하였다.

최재선은 김천에 부임한 후 해방이 되자 보통학교 과정, 즉 초등학교 과정은 의무 교육이 될 것으로 예측하여 기존의 성의학원 초등 과정을 폐쇄하고 김천 지역 여러 곳에서 교사들을 초빙한 후 1947년 4월 10일 3년 과정의 중등 과정을 이수하는 ‘성의중학원’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어린 학생들이 중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지 않은 ‘중학원생’이란 열등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김천 지역 각 학교가 함께 행사를 할 때 중학교보다 중학원이 더 실질적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 김천 지역에서는 제일 먼저 고적대를 창설하여 시가행진을 하는 등 열정을 보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정식 중학교로 설립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여 1949년 3월 10일 성의여자초급중학교 설립인가를 받았다. 이후 최재선은 기존의 성의중학원에 다니는 재학생들을 ‘성의여자초급중학교’에 편입시키기 위한 시험을 경상북도 장학사 관리 하에 실시하여, 성의중학원 1·2·3학년 120여 명 전원을 해당 학년에 편입시켰다.

성의여자초급중학교는 그 해 5월 7일 학교 운동장[현 김천황금성당 뜰]에서 후원회 간부와 지방 유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개교식을 가졌다. 당시 박종호(朴鍾浩)·신재룡(申在龍)·김철수와 수녀 윤필술·김순자·정경자 등이 교사로 있었다.

인가를 받은 그 해 9월 신학기를 위한 신입생을 모집하였으나 미달이 되자 이사회를 개최하여 남녀 공학으로 변경할 것을 결정하였으며, 1950년 1월 31일 문교부로부터 남자 각 학년 1학급, 여자 각 학년 1학급으로 편성할 것과 교명을 ‘성의중학교’로 하여 인가를 받았다. 성의중학교는 인가를 받은 후 기존에 확보해 두었던 지좌동 부지에 1950년 4월 10일 남자부 교사 목조 기와집 4교실을 준공 하였으며, 여자부는 황금동 교사를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50년 3월 10일 국회에서 학제가 4학년제로 변경되자 학제 변경 신청을 하였고, 1950년 4월 14일 인가를 받아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4학년제가 정착하기도 전에 다시 학제가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으로 변경되자 남자부와 여자부 각 학년당 2학급씩 6학급, 총 12학급을 신청하여 인가를 받았다. 그렇게 수시로 바뀌는 문교 정책에 맞추어 학교 체제를 갖추어 가는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

전란 중에 지좌동 교사와 황금동 교사가 모두 전소되었으나 1952년부터 1953년에 걸쳐 지좌동에 5개 교실, 황금동에 5개 교실을 신축하여 교육을 계속했다. 1952년 2월 18일에는 남녀 공학으로 ‘성의상업고등학교’를 설립, 3월 14일 인가를 받고 남자부는 각 학년 2학급, 여자부는 각 학년 1학급으로 편성하여 김천 지역의 교육 기반을 닦는 데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최재선은 1946년 3월부터 1950년 3월까지 김천교육청 교육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1954년 6월 6일부터 1957년 5월까지 대구대교구 참사위원을 역임하면서 동시에 1955년 5월 12일부터 1957년 4월 30일까지 대구 계산성당 주임과 대구 대건중학교와 대건고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1957년 1월 26일 푸살라 명의주교와 부산대목구장에 임명되었고, 1957년 5월 30일 주교 서품을 받았으면 1962년 3월 10일 부산교구장에 임명되었다. 1962년 10월 26일부터 1972년 1월 22일까지 (재)천주교 부산교구유지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1970년 2월 10일부터 1973년 11월 6일까지 밀양 학교법인 세종학숙 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 9월 19일 타나라무사 명의 주교로 임명되면서 부산교구장을 은퇴하였다.

1973년 11월 7일부터 1976년 12월까지 교황청 성직자포교성성 한국지부장을 역임하였고 1973년 11월 7일부터 1979년 4월 26일까지 한국외방선교회 총재를 역임하였다. 1975년부터 1982년 2월까지 주교회의 선교위원회 위원장을, 1979년부터 1982년 2월까지 교황청 전교회 한국지부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 5월 15일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총재를 역임하였다. 2008년 6월 3일 16시 45분경 선종하였다.

[묘소]

천주교 부산교구 공원묘지 성직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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