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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10202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집필자 송기동

[명당에 자리 잡은 유후조의 묘소]

낙동대감으로 불리며 흥선대원군과 함께 세도 정치를 몰아내고 정계를 혁신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조선 후기와 개항기 청백리의 대명사인 낙파(洛坡) 유후조(柳厚祚). 개령면 동부리 관학산에는 바로 그 유후조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관학산의 주산인 감문산김천시 개령면 서부리동부리, 양천리를 품고 있는 삼한 시대의 소국인 감문국의 진산이자, 감문산성으로 인해 위난(危難) 시 백성들의 피난처로서 성황산(城隍山)으로도 불리며 지역민들로부터 우러름을 받아 온 신산(神山)이다.

풍수지리로 볼 때 감문산은 호랑이의 형상으로 기운이 넘쳐 인근 동리에 흉사가 자주 일어 아도화상(阿道和尙)계림사라는 절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 만큼 사연이 남다른 산이다.

많은 전설을 품고 있는 명산 감문산이 빗겨 흘러 그 정기가 모인 봉우리가 곧 관학산(冠鶴山)으로, 산의 형세가 학이 관을 쓰고 있는 것 같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감문산동부리양천리를 연결하는 뒷고개를 거쳐 관학산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역마고개를 거쳐 유동산까지 연결되는데, 멀리 제석봉과 금오산을 마주하는 대명당 터로 알려져 왔다.

관학산이 갖는 길지로서의 명성은 예부터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큰 부(富)를 축적한 개령의 대부호인 양천허씨 집안의 정원댁과 단양우씨 집안의 대저택이 이 산 자락에 지어졌다는 사실과도 무관치 않다.

고종 때 영남 사람으로서는 실로 200년 만에 정승의 반열에 오른 상주인 유후조가 고향이 아닌 개령 땅 동부리를 묘소로 정한 사실만으로도 관학산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낙동대감 유후조]

“여봐라, 날 좀 업어다가 물을 좀 건너 주게.”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한 젊은 선비가 상주 땅을 지나다가 유 정승이 고향에 은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선비는 안부나 여쭙고 갈 요량으로 집 앞에까지 왔다가, 강물이 불어 물을 못 건너게 되자 근처에 있던 행색이 초라한 노인 하나를 다짜고짜 불러 세웠다.

노인이 말없이 생원을 업어 물을 건네주자 젊은이는, “저 집이 유 정승 댁이 맞는가?” 하고 물었다.

“그렇다오”

“안에 계신가 살펴보고 오게.”

“이미 여기 나와 있지 않소.”

좌의정을 지냈던 유후조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인 상주 중동 우물리에 은거했는데, 전국의 문사들과 대소 관리들이 문안 인사차 마을을 찾아들자 방문객들의 불편을 줄일 요량으로 낙동강 가의 나루터로 집을 옮겨 살았다. 이때의 일화로 유후조는 낙동대감이란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청백리 유후조의 삶]

풍산유씨 유후조선조 때의 명신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8세손으로 1798년(정조 2) 상주에서 태어나 부호군과 이조참판, 공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절치부심(切齒腐心) 끝에 집권에 성공한 흥선대원군은 계속된 세도정치의 폐단을 끝내려는 자신의 정치력을 뒷받침할 인물로 1866년(고종 3) 당시 사림으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명문가의 후손인 유후조를 일약 우의정으로 발탁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합천 출신의 남인계 영의정 정인홍(鄭仁弘)이 사사되고 뒤이어 1680년의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계 영의정 허적(許積)이 사약을 받는 등 조선 후기 이후 경상도 남인은 철저히 정권으로부터 소외되어 왔다. 따라서 유후조가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는 것은 개인만의 영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완전히 정계에서 밀려난 후 실로 170년 만에 경상도 남인의 정계 복귀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던 셈이다. 우의정으로 임명된 후 유후조고종의 가례(嘉禮)를 알리는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를 다녀왔으며, 다음해에 좌의정에 올랐다가 1872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로 퇴임하기까지 청백리(淸白吏)로서 명망을 얻었다.

[동부리의 자랑으로]

한때, 관학산에 있던 개령향교 터를 탐낸 유 정승이 자신의 묘소를 들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향교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기도 했지만, 1989년 개령향교 대성전을 중수할 때 발견된 『개령향교신축중수이건기문』에 1866년(고종 3) 향교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는 기록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유 정승이 졸(卒)한 연도인 1875년(고종 12)과는 상당한 연차가 났음이 밝혀져 애꿎은 누명을 벗게 되었다.

기문이 아니더라도 명문가의 후손으로서 일생을 청렴하게 살아온 유후조가 사익을 위해 유학의 지방 본산인 향교를 이전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지금도 동부리 주민들은 청백리로 명망을 얻은 유후조의 묘소가 마을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삼고 있다.

[정보제공]

  • •  김기환(남, 1921년생, 개령면 동부리 주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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