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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B030101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경호

[18대 종손 이철응 씨와 종부 한영숙 씨]

조선 성종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일등공신 정양공(靖襄公) 이숙기(李淑琦)[1429~1489] 선생을 불천위로 모시고 있는 삶의 터전이 바로 원터마을이다.

이숙기 선생을 시작으로 500여 년간 그 후손들이 살아오고 있는 원터마을의 중심에는 연안이씨 종가가 있으며, 그 종가에는 입향조 이숙기 선생의 18대 종손인 이철응[1945년생] 씨와 종부 한영숙[1946년생] 씨가 살고 있다.

[종손으로서의 삶]

이철응 씨는 농업협동조합에서 33년간 근무하다 퇴직한 후 농사와 집안일에 힘을 쓰고 있다. 종손으로서 이철응 씨는 어린 시절부터 묘사나 각종 제례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서당에서 『천자문』과 『명심보감』 그리고 『동몽선습』 등을 익혔다.

또한 어른들 말씀에 복종하고 자신의 행동을 절제하도록 교육받아 왔는데, 이는 집 안에서 강조하는 극기복례의 가르침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이철응 씨는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며 시 창작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군에 들어갔다가 제대 후 농협에 근무하였다. 그런 중에도 이철응 씨는 언제나 연안이씨 종손으로서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껏 성실하게 살았고, 그런 자신의 삶에 대해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6·25 전쟁 때 화재로 멸실된 고택을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하지 못하고 평범한 기와집으로 짓고 살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크다고 말한다.

“이 집은 고택이 아니고 동란 때 인제 화재를 당해서 소실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종택이라고 찾아오면 부끄럽지요. 오는 사람들이 전부 고택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겠나 생각을 하는데.”

그는 아직 신혼인 외동아들 이동원 씨와 며느리에게도 종가 사람으로서 예의 바른 몸가짐을 항상 강조한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 같지 않게 심성이 착하고, 어른들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집안의 대소사에 항상 참석하는 아들 내외를 보면 한편으로는 뿌듯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애처롭게 여겨진다고 한다.

이철응 씨는 또한 종부인 자신의 아내 한영숙 씨의 말을 잘 따르고 호응하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그는 결혼 생활에서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본단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실제 생활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성장기에 어른들 밑에서 받은 가정 교육이 몸에 배인 것이라고 한다.

[종부 이야기]

종부 한영숙 씨는 25세 때 경주에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당시 한영숙의 선조 묘가 이 지역에 있어서 집안 어른들이 정양공 종택을 왕래하며 교분을 쌓게 되어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영숙 씨의 친정 할아버지와 당숙도 고향에서 이름난 선비였다. 2남 2녀 중 둘째인 한영숙 씨는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조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할아버지는 딸을 키워 보지 못한 탓에 손녀를 유독 귀여워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버지가 없다 보니 할아버지가 더욱 친딸처럼 키웠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는 한영숙 씨의 됨됨이를 보고 늘 종부감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렇게 조부모 밑에서 귀여움을 받으면서 자라서인지, 한영숙 씨는 어른들을 모시고 사는 것이 힘들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을 모시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다가,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다른 사람들이 “어른을 모시지 않아서 편하다”고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보제공]

  • •  이철응(남, 1945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연안이씨 종손)
  • •  한영숙(여, 1946년생,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 주민, 연안이씨 종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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