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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C030202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부항면 해인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재민

[성열이한테 가 봤어?]

“성열이한테 가 보면 얘기 잘해 줄 거야.”

“성열이가 참 많이 알지.”

“성열이가 얘기 안 해 줘?”

“성열이가 많이 챙겨 주지?”

조사자는 해인리를 조사하는 도중에, 마을 주민들로부터 ‘김성열’이라는 이름 석 자를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도대체 누구길래?’라는 의문을 가질 즈음, 다행스럽게도 하루 일과를 끝내고 마을로 돌아오는 김성열[1954년생]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해인리에서 태어난 김성열 씨는 마을 인근의 대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힘든 집안 사정과 5남 2녀의 장남이란 책임감 때문에 바로 농사일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1970년대 도시화 바람은 마을 밖이라곤 한 치도 몰랐던 김성열 씨에게도 몰아쳤고, 결국 그는 부산으로 출타하게 된다.

“부산에서 정말 안 해 본 거 없으예~ 막일[공사일]도 해보고, 포크레인도 몰아 보고, 장사도 해 보고 그랬심더.”

농사를 그만두고 고향을 떠나 기대 반 우려 반으로 선택했던 부산! 애초에 부산은 김성열 씨에게는 운명적으로 맞지 않는 그런 곳이었는지도 모른다. 농사일밖에 몰랐던 김성열 씨는 부산에서 공사 현장 일을 시작으로 공장일은 물론이고 과일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몸은 몸대로 지치고, 도시의 각박했던 분위기 속에서 받는 스트레스 등으로 부산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역시 고향이 제일 편하더라]

결국 김성열 씨는 힘든 부산 생활을 정리하고 1983년 고향인 해인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래도 맘 편한 게 제일입니데이. 부산 갈 때, 땅을 안 팔고 갔거든요. 그래가 땅도 있고. 부산에 있으니 내 맘이 얼마나 불편했던지. 인심 좋고, 공기 좋은 여기가 최고입니더…….”

부산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김성열 씨는 감자와 쌀, 양파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도시 생활의 근심은 저절로 사라져 갔고, 아울러 빚도 점점 줄여 나갔다. 몸은 힘들었을지 모르나, 마음은 어디에 있는 것보다도 훨씬 편했다고 한다.

[오미자와 호두가 가져다 준 행복]

이렇게 돌아온 고향에서 김성열 씨는 나락 농사를 포기하고 상품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여기 어렸을 때부터 나락 농사 많이 했는데, 당시에는 나락 농사 말고 하면 안 될 줄 알았지. 그런 것[상품 작물] 한다고 하면 어른들 난리 나고 했었지.”

김성열 씨는 오미자와 포도, 고추, 호두 등 부가 가치가 높은 상품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김성열 씨가 재배하고 있는 해인산장 옆에 있는 호두나무 군락은 해인리 내에서 최대의 호두 수확량을 자랑한다.

[마을의 젊은 일꾼]

김성열 씨는 마을의 젊은 일꾼답게 큰일부터 소소한 일까지 젊은 열정으로 앞장서서 실천하고 있다. 2010년 현재 그는 해인리향우회 총무와 마을가꾸기추진위원회 총무, 마을회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마을 상포계, 마을 동제계 등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내가 한 것도 아니고, 마을 어르신들이 협조를 너무 잘해 주니깐, 나는 정말 편하게 했어요…….”

도시에서의 김성열 씨의 인생이 복잡하게 꼬인 매듭이라면, 귀농 후 고향에서는 그 매듭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마을 있어 보니까 참 좋죠? 여기만큼 좋은 곳 없습니데이.”

무더운 날씨에 나른한 오후, 오늘따라 인심 좋고 공기 좋은 해인리가 그리워진다.

[정보제공]

  • •  김성열(남, 1954년생, 부항면 해인리 주민, 해인리 향우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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