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05
한자 四通八達-交通都市金泉
영어의미역 Gimcheon, City of Transport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영호

[김천은 왜 교통의 요지가 되었나?]

김천 지역을 흔히 사통팔달의 교통 도시라고 한다. 김천 지역이 교통의 요지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삼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삼한 시대 김천 지역에 자리 잡은 감문국개령면 일대를 중심으로 성주 일대의 가야, 상주의 사벌국 등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하지만 경주 지역을 근거로 하여 주변 소국을 차례로 정복하며 성장한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에 의해 서기 231년 멸망한다. 사로국은 추풍령을 비롯한 김천 지역이 가지고 있는 교통로를 확보하고자 감문국을 정복했던 것이다.

이후 신라는 김천에 주(州)를 설치하고 추풍령을 넘어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고대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으로 삼았다. 이후 신라는 487년(소지왕 9) 주요 교통로에 역을 설치했는데, 이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유사들에게 도로를 수리하게 하였다.”라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천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찌감치 역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의 경우 개국과 함께 한양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교통망이 구축되는데, 김천은 영남대로의 4로 중 우로에 속해 웅천 내이포에서 김해·현풍·성주·김천·추풍령·영동·청주·죽산·양재를 거쳐 한양으로 연결되는 기간 도로망상에 놓여 있었다. 또 일찍이 영남 내륙의 중심 도시로 성장한 상주와 성주·선산의 중간에 위치하고, 영동을 비롯한 충청도와 무주 일원의 전라도, 거창을 통한 경상도 남쪽 접경에 위치해 군사적·경제적·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었다. 특히 추풍령은 소백산맥으로 가로막힌 영남 지역과 여타 지역을 연결하는 소통로로서 전략적인 요충지로 각광받았다.

[사통팔달의 교통 도시 김천의 중심에는 역(驛)이 있었다]

교통 도시로서의 김천 지역 역사는 고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중심에는 역(驛)이 있었다. 역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군사 정보, 사신 왕래에 따른 접대와 마필 공급 등을 위해 설치된 교통 통신 기관으로서 행정과 외교, 군사적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신라의 경우 487년(소지왕 9)에 역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역의 설치와 운영을 통칭하는 역참(驛站) 제도는 고려 시대 지방 행정 구역이 확립됨과 동시에 지방 호족 세력을 통제하기 위한 포석으로 정비되기 시작했다. 고려의 집권 세력은 전국을 22역도(驛道) 체제로 편성한 후 역의 규모에 따라 역전(驛田)을 지급하여 역의 조직과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게 했다.

조선 시대로 들어오면서 역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어, 병조(兵曹)-승여사(乘輿司)-역승(驛丞)-찰방(察訪)-속역(屬驛)으로 이어지는 역의 관리 감독 체제가 완비된다. 30리[약 12.9㎞]마다 역을 설치하여 전국을 종6품이 관리하는 44개의 역도(驛道)를 두고 538개의 속역(屬驛) 체제로 정비했다. 이후 역의 기능은 더욱 다양해져 공물의 운송과 내왕인의 규찰, 죄인의 체포와 압송, 파발과 봉수대의 관리 기능까지 수행했으며, 국경을 중심으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첩보 수집과 군수품 조달 등 유사시 국방의 일익까지도 담당했다.

1895년(고종 32) 근대적인 전화 통신 시설이 설치되기 전까지 전국에 설치된 역은 국가 통치 체제의 근간을 형성하는 기간(基幹)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각 지역에 설치된 역을 중심으로 역촌(驛村) 형태의 마을이 형성되고, 문물의 집산이 활발해져 시장이 개설되면서 상품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켜 지방 도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김천 지역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지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고 추풍령을 비롯한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되어 일찍이 역이 설치되고 도로가 정비되어 교통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김천 지역을 비롯한 경상도 일대의 광역 교통망을 총괄하는 김천도역의 설치는 김천이 조선 시대 전국적인 교통과 상업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김천 지역 지명을 근거로 한 역(驛)이 사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사병지역참조(高麗史兵志驛站條)』에서이다. 여기에서 경산부도(京山府道)[현 성주군]에 속한 25개의 속역(屬驛)으로 김산현김천역, 지례현의 작내역, 어모현의 추풍역, 개령현부상역, 지례현의 장곡역 등 5개 역이 나온다. 조선 세종 대에는 44역도, 538속역 체제로 개편되면서 김천도(金泉道)가 신설되고 관할에 17개 속역을 거느리게 된다. 이때 김천도는 본 역인 김천역을 비롯해 김산군의 추풍역·문산역, 개령현부상역·양천역, 지례현의 작내역·장곡역 등 김천 지역에 속한 7개 역을 비롯해 성주 답계역(踏溪驛)·안언역(安偃驛)·무계역(茂溪驛)·팔거신역(八莒新驛), 고령의 안림역(安林驛), 대구 범어역(凡於驛)·하빈신역(河濱新驛), 인동의 인동신역(仁同新驛)·약목신역(若木新驛) 등 17개 속역을 거느린 큰 규모의 역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어 세조 때 41역도, 524속역 체제로 정비되면서 김천도는 합천의 금양역(金陽驛), 초계의 팔진역(八眞驛), 함양의 근빈역(勤賓驛), 거창의 성기역(星奇驛)·성초역(省草驛), 대구 금천역(琴川驛)까지 포함한 21개 역을 관할하면서 규모가 확대되었다. 또한 영조 때 19개 소, 19세기 말에는 20개 소의 속역을 관장하면서 개항기까지 중심 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며 김천이 전국적인 교통 중심지로 부상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김천도가 관할하고 있던 역로(驛路)는 경상우도에 편제되어 있었는데, 부산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노정이 부산포-양산-김해-창원-영산-창녕-현풍-무계역-부상역-김천역-추풍역-황간-영동-옥천-문의-청주-진천-죽산-양지-용인-낙생역-양재역-서울로 이어졌기에 김천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경국대전(經國大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輿地圖)』, 『김천역지(金泉驛誌)』 등의 사료를 통해 볼 때 고려 시대부터 개항기까지 설치되었던 김천도 관할 속역은 15개에서 최대 21개에 이른다. 그 중에서 현재의 김천시에 속하는 김산군·지례현·개령현 관할에 설치되었던 역은 도역(道驛)인 김천역을 비롯해 김산군의 추풍역·문산역, 개령현부상역·양천역, 지례현의 작내역·장곡역 등 7개 역이다.

이와 같이 일찍부터 김천 지역은 지금의 국도 3호선국도 4호선 및 주요 간선 도로와 유사한 노선을 유지한 채 주요 거점에 역이 설치되어 역과 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물류의 소통로로서 발달했다. 그리하여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진 도로가 김천의 도시 발달을 가속화시켰고, 결국 사통팔달의 교통 도시로 발돋움하는 데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김천은 거대한 역촌(驛村)이었다]

1738년(영조 14) 편찬된 『김천역지』에 따르면 김천역은 지금의 김천시 남산동 김천초등학교 일대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늘날의 지방철도청장에 해당하는 종6품의 찰방(察訪) 한 명과 역장 한 명, 임씨(林氏)와 한씨(韓氏)가 세습하는 역리가 358명, 남자 종인 역노(驛奴) 292명, 여자 종인 역비(驛婢) 166명 외에도 역의 사무를 관장하는 일수(日守) 11명, 역의 경비 병력인 역보(驛保) 133명 등 총 1230명이 근무하는 곳이었다. 말의 경우 큰말 2필, 중말 2필, 작은말 6필을 보유했다.

김천역의 역사는 찰방 집무소인 동헌과 숙소인 내동헌이 12간, 형리청·양마청 등 82간, 기타 병기고와 찰방 이정기(李正基)가 세웠다는 관덕루(觀德樓)라는 다락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런 연유로 김천초등학교 교정과 남산공원에는 찰방 선정비들이 남아 있으며, 역이 있던 남산공원 일대는 지금도 찰방골로 불린다. 또한 지금의 김천시 황금동교회가 자리한 곳에 김천역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역전(驛田) 55결이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인력과 규모로 볼 때 김천역은 평균 거주 인력이 1,000명에 달하는 거대한 교통 마을이었던 것이다. 김천역은 1884년(고종 21) 현대식 우정 기구인 우정총국이 신설되면서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김천역을 둘러싸고 전해 오는 이야기들]

김천역은 그 역사만큼이나 많은 사연과 전설을 안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김천역의 찰방을 역임한 인물 중 한 명인 이중환(李重煥)[1690~1756]과 ‘사모바위’에 관한 이야기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은 1722년(경종 2)에 노론 관료들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지관(地官) 목호룡(睦虎龍)의 고변 사건에서 시작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참수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 빌미가 된 것은 이중환이 1717년(숙종 43)부터 1722년까지 김천도찰방으로 재임할 때 인척 관계에 있는 목호룡에게 말을 빌려 주었다는 죄목이었다. 역도에게 말을 제공했다는 혐의에 대해 이중환은 끝까지 목호룡이 말을 훔쳐 간 것이라고 주장해 간신히 유배형으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유배지에서 풀려난 이중환은 관직을 포기하고 당쟁이 없는 살기 좋은 땅을 찾기 위해 전국을 유랑했고, 그 결과 『택리지』라는 역작이 탄생하게 되었다.

김천을 대표하는 전설인 「사모바위 이야기」김천역과 관련이 있다. 여이명(呂以鳴)[1650~1737]이 저술한 『금릉승람(金陵勝覽)』에 이르기를 “사모 모양의 바위가 용두산[일명 모암산] 끝에 있었는데, 하로의 최씨와 이씨 가문에서 벼슬을 많이 하여 왕래하는 수레가 끊이지 않아 김천역의 역리(驛吏)들이 그 폐단을 견디지 못하여 남몰래 바위를 떨어뜨리자 하로마을에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고 침체함에 이르렀다.”고 적고 있다.

김천역의 역리가 사모바위를 깨뜨려 하로마을에서 과거 급제자가 줄어들자 마을 주민들이 하로마을 입구로 바위를 옮겨 놨는데, 그 후로 지금까지 사모바위는 하로마을 입구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조선 전기에 무수히 배출된 김천 출신 고관들이 고향 나들이를 하는 과정에서 김천역 역리들의 고된 일상이 사모바위 전설을 낳게 한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김천역의 역리(驛吏) 임천강(林千江)은 1581년 선조에게 역리의 과거 시험 응시권을 제한한 관례가 부당하다는 상소를 수차례 올려서 11년 만에 응시권을 부여 받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임천강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이조참의에 올랐으며, 그가 죽자 김천역의 역리들이 그 공을 기려 김천역 맞은편의 자산(紫山)에 계적사(啓迪祠)라는 사당을 짓고 추모했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때는 김천역 역리 한명구가 역도들에게 빼앗긴 역마를 10리를 추적하여 다시 찾아왔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김천역이 가장 먼저 왜병에게 함락되는 수난도 겪었으며, 이외에도 김천역의 객사에는 많은 고관들이 내왕하며 김천역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이참(李塹)의 시이다.

고관(古館)은 산기슭에 섰는데 위태로운 다리는 사천(沙川)에 떴네/ 땅이 기름지니 풍년이 들고 늙은 나무에는 꽃도 없구나/ 우리(郵吏)는 역마(驛馬)를 채찍하고 향풍(鄕風)은 시골 노래를 즐기네/ 수수히 회포가 동하는데 계절의 길손으로 지나는구나

[김천역에 속한 김천 지역 속역들]

김천도역에는 개항기까지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일원의 17개 내외의 속역이 있었다. 그중에서 김천 지역에는 부상역과 작내역, 양천역, 문산역, 추풍역, 장곡역 등 6개 역이 있었다. 부상역개령현에 속하여 고려 시대에 설치된 역으로, 지금의 김천시 남면 부상리 부상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김천역지』에 따르면, 부상역김천역으로부터 30리 거리로 관사 3간, 창고 2간, 역리 116명이며, 일수(日守) 9명, 역보(驛保) 43명 등 총 168명이 있었다. 또한 창고 2간, 전답 54결, 중말 2필, 작은말 4필을 보유했다.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부상초등학교 운동장에 수기의 역장 선정비와 역에 딸린 우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으며, 다만 말구리와 당말리 등 말과 관련된 지명만이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부상고개 아래의 남면 운곡리 둔골[屯谷]부상역에 딸린 역전(驛田) 54결이 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역촌인 부상마을은 역로와 역마의 안녕을 기원하는 공동체 신앙이 전승되어 왔는데, 상당(上堂)·마당(馬堂)·중당(中堂)·하당(下堂)이 그것으로, 특히 상당 인근의 백운사(白雲寺)부상역의 비보사찰(裨補寺刹)로서 매년 4월 초파일에 역마의 안위를 기원하는 안마제(安馬祭)를 올렸다고 한다. 이렇듯 부상역백운사는 역을 매개로 공동체 신앙의 제의 장소를 제공했으며, 김천역 찰방은 사찰의 후원자로서 사찰 중수에 따른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부상역이 있던 남면 부상리 일대는 예부터 성주·대구·선산·상주·김천·인동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여서 많은 관리들이 내왕을 했는데, 2008년 김천-현풍 간 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마을에 개통되어 다시 교통의 요지로 급부상했다. 조선 전기 대표적인 지식인인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부상역을 소재로 하여 남긴 유명한 시가 한 수 전한다.

「행도부상원(行到扶桑院)」[부상역에 당도하여]

난산귀로호고저(亂山歸路互高低)[돌고 도는 산길이라 높고 높은데]

행도부상정오계(行到扶桑正午鷄)[부상에 당도하니 낮닭이 우네]

운도한풍고영북(雲度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설잔유수단교서(雪殘流水斷橋西)[눈 녹은 개울물은 다리 밖에 흐르네]

광음역여신여기(光陰逆旅身如寄)[천지를 시벽삼아 세월 속에 몸 부치고]

기환타향사전미(羈宦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 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자소시광유고태(自笑詩狂猶古態)[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檢古人題)[벽장 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또 대제학을 지낸 명문장가 강혼(姜渾)[1464~1519]이 지은 「부상역춘야(扶桑驛春夜)」도 유명하다. 경상감사로 지방을 순행하던 강혼이 성주의 관기(官妓) 은대선(銀坮仙)과 정이 들어 부상역까지 함께 왔는데, 이불은 벌써 개령역으로 보낸 뒤라 부상역에서 이불도 없이 하룻밤을 보내며 지은 시라고 전한다.

「부상역춘야」[「부상역의 봄밤」]

부상관이일장환(扶桑館裏一場歡)[부상역의 한바탕 즐거움이여]

숙객무금촉신잔(宿客無衾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십이무산미효몽(十二巫山迷曉夢)[열두 무산 선녀 새벽꿈에 어른거린다]

역루춘야부지한(驛樓春夜不知寒)[역루의 봄밤은 추운 줄도 몰랐구나]

지례현 관할의 작내역은 지금의 김천시 구성면 작내리, 속칭 평지마을에 있었던 역으로, 김천역에서 30리 거리에 위치했다. 관사는 없고 창고 2칸, 역전 31결, 중말 2필, 작은말 2필, 역리 25명의 규모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암행어사가 김천 지역을 순시할 때 작내역의 역졸들을 대동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다.

장곡역은 지례현 관할로 지금의 김천시 대덕면 관기리 장곡마을에 위치했던 역이다. 고려 시대 이 마을이 두의곡부곡(頭衣谷部曲)으로 불렸기에 처음에는 두의곡역(頭衣谷驛)이라 하다가 뒤에 장곡역으로 고쳐졌다. 김천역에서 70리 거리이며, 관사는 없고, 창고 2간, 역전 31결, 중말 2필, 작은말 2필, 역리 25명이 있었다.

추풍역은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에 있었던 역이다. 고려 후기까지 어모현의 관할이었는데, 조선 전기인 1416년(태종 16) 어모현김산현이 통합되어 김산군으로 승격되면서 김산군 관할로 들어왔다. 충청도와의 경계에 위치한 추풍역은 김천역에서 40리 거리에 있었다. 추풍(秋風)이란 역명은 『경국대전』에 추풍(秋豊)으로 바뀌어 나타나는데, 이것은 추풍낙엽(秋風落葉)이 연상된다 하여 과거 응시자를 비롯한 내왕객들로부터 추풍령이 외면 받은 사실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736년(영조 12)에 간행된 『여지도』에 따르면, 추풍역에는 관사가 32간, 창고 1간, 큰말 2필, 중말 2필, 작은말 10필, 역리 32명, 노비 4명, 일수 14명, 역보 7명이 있었고, 역전은 55결 규모였다. 또 역의 구성원별 성씨는 현풍 임씨와 파평 윤씨, 김산 임씨가 주를 이루었다.

문산역은 조선 시대에 신설된 역으로 『세종실록지리지』에 김산신역(金山新驛)으로 처음 나타나며, 지금의 문당동 문산마을에 있던 역이다. 통상 30리마다 1개 소의 역이 설치되는 관례를 깨고 김천역에서 8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역을 설치한 것은, 당시 인근 배천마을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이 살면서 경렴당(景濂堂)을 개설하자 전국의 선비들이 앞 다투어 김천 지역을 찾게 되면서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김천역에서 부득이 문산역을 신설하게 된 것이다. 1738년(영조 14) 간행된 『김천역지』를 근거로 본 문산역은 김천역으로부터 10리 거리로 관사는 없고 창고 1간, 역리 63명, 역노비 68명, 일수 14명, 역보 3명 등 총 148명이며, 역전은 31결 규모였다. 지금의 문산리는 문산역의 역리들이 정착해 형성한 마을이다.

양천역은 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마을회관 일대에 있었던 역으로 조선 세종 때 개설되었으며, 부상역과 함께 개령현에 딸린 두 개의 역 중 하나이다. 『김천도역지』에 따르면 양천역은 김천역에서 20리 거리로 관사는 없고, 창고 1간, 역리 144명, 역노 10명, 역비 2명, 일수 10명, 역보 22명 등 188명이며, 중말 2필, 작은말 3필, 사창 1간, 역전(驛田) 33결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 앞에는 동부리와 경계를 이루는 고개가 있는데, 지금도 역마고개라 불린다.

[김천장을 전국 5대 시장으로 올려놓다]

김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시장이다. 통상 ‘짐전장’으로 불린 김천장은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 중엽까지 평양과 개성, 강경, 대구와 더불어 전국 5대 시장의 하나로까지 발전해 김천 지역이 근대 상업 도시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김천 지역은 찰방역인 김천역을 중심으로 역에 종사하는 인력과 주변에 형성된 원(院)과 주막, 역과 내왕객들에게 물품을 조달하는 상인 등이 역 인근에 정착하면서 마을로 발전한 전형적인 역촌(驛村)의 형태를 띠고 있다.

전통 시대의 역은 국가 운영에 필수적인 교통과 통신, 물자 운송이라고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중추 기관이었기에 사람과 말의 이합집산이 빈번하고 물자 운송이 용이한 지점에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따라서 역을 중심으로 문물의 집산이 활발했고, 주변 요지에 시장이 개설되어 상거래가 번성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역사적으로 역 주변에 큰 시장이 개설되어 교역의 중심지로 발달된 사례는 많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유민이 급증했는데, 이들이 보부상과 같은 형태의 초기 상인으로 상거래에 뛰어들었고, 화폐 경제가 발달하면서 상거래가 집약된 형태인 시장이 전국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해 편리한 접근성과 역을 통한 도로 여건의 편리성은 조선 후기 들어 김천장을 삼도시장(三道市場)이라 불리게 하며 큰 장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 경상도의 중앙 접경에 위치해 각도의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어 세 지역 특산물의 종합 백화점 같은 장의 특성을 보인 것이 큰 매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김천 지역은 거미줄과 같이 역과 역을 연결하는 도로망을 갖추면서 전국의 상인들을 불러들여 1800년대 말 남대문 밖에서는 강경·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시장의 하나로까지 발돋움하기에 이르렀다. 김천장의 주요 거래 물품은 방짜유기와 우피(牛皮), 삼도의 농특산물, 말린 생선 등이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 부설과 함께 김천 지역 상권에 매료된 일본 사람들이 대거 김천에 정착하게 된다. 이 또한 김천 지역이 가진 지리적 장점과 우월한 교통망을 주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김천장 못지않게 김천우시장도 전국 최대 규모로 형성되어 번성기를 누리면서 김천 지역은 일찍부터 도축업과 우피 산업이 발달하였다. 이는 일제 강점기 김천 지역에 조선피혁주식회사가 설립되어 김기진이란 우피 거상이 등장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또 면 단위의 시장들도 번성을 누려서 거창과 무주 경계로서 번성한 지례장과 선산 접경의 감문 배시내장이 오랫동안 큰 장을 유지했다. 시장을 통한 상업의 번성은 인구의 증가와 세수의 확대로 이어져 김천이 1949년 경상북도에서 포항과 함께 가장 먼저 시로 승격된 배경으로 작용했다.

[영남 제일의 관문으로 자리한 추풍령]

흔히 김천 지역을 대표하는 상징어 중에 ‘영남제일관문(嶺南第一關門)’이란 표현이 있다. 김천 지역이 영남으로 들어오는 첫 번째 고장이라는 뜻으로, 경상도로 대표되는 영남 지방이 시작된다는 자긍심이 함께 담겨 있기에 추풍령에서 김천시내로 들어오는 국도 변에 거대한 관문을 세워 두고 김천의 랜드마크로 활용하고 있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며 주름진 그 얼굴에 이슬이 맺혀 그 모습 그립구나 추풍령고개/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싸늘한 철길 떠나간 아쉬움이 뼈에 사무쳐 거칠은 두 뺨 위에 눈물이 어려 그 모습 흐렸구나 추풍령고개[가요 「추풍령」 전문]

대중가요 속에 등장해 관심을 끌었던 추풍령은 사실 221m에 불과한 낮은 고개이다. 이러한 고개가 노랫말에서와 같이 숱한 역사적 사연을 갖게 된 것은 추풍령이 가지고 있는 교통로로서의 역사적 가치와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충청북도 영동과 경상북도 김천의 경계를 이루는 추풍령은 삼국 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 있었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겨루던 삼국 시대에는 소백산맥에서 가장 낮은 추풍령이 조령·죽령과 함께 일찍이 중요한 교통로로서 주목을 받았고, 임진왜란 때는 왜군의 북진을 막기 위한 혈전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추풍령을 통과하면서 문경·조령과 단양·죽령 등으로 삼분되어 있던 소백산맥상의 교통의 중심이 추풍령으로 급속히 집중되었다. 이후 추풍령국도 4호선과 고속철도가 지나가면서 우리나라 육상 물류가 대부분 관통하는 교통의 대동맥으로 자리 잡았다.

[감천을 통한 뱃길도 한몫을 하다]

감천은 김천시와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의 경계를 이루는 봉화산에서 발원하여 김천시를 관통해 북동쪽으로 69㎞를 흘러 구미시 선산읍에서 낙동강으로 합류되는 낙동강 중류부의 큰 하천이다. 김천 지역이 감문국이 성립된 삼한 시대부터 요충지로서 부상하게 된 배경에는 낙동강으로부터 영남 내륙의 서편으로 접근이 가능한 감천이란 큰 하천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감천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 겨울 갈수기를 제외하고는 연중 나룻배의 통행이 가능했기에 수로를 이용한 거창, 무주, 추풍령 일대로의 화물 운송이 가능했다.

김천장은 감천 변 모래밭에 난전 형태로 형성되었는데, 김천장의 번성 배경에는 남해안에서 운송된 어류와 소금, 해산물 들이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선산으로부터 작은 배에 옮겨져 감천을 따라 올라와 김천장이 서는 감천 변에 정박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김천장의 주요 거래 물품 중 해산물의 비율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며, 감천의 백사장에서 염장되거나 말려져 1차 가공을 거친 해산물들은 상주·영동·무주·거창 등지로 공급되는 해산물의 영남 내륙 지방 보급소 역할을 수행했다. 감천 유역 일대의 마을 지명에서 ‘배다리’나 ‘배시내’라는 지명이 다수 보이는 데서도 이 같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실학의 선구자이자 인문 지리학의 원조로 추앙받는 이중환(李重煥)[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에서 감천의 효용성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김산(金山)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물이 합해져 감천(甘川)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에 접어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知禮), 김산(金山), 개령(開寧)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의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서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 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가 많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중환은 1717년(숙종 43)부터 1722년(경종 2)까지 김천도찰방으로 재임하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관직을 접고 30년간 전국을 유람하며 풍토와 지리, 산물, 교통을 집대성하여 『택리지』를 편찬한 인물로, 물산 교역을 중시한 실학자답게 김천 지역이 가진 교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는 김천역의 찰방으로 근무한 경험에 기초해 김천이 가진 교통에 주목했는데, 김산·지례·개령 지역을 관류하며 낙동강과 연결되는 감천이 가진 수로(水路)의 효용성과 중요성을 일찌감치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KTX를 통해 교통의 중심으로 다시 발돋움하다]

김천 지역은 교통의 편리성으로 인해 일찍이 시장이 번성하여 상업 도시로서 발전을 구가하였다. 하지만 1950년대 이후 전국적으로 도로망이 정비되면서 교통이 평준화되자 김천 지역이 가지고 있던 교통의 이점이 사라져 버렸다. 특히 1970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전국의 일일 생활권화를 촉진시키면서 김천 지역을 단순히 거쳐서 가는 통과 도시로 만들어 버렸다. 더욱이 상주와 선산, 구미, 거창, 무주 등을 아우르는 중심 도시의 자리를 산업화·정보화라는 발전 단계에 적절히 대응한 인근의 구미 등지에 내어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민선 지방 자치 시대를 맞아 새로운 김천 건설에 대한 다양한 계획과 사업이 추진되면서, 마침내 21세기 교통 혁명이라 불리는 한국고속철도[KTX] 김천역사의 건립이 확정되어 혁신 도시 건설과 함께 김천의 옛 명성을 되찾을 수 있는 역사적인 발판이 마련되었다. 2010년 11월에 김천시 남면 옥산리 일원에 KTX 김천(구미)역이 건립되어, 김천시는 구미, 상주, 무주, 거창, 성주 일원의 여행객을 김천으로 유입하는 효과와 함께 신물류 산업의 중심으로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1) 운도한풍고영북(雲道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운도한풍고영북(雲度寒風高嶺北)[찬바람에 구름은 재 넘어가고] 2) 기관타향사전미(羈官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 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기환타향사전미(羈宦他鄕思轉迷)[타향살이 매인 벼슬 생각만 어지러워] 3) 자소시광고요웅(自笑詩狂古요熊)[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자소시광유고태(自笑詩狂猶古態)[우습다 시에 집착함은 예전처럼 남아] 4) 숙객무념촉신잔(宿客無念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숙객무금촉신잔(宿客無衾燭燼殘)[나그네 이불도 없이 촛불은 재만 남았네]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撿古人題)[벽장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벽간중검고인제(壁間重檢古人題)[벽장속 예전의 시를 다시 살펴보게 하는구나]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