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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13
한자 金泉-儒敎文化
영어의미역 Confucian Culture of Gimcheon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근구

[사모바위 전설을 탄생시킨 경렴당(景濂堂)]

아버지 김숙자(金叔滋)로부터 학맥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58세 때인 1489년(성종 20)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아내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임지[개령현감] 따라 면학하던 곳이요, 아내와 아들 김목아(金木兒)가 묻혀 있어 가장 애착이 가는 김천의 백천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자신의 집에 서당인 경렴당(景濂堂)을 짓고 평소 공부하던 경서(經書) 등 천 권의 서책을 옮겨 학문 강론의 거점으로 삼았다.

경렴당이란 명칭은 김종직이 송나라 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를 경앙(景仰)한 데서 붙여진 당호이다. 또한 김종직은 주돈이가 연을 좋아했기에 경렴당 앞에 못을 파고 연을 심기도 하였다. 새로 증설된 문산역의 이름도 김종직이 주돈이와 더불어 문문산(文文山)을 숭앙했기에 붙여진 이름으로 여겨진다.

김종직은 중앙이든 지방이든 관직에 있으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는데, 수제자인 정여창(鄭汝昌)김굉필(金宏弼)은 함양군수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들이다. 그러한 김종직이 김천에서 서당을 개설했으니, 그 자체가 큰 사건이라 하겠다. 당시는 김숙자가 개령현감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고 학풍을 쇄신하여 큰 덕을 쌓았기에 지역민들의 숭앙을 받고 있던 때였다. 그런데 그 아들이자 영남 사림파의 종주로 성종의 신임을 받고 있는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더욱이 스승의 칭찬 한 마디로도 출세 길이 열렸던 때라 원근에서 선비들이 구름처럼 운집하였다. 경렴당은 후세까지도 명소로 내려온 듯, 1682년(숙종 8)에 제작된 지도인 「동여비고(東輿備攷)」에도 ‘김종직 경렴당(金宗直 景濂堂)’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김천 지역의 대표적인 설화인 「사모바위 이야기」는 이러한 경렴당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내용인즉 “김산을 찾아드는 고관대작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구름처럼 찾아들어 이들을 뒷바라지하느라 김천역의 역리들은 밤잠마저 설치는 괴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한 역리의 꿈속에 도사가 나타나 사모바위 산에 있는 ‘사모바위’를 없애면 편히 지낼 수 있다고 일러 주었다. 역리들이 도사가 일러 준 대로 그 바위를 산 아래로 굴려 떨어뜨렸더니 그 뒤로는 선비들의 발길도 끊어지고 과거도 없어져 역리들이 편해졌다.”는 전설이다.

그 뒤 언젠가 하로(賀老)[현 김천시 양천동] 사람들이 지난날의 영화를 되찾으려고 산 아래 떨어진 사모바위를 마을 어귀에 옮겨 놓고 근래까지 금줄을 치고 동제를 지내 오다가 지금은 무속인들이 촛불을 켜고 소원 기도를 드리며 신령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설화의 배경을 뒷받침하는 사실이 있다. 문산역(文山驛)의 증설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역은 대체로 30리마다 설치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문산역은 김천에서 5리에 불과하고, 경렴당이 있는 배천마을 앞 50m 떨어진 들판에 설치되었다. 지금의 문산리는 그때 역리들로 형성된 마을이라고 한다.

[김산 문향(金山 文鄕)이라 불리다]

김종직이 김천에 경렴당을 세우고 기거하자 김천 지역 유림들이 앞 다투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면서 ‘김산 문향’이란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김천 지역에는 성리학이 확산되었다. 김천의 역사적 인물들 중 김종직 문하의 영남 사림파 출신들은 다음과 같다.

조위(曺偉)·조신(曺伸) 형제는 김종직의 손아래 처남들로 창녕 조씨다. 조위는 호가 매계(梅溪),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무오사화에 순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에 부관참시 당했다. 두보의 시를 언해[『분류두공부시언해(分類杜工部詩諺解)』]하고 유배 가사를 남긴 학자이다. 지금 그를 기리는 매계 백일장이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 율수재에서 매년 5월에 열리고 있다. 조신은 호가 적암(適庵)이다. 뛰어난 시인으로 서얼인데도 서장관으로 중국에 7차, 일본에 3차 파견되고 효강(孝康)으로 시호까지 받은 시인이다.

허종(許琮)·허침(許琛) 형제는 양천 허씨로 조마 출신이다. 허종은 호가 상우당(尙友堂), 우의정을 지낸 청백리로 여진족을 물리친 공으로 양천군으로 피봉되었다. 허침은 좌의정을 지낸 청백리로 조위와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동료이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유명한 허침교 일화의 장본인이다.

최선문(崔善門)화순 최씨로 양천동 하로 출신이다. 호는 동대(東臺),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공조판서를 지낸 청백리로, 아들 5형제가 김종직의 제자로 모두 등과하여 사람들이 하로를 오자등과방(五子登科坊)이라 불렀다. 첫째 아들 최한공(崔漢公)은 군수를 지낸 뒤 고향에 은둔하고, 둘째 아들 최한후(崔漢侯)는 대사간 동부승지를 지냈고, 셋째 아들 최한백(崔漢伯)은 무과로 첨절제사, 넷째 아들 최한번(崔漢藩)은 지평을 지내고 사화를 피해 지리산에 숨었다. 다섯째 아들 최한남(崔漢男)은 문장이 뛰어났으나 벼슬을 멀리했다. 이 밖에 최씨 집안의 최한정(崔漢楨)은 대사간을 지냈고, 최한보(崔漢輔)는 대사성, 최한량(崔漢良)은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이들 모두 김종직의 문하생들이었다.

해주 정씨 정유공(鄭由恭)감문 탄동 출신으로 현감을 지냈는데, 그의 아들 3형제[정철견(鄭鐵堅)·정은견(鄭銀堅)·정석견(鄭錫堅)]와 두 손자가 모두 김종직 문하의 학자들이었다. 셋째 아들 정석견은 호가 한벽재(寒碧齋)로, 이조판서를 지낸 청백리다. 김종직의 문집을 편찬하고 산자관원(山字官員)의 일화를 남겼다.

정철견의 아들 정붕(鄭鵬)은 호가 신당(新堂)이고 교리를 지낸 청백리인데, 갑자사화 때 영덕으로 유배된 학자이다. 정은견의 아들 정난(鄭鸞)도 강직한 학자로 승지를 지내고 조광조 신원에 앞장선 정의파이다.

김시창(金始昌)해풍 김씨로, 호는 남정(嵐亭)이다. 조선이 건국되자 불사이군의 의리를 지키고 김천으로 낙향한 김효신의 손자이다. 벼슬을 주었으나 멀리하고 충효로 일관했다. 영남 사림파의 참모 격으로 기내다가 별세하니, 효자로 정려가 내리고 절효(節孝)로 시호를 받았다. 경렴서원과 송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세인(李世仁)성산 이씨로 개령 출신이다. 벼슬은 이조참의에 올랐다, 강직한 성품으로 유자광을 세 번이나 탄핵했다. 갑자사화에 갑산으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 때 풀려났다. 정이교(鄭以僑)영일 정씨로 봉계 출신이다. 벼슬은 교리에 그쳤으나 김일손·조위 등과 금란계(金蘭契)를 조직한 영남 사림파의 신진 학자이다. 무오사화에 함흥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곳에서 생을 마쳤다. 금란계 현판이 지금도 진주 촉석루에 걸려 있다.

이약동(李約東)의 호는 노촌(老村)이고, 시호는 평정(平靖)이다. 하로 출생으로 김종직보다 연상이나 『동국명현록(東國名賢錄)』에는 김종직의 문하로 적고 있다. 호조참판 등 여러 관직을 지낸 청백리로, 제주목사를 지냈다. 괘편암(掛鞭岩)·투갑연(投甲淵) 등 일화를 남긴 청백리이다.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으로 촉발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영남 사림파 학자는 모두 죽음을 당했거나 유배되고 그들의 문집은 한 권도 남김없이 몰수되었는데, 그 피해는 경렴당을 중심으로 조성된 김산 문향인 김천이 유독 심했다. 한 가지 예로 최선문의 묘비를 김종직이 찬했다 하여 그 후환이 두려워 비마저 묻어 없앴다고 한다. 이와 같이 김산 문향은 반세기를 지탱하지 못하고 소멸되고 말았다.

[유교적 질서가 동네 이름에서도 실현되다]

김천 지역에서 조선의 성리학 질서가 마을 이름에 잘 녹아 있는 대표적인 곳이 대항면 대성리 공자동구성면 상좌원리 일대이다. 이해가 임진왜란 이후 동지사로 중국에 가서 공자의 화상을 한 점 얻어 와 고향인 대항면 자신의 집에 모신 후로 사람들이 이 자연 마을을 공자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 이름을 처음 정할 때 공자의 제자인 안연(顔淵)을 기려서 안연대(顔淵臺)라고 했다는데, 이를 입증하듯 마을 서남쪽의 석상천 변 넓은 바위에 ‘안연대(顔淵臺)’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다.

공자동 바로 아랫동네가 문도동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공자동이 어디에 있냐?”고 물어 동네 이름을 문도동(問道洞)[‘도(道)’는 공자를 지칭]이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현재는 ‘문(問)’ 자를 없애고 도동이라 부른다. 혹은 성현의 말을 잘 듣고 도를 깨우치는 마을이라 하여 문도동[혹은 들은동]이라 부른다, 현재까지도 이 동네에는 연안 이씨가 세운 ‘도동서원’이 자리 잡고 있다. 도동의 바로 아랫동네가 상좌원이다. 상좌원은 공자동을 돕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문도동과 공자동 사이에 있는 상거리의 자연마을은 공자의 아들 이름을 따서 백어라고 불렀다.

[남인과 노론이 융화를 이루다]

김천 지역 유림은 내·외부적으로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양반 상호간의 결속을 학계(學契)를 통해 형성하였다. 김천 지역에 세거하던 유력한 사족 가문 중 봉산면연일 정씨창녕 조씨, 구성면성산 여씨연안 이씨, 과내·조마면진주 강씨, 감천면화순 최씨, 대덕면김녕 김씨, 어모·대항·부항면 일대의 벽진 이씨 등은 영남 남인 계열이면서도 정치·학문적으로 기호 지방 노론 계열에 기울어지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조선 후기 김천 지역의 ‘강(姜)·여(呂)·조(曺)·정(鄭)’ 4대 성씨 중 창녕 조씨연일 정씨 일부, 벽진 이씨화순 최씨 일부, 지례 지역의 연안 이씨·하빈 이씨·벽진 이씨·순천 박씨·거창 신씨·성산 이씨 일부가 노론에 속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영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특수한 경우였다.

19세기 후반 김천 지역 유림들은 대학자와 사제 관계를 맺고 영남 지방의 여러 군현 및 호남·호서 일대의 인사들과 교류를 통해 여러 학맥을 형성하였다. 19세기 후반 퇴계학파가 주도하고 있는 영남 성리학은 크게 다섯 학맥으로 분파되고 있었다. 첫째는 안동권의 전통적인 정재학파(定齋學派)[유치명], 둘째는 성주권의 한주학파[이진상], 셋째는 칠곡·창녕권의 사미헌학파(四未軒學派)[장복추], 넷째는 상주권의 계당학파[유주목], 다섯째는 김해권의 성재학파(性齋學派)[허전] 등이다. 그 외 경상북도 서북 지역에서 연재(淵齋)·심석재학파(心石齋學派)[송병선·송병순], 경상남도 서부에서 노사학파[조성가·정재규]와 간재학파[성기운]가 있었다.

김천 지역에 세거하던 사족으로 남애(南厓) 최창락(崔昌洛)과 만동 최창남 형제, 학호 여위용이 성제학파, 최창락의 아들 양오 최봉길·구재 최학길과 남은 여중룡·이은 여채용은 사미헌학파, 편대언과 편두언[절강 편씨] 형제·박흠재·이현문·김성무 등은 계당학파(溪堂學派), 경호 이의조[연안 이씨, 지례면 상원리]는 연재·심석재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였다. 그 외 유치명의 학맹을 계승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의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김천 지역에 미쳤고, 김익수[의성]도 유치명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여러 학맥 중 연재·심석재학파는 기호학파 계열이다. 어모면대항면, 부항면 일대에 거주하던 벽진 이씨의 삼봉 이우선·행초 이우연 등, 구성면대덕면 일대에 거주하던 은진 송씨의 석연 송흠재·송파 송흠정 등, 지례 남평 문씨의 문맹곤, 창녕 조씨의 조세영, 일선 김씨의 김기택과 박인현, 하빈 이씨의 이창의, 연일 정씨의 정염기·정석채 등이 연제 송병선의 문하생이었고, 지례 해주 오씨의 오우선 등이 심석제 송병순의 문하생이었다.

지례면 상원리의 연안 이씨 이경균·이돈영·이석균 등은 기호 노론의 성담 송환기연제 송병선, 심석제 송병순의 문하였지만 영남 남인의 사미헌 장봉추 문하에서 수학을 하였다. 특히 소암(小庵) 이석균곽종석·이승희·장석영 등과 교유하며 문하에서 이현기 등의 족질들을 훈도하였다. 이렇듯 김천 지역에서는 영남 남인 계열과 기호 노론 계열의 학맥을 형성하는 학통과 다양한 학풍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학맥과 학풍이 개항기 김천 지역의 국권 회복 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한 김천의 유림들]

김천의 유림들은 지역에서 구국 운동, 의병 운동, 계몽 운동 등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1896년 대일 항전을 위해서는 경상도 서북부 지역인 상주·선산·김산·개령·지례 등지에서 유생들이 연합으로 김산의진을 창설하였다. 김산의진의 진용 중 김천 출신은 김기력[중군], 여중룡[찬획], 여영조[참모], 여승동[군량도감], 이용주[찬획], 강일선[찬획], 이상와[찬획], 이숭주[종사], 최동은[종사], 조석영[군량도감], 이현삼[군량도감], 배헌[장재관] 등이다. 이들은 1896년부터 1909년도까지 ‘을미 의병 운동’, ‘정미 의병 운동’, ‘서울 진공 대작전’ 등에 참여하였다.

1905년 포츠머스강화회가 개최될 무렵 일본에 의한 한국 보호국화를 반대하는 충의사(忠義社)가 1904년 8월경에 조직되었다. 김천 유림에서는 여영조·여중룡·이상우·이병구·박의현·이동성·이승보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 중 여영조·여중룡 등은 김산의진에서 활동했던 유생들이다.

1905년 을사조약 전후 김천 지역에서 상경한 유림들은 상소(上疏)·장서(長書)·기서(奇書)·상서(上書)·투서(投書)·격문(檄文)·통문(通文) 등을 정부 요로, 주한일본군육군사령부·주한일본공사관 및 각국 공사관, 『황성신문』과 같은 언론 기관 등에 투고하는 등 배일 언론 투쟁을 통해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표적 인물이 여중룡·이건석·우용택·이병구·강원형 등으로, 이들은 대한협회 김천지회·교남교육회 김천지회 등과 같은 계몽 운동 단체를 설립하여 교육 구국 사업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05.13 내용 수정 [남인과 노론이 융화를 이루다] 민재학파[성기운] → 간재학파[성기운]
2020.05.13 내용 수정 여중용 → 여중룡 ----------------------------- 농은 → 남은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서북 지역에서 연재(淵齊)·심석재학파(心石齋學派)[송병선·송병순] ->서북 지역에서 연재(淵齋)·심석재학파(心石齋學派)[송병선·송병순
이용자 의견
김** "개최될 무렵 일본에 의한 한국 보호국화를 반대하는 충의사(忠義社)가 1904년 8월경에 조직되었다. 김천 유림에서는 여영조·여중용·이상우·이병구·박의현·이동성·이승보 등이 참여했는데, 이들 중 여영조·여중룡 등은 김산의진에서 활동했던 유생들이다." 이문장에서 여중룡과 여중용은 여중룡으로 통일해 주십시오.
  • 답변
  • 디지털김천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당 내용에 대하여 확인 후 수정하였습니다. 의견 개진에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0.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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