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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30
한자 宗敎
영어음역 Jonggyo
영어의미역 Religion
분야 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기훈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초월적인 존재 및 깨달은 존재, 혹은 신을 믿고 따르던 모든 신앙 행위.

[개설]

종교(宗敎)라는 말 자체는 믿음 혹은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가운데 최고의 가르침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종교’라는 말은 한국 고전 문헌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아도 1800년대를 지나야 오늘날에 말하는 종교의 의미가 보인다. 그 전대의 신앙과 믿음에 관한 포괄적 용어로는 단지 교(敎)가 있었을 뿐이다. 삼국 시기 불교가 처음 들어와 불교를 진흥하고자 하였을 때도 흥법(興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고, 조선 말기 천주교가 들어 왔을 때도 그 이름은 서학(西學)이라는 명칭이었다.

하지만 종교성 자체는 인간의 생존과 더불어 있어 왔다. 옛날 사람들도 바라는 것이 있고 두려워하는 것이 있었다. 기원하는 마음과 혐오하는 마음은 바로 종교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상고 시대의 샤머니즘, 즉 원시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원시 신앙은 단군 신화나 신라에서의 소도(蘇塗)처럼 일정 지역에서 가무와 축제의 형식을 가진 신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오늘날 토속 신앙과 연결되어 굿이나 마을제[洞祭]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토템적 신앙은 오늘날에도 성황당이나 당산(堂山) 등의 형태로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큰 종교라 할 수 있는 불교와 기독교 속에도 모두 포함되어 있다.

[변천]

김천 지역의 종교적 시원 역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의 기반 아래에서 발전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지금도 이러한 영향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원시적·토속적 종교성에 이성(理性)이 부여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유교(儒敎)라고 할 수 있다. 유교는 기원을 전후로 하여 한반도에 전래되었는데, 이는 한문(漢文)이라는 문자적 체계의 전래와 큰 상관이 있다. 유교는 혈연을 중시하는 원시 씨족 공동체의 유지라는 목적에서 탄생하였고, 그 완성은 공자(孔子)가 하였다. 비록 공자가 창시한 유교의 본질이 이성적인 것이기는 하나, 그 이면에는 혈연과 계급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혈연과 계급을 동일선에 놓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혈연과 계급을 철저하게 제도로 현실화시킨 것은 조선이 아니라 신라였다.

또한 5~6세기 불교가 한반도 북쪽에서 남쪽으로 전파될 때 제도화된 혈연과 계급의 모순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김천 지역은 북쪽의 불교가 남쪽으로 흘러가는 길목에 있었다. 이는 백제 불교가 율종과 아미타가 중심이 되고 8세기 경상북도 북부의 불교가 화엄이 위주가 되는 것에서 김천 지역이 불교의 핵심 유입 경로임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김천 지역 불교의 특징이 선종이라는 데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직지사(直指寺)의 창건 설화는 아도(阿道)[혹은 阿頭, 墨胡子]와 관련된 설화이다. 아도순도(順道)[372년 전교하러 옴]에 이어 374년에 불교를 전한 인물이다. 이렇게 빨리 직지사가 세워졌을 리는 없다. 이차돈(異次頓)의 순교가 528년이고 신라가 정식으로 불교를 인정하고 법흥사를 짓는 것이 550년 이후의 일이다. 또한 불교와 유교를 혼합하여 세속오계를 지었다는 원광(圓光)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사람이다. 아무래도 김천 지역의 불교가 오늘날의 특색을 이룬 것은 신라 말 고려 초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성립과 함께한 것인 듯하다.

조선에 들어서면서 특히 세종 시기 불교의 종파는 선종과 교종 두 파밖에는 없었으며, 성종중종 시기 불교는 산중 불교로 명맥을 잇고 있었다. 이를 대체한 것이 조선 성리학이다. 물론 이는 유교의 재등장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시기 유교는 이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무장을 새로이 한 것으로 주자학적 성리학을 위주로 한 신유학(新儒學)이었다.

김천 지역은 조선 유학에 있어서는 지역적 한계가 있었다. 안동 지역에서 영남 유학의 기세가 워낙 강한데다가 인근 지역인 상주와 선산, 심지어는 거창 지역까지도 영남의 유학풍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호학파의 영수인 송시열(宋時烈)의 근거지인 충청도와 접해 있었고 송시열의 유적지가 또한 김천에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김천 지역은 유학에 있어서는 절충적인 면모를 보인다. 예를 들어 김천의 덕림서원(德林書院)김종직(金宗直)[선산]·정붕(鄭鵬)[선산]·정경세(鄭經世)[상주] 등 정통 영남 사림을 배향하고, 춘천서원(春川書院)송시열을 배향하고 있다. 그럼에도 유학적 성향 혹은 지역적 성격에 따른 배타성이 없었다. 이처럼 신사상이 김천에서는 잘 유통되었다.

천주교가 처음 조선에 들어올 때는 서학(西學)이라는 이름으로 들어왔다. 천주교는 해외로 눈을 돌린 유학자들에 의해 1800년을 전후로 하여 처음 유입되었고 연구되다가 천주 신앙으로 발전하였다. 경상북도 지역에서 천주교의 근원지는 대구 인근인 지천과 팔공산 한티재라고 할 수 있다. 칠곡 왜관의 가실성당이 경상북도 최초의 성당이라 할 수 있으며, 이후 대구에 대교구가 세워졌다. 김천 지역 천주교의 시초는 가실성당 소속의 김성학 신부가 김천 지역에 처음 와 포교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기독교는 조선이 개항을 하면서 유입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본격적인 유입은 1880대에 이르러서라 할 수 있다. 당시 기독교는 조선 말 개항을 하면서 공식적으로 전교된 것이다. 기독교는 김천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본격적인 서구 과학 문물과 제도적인 측면에 영향을 끼쳤으며, 근대 사상을 보급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유교]

한국인이라면 종교가 어떠하든 누구나 유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유교는 사실 종교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우리 문화 전반에 매우 심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유교는 공자를 시조로 하는 사상으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기본 경전으로 삼는다. 유교는 삼국 시기 이전에도 윤리와 정치, 문화와 경제 등 다양한 분야와 역사 전반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김천 역시 유교의 국가 교육 기관인 향교가 세 군데나 있으며, 김천 각 지역에는 서원과 서당이 흩어져 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유교는 성리학적 측면에서 발전되었는데, 김천은 이 당시 성리학을 수용하는 입장이 강하였다. 조선 사림의 최초라 할 수 있는 길재(吉再)[1353~1419]는 김천 아래인 선산 지역에서 그 정신을 발휘하고 있었고, 김천의 동부 지역인 상주와 안동은 영남 사림의 핵심인 이황(李滉)이 주자학을 재해석하고 있었다. 또한 남쪽으로 가는 거창 지역은 남명 조식(曺植)의 영향과 이황의 학술이 함께 논해지고 있었고, 김천 북부인 충청도는 기호학의 영수인 송시열이 주자학의 전통을 계승하였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천 지역은 유교간의 사상적 충돌이 없이 유교의 많은 사상적 유파를 받아들이고 수용하였다. 이는 유교의 근본정신인 충효(忠孝)와 수신(修身)을 실천적인 측면에서 받아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실천적 측면은 김천이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의 중심 지역이었다는 것에서도 찾을 수 있다.

[불교]

김천 지역의 불교는 신라 불교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372년 고구려에 처음 불교가 수입된 이래로 불교의 주된 남하 경로는 김천과 문경 지역이었다. 김천 지역은 신라 불교의 초전지라 할 수 있다.

김천 지역의 불교라 하면 직지사(直指寺)를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다. 직지사란 ‘곧바로 마음을 가리킨다’[直指人心]는 선종(禪宗)의 최고 화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천 지역의 전통 사찰들은 지금은 대부분 직지사의 말사(末寺)들이지만, 그 창건 연대는 대부분 신라 시대이다. 계림사, 고방사, 신흥사, 청암사, 봉곡사 등 여러 전통 사찰들이 그러하다. 이 사찰들은 모두 조계종 계열의 사찰들이다.

조계종 사찰 이외에 태고종·천태종·일성종·원효종·대성종·법화종·진각종·심인종 사찰의 수도 30개소가 넘으며 각기 석가모니의 종지를 받들어 포교를 하고 있다. 그러나 조계종 이외에는 그 교세가 매우 미약한 편이다. 또한 불교의 영향을 받은 신종교인 원불교 교당 3개소[구성선교소, 원불교 김천교당, 원불교 구성교당]가 김천에 있다. 2010년 현재 중국 남송의 천태교의를 받든 천리교도 네 군데에 있다.

[천주교]

천주교는 1886년 한불 수호 조약에 따라 로버트 김 신부가 1891년 대구에 와서 1902년에 성당을 지으면서 시작되었는데 성직자들의 지역 분담으로 김천 지역에는 김성학 신부가 지좌동 민가를 빌려 포교를 시작하였다. 지좌동에서 시작된 포교는 1907년에 황금동으로 옮겨 성당을 짓고 성의학당을 개설하였다. 그후 1934년에 김승연 신부가 사비를 들여 웅장한 첨탑 종각의 성당을 건립하고 1958년에 김천시 평화동평화동성당을 지었다. 2010년 현재 김천의 천주교 신도 수는 1만 970여 명 정도이다.

[기독교]

기독교[개신교]는 아담스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1897년에 대구에 와서 대구제일교회를 창설하여 그 거점을 마련한 후 1899년 부해리 선교사가 김중권과 함께 김천, 선산 등으로 선교 활동을 진행하였다. 1901년 송천동에 송천교회가 세워진 것이 김천 개신교의 시작으로, 이후 지좌동교회가 탄생하는 등 확산되었다. 2010년 현재 황금동교회, 김천지좌교회, 평화동교회, 김천제일교회 등 200여 개소에 이르는 교회가 존재하여, 불교 다음으로 그 교세를 펼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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