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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42
한자 住生活
영어음역 Jusaenghwal
영어의미역 Housing Life
이칭/별칭 주거 생활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주택과 주거지에서의 삶.

[개설]

주생활은 김천 지역에 전승되어 온 전통적인 양식과 구조를 가진 주거 건축 및 가옥 내부에서 일어나는 생활 행위이다. 이를 주거 생활이라고도 한다. 김천은 한반도 남부의 중앙에 위치하여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서 일찍이 마을이 성립하고 도시가 발전했다. 1991년 구성면 송죽리에서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 주거지 유적이 발견되었다. 개령면 동부리는 삼한 시대 소국인 감문국의 도읍지로 정해진 이래 신라,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김천을 대표하는 주거지로서 개령 일대가 번성기를 구가했다.

조선 건국 이후 역참 제도의 정비와 함께 현재의 김천시 남산동에 많은 속역을 거느린 김천역이 찰방역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추풍령이 교통의 요지로서 각광을 받게 되면서 김천의 주거지가 개령에서 현재의 김천 시내인 남산동교동 일대로 대거 이동하였다. 교동김산군의 읍치로서 행정의 중심이자 양반 주거지로 부상했다면 남산동 일대는 김천역을 중심으로 시장이 번성하면서 일반 백성들이 대거 정착한 서민 주거지로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주거 형태]

김천 지역의 전통적인 주거 형태는 양반형과 평민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상류층의 가옥 형태를 볼 수 있는 곳으로는 김천의 대표적인 양반촌이었던 봉산면 봉계와 양천동 하로, 구성면 기를, 상원과 상좌원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원형이 남아 있는 구성 상좌원의 솜실댁과 내앞댁, 거창댁, 광명리하회댁의 경우 대문채와 행랑채, 사랑채, 안채, 사당의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남성이 손님을 접대하고 학문을 논하는 사랑채를 전면에 배치하고 여성의 생활 공간인 안채를 뒤로 마주 배치하였다.

또한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내외담으로 불리는 별도의 상징적인 담장을 치고 쪽문을 내어 출입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사랑채와 안채의 좌우에는 부엌과 고방 등으로 구성된 3칸 내외의 별도의 집을 덧대어 전체적으로 ‘ㅁ’자형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 안채의 측면으로 별도의 사당을 두어 조상의 위패를 모셨다. ‘ㅁ’자형 구조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구성면 금평리 기를마을성산 여씨 종택인 하회댁을 들 수 있다. 1690년 60여 칸으로 건립한 고택으로 사랑채의 측면에 정자의 건축 기법을 차용한 공루를 설치한 것이 특징이다.

평민의 주택 구성은 일반적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분리되지 못한 일체형의 ‘ㅡ’자 구조형 주택이 많다. 이 같은 구조의 경우 1동 내에 안방과 작은 방이 붙어 있고, 그 측면에 부엌이 붙어 있는 형태이다. 또 감문면아포읍 일대에는 안방과 부엌, 곳간, 마구간이 ‘ㄱ’자 형태로 붙어 있는 주거 형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재력을 갖춘 서민의 경우 상류층의 가옥 형태를 본뜬 안채와 사랑채를 ‘二’자 형태로 배치한 사례도 부항면구성면 지역에서 목격할 수 있다.

[주택의 건립과 구조]

주택은 상류층의 경우 풍수지리에 입각한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선정해 터파기와 다지기 과정을 거쳐 석재로 축대를 쌓은 후 소나무 기둥과 서까래를 사용하여 가옥의 형태를 잡고 벽채에 토담으로 채우는 형식으로 건립하였다. 지붕은 찰흙과 이엉, 목재를 채운 후 기와를 얹는 형태가 일반적이었으며, 방과 방 사이는 주로 목재 마루를 설치해 대가족의 가정 내의 활용도를 높였다. 또 안채의 경우 장독대와 화단을 설치해 여성 공간으로서의 활용성을 배려하였다.

이에 반해 서민 주택은 농작업의 효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서 가옥 내의 전체 면적 대비 마당의 비율이 높은 것이 특징적이다. 벼농사 비중이 높은 개령면어모면, 아포읍의 경우에는 타 지역에 비해 마당 면적의 비율이 높았다. 주택의 기단부는 주로 토축하거나 자연석을 활용한 낮은 축대와 흙벽돌을 활용하였으며, 토담과 지붕은 초가가 일반적이었다.

[주거 형태의 변화]

조선 시대 중기까지 양반을 중심으로 한 상류층과 농민을 중심으로 한 서민의 주택 형태는 큰 변화가 없이 유지되다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김천 지역에는 일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천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등 삼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전란 중 많은 병화를 겪었다. 특히 유민이 정착하면서 김천역 일대에 유기 등을 생산하는 장인과 초보적인 상행위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고, 1700년대 들면서 전국적인 규모의 장시가 형성되었다. 상행위를 통해 자본을 축적한 평민들은 신분 상승 욕구와 맞물려 상류층 주택을 대거 신축하였다.

경부선 철도 부설 이후 김천의 상권에 매료된 많은 일본인이 김천장 주변에 일본인 촌을 형성하면서 일본식 주택이 대거 신축되었다. 김천 지역에서의 가장 큰 주거의 변화는 1950년 6·25 전쟁을 꼽을 수 있다. 낙동강이 방어선으로 고착화되자 미 공군이 김천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해서 종전 후에는 전 시가지의 80%가 폐허로 변했다. 전후 복구 과정에서 김천 시내의 많은 주택이 후생 주택이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어 타 지역에 비해서 일찍이 주택 개량이 이루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김천 지역 전반에 걸친 본격적인 주택 변화는 1970년대 벌어진 새마을 운동을 들 수 있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초가집이 대부분 슬레이트(slate)나 양철 지붕으로 탈바꿈하였다. 1980년대에는 하수도와 상수도, 화장실, 부엌이 개량되는 등 주거 양식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도심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아파트의 보급을 들 수 있다. 1977년 남산아파트를 시작으로 아파트가 건립되기 시작하면서 1990년대 부곡동신음동, 아포읍 일대에 대형 아파트 단지가 건립되면서 아파트 시대가 도래 했다.

2009년 말 김천시의 주택 현황은 단독주택 3만 2181가구, 다가구 주택 4,950가구, 아파트 1만 7411가구, 연립 주택 1,257가구, 다세대 주택 266가구, 비주겨용 건물내 주택 1,205가구로 총 4만 7739가구이다. 주택 보급률은 109%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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