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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수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049
한자 1936年水害
영어의미역 Natural Flood Damages in 1936
이칭/별칭 병자년 수해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황상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936년 8월 27일연표보기
종결 1936년 8월 28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성격 자연재해

[정의]

1936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내린 폭우로 발생한 수해.

[역사적 배경]

1900년대 초반은 나무를 이용하여 취사와 난방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산지에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이 많았으며, 지속되는 가뭄에 의해 초본도 대부분 말라죽어 식생과 피복이 매우 불량하였다. 뿐만 아니라 가뭄에 의해 토양의 수분 함량이 적어 건조하고 척박한 상태에서 1936년 8월 27일 태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가 발생하였다.

[경과]

태풍을 동반한 집중 호우로 인하여 유량이 늘어난 하천이 곳곳에서 범람하였다. 또한 산사태를 비롯한 농경지 유실, 인명 피해 등도 함께 발생하였으며, 산사태가 마을을 덮는 사례가 곳곳에서 발생하여 수해 이후 집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거주 공간을 옮겨 정착하였다.

[결과]

1936년 수해는 하천의 범람과 산사태가 동반된 자연 재해로, 마을과 농경지 및 주변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수십 명에서 백여 명의 인명 피해가 있었다고 하나 통계자료 등 객관적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한 파악은 어렵다. 당시 수해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새로운 곳에 정착하여 살았는데, 김천에는 그와 관련된 지명 유래나 설화가 많이 전해진다.

아포읍 봉산리 새터·새마을은 1936년 수해로 인해 작동에서 살던 김경술이 처음 정착한 마을로, 2년 후 김해 김씨가 이주하면서 새터·새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 농소면 입석리 새터마을은 1936년 수해로 침수되어 반 이상이 양지바른 곳으로 옮기면서 새터라 불렀다.

농소면 월곡1리 월천동(越川洞)은 밤실 북쪽에 있는 마을로 1936년 율곡마을이 수해로 침수되자 박희중이 작은 내를 건너 새로 부락을 개척하였다 하여 이런 이름이 붙었다. 어모면 덕마리 갈마마을은 원래 덕룡 평지에 자리 잡고 있었으나, 1936년 수해로 인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왔는데 마을을 둘러싼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찾는 형상이므로 갈마라고 하였다.

어모면 은기리 불무골마을은 옛날 이 마을에 대장간이 있어서 불무골이라 하였다. 뒷산의 형세가 봉황이 알을 품은 듯하다 하여 난함산이라 했으며, 마을은 봉황의 목에 해당한다 하여 봉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원래 이 마을은 약 300m 남서쪽에 있었으나 1936년 수해로 마을이 매몰되어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 수해 후 매몰된 마을을 버리고 지금의 위치로 이주하면서 원래 살던 마을의 이름을 그대로 쓰게 되었다.

봉산면 예지리의 장살들 가운데 새터마을이 있었는데, 1936년 집중 호우 때 자취도 없이 매몰되어, 새터마을에서 북동쪽으로 2㎞ 지점인 밤티 모퉁이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정착한 마을의 뒷산에 밤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밤리 혹은 율리라 부른다. 대항면 대룡리 행정마을은 마을이 형성되기 전부터 큰 은행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마을이름을 은행정이라 불렀다. 1936년 수해로 이 은행나무가 유실된 후부터 행정으로 부르고 있다.

감천면 용호리 선바우, 입암(立岩) 마을은 조선 시대에 남평 사람 문응서가 약목에서 이주해 오면서 생겨났다. 당시 마을 앞에 높이 2m, 둘레 3m의 큰 바위가 서 있어 입암마을이라 하였다. 그 후 1936년 수해 때 바위가 넘어진 후 마을에 잦은 흉사가 생기게 되자 마을 사람들이 다시 시멘트로 바위를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전한다.

조마면 강곡리 월곡(月谷)마을은 1936년 수해로 인해 상장에서 살고 있던 선산 김씨들이 이주하여 정착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에서 달이 뜨면 달빛이 정겹게 비친다고 하여 월곡이라 부른다. 조마면 신안리 중동마을은 원래 구미(九尾)라 불리는 곳에 살던 주민들이 1936년 수해로 부락이 유실되자 지금의 마을로 이주하게 되었다. 새래라는 마을 가운데 새로운 마을을 만들었다 하여 중동이라 부른다.

조마면 신안리 새터마을은 1936년 수해 이후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터·신기라 이름 지었다. 구성면 송죽리 개정지마을은 1936년 수해로 연화동마을이 유실되자 사람들이 이곳으로 이주하여 우물을 열었다는 뜻에서 개정지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구성면 광명리 도현(挑峴)마을은 1936년 수해 때 기를들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해 와서 생긴 마을인데 돌아가는 고개에 위치해 있다 하여 도지미·도현이라고 한다. 구성명 광명리 봉대마을은 1936년 수해로 인해 다른 지역에 있던 사람들이 이주하면서 만들어진 촌락으로, 마을 뒷산 모양이 대봉이 앉은 형상이라 하여 봉대라 부르게 되었다.

지례면 상부리는 조선 초기부터 자연 부락을 이루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하부리·상부리·현장촌·동산리를 합쳐 상부리라 하였고 김천군 지례면 소관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에 현장촌과 동장촌은 수해로 유실되어 들로 변하였고, 상부리와 하부리를 통합하여 상부라고 하였다.

부항면 지좌리 지좌마을은 원래 한송정으로 불리었다. 조선 초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자 이존인의 후손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낙향하여 부항면 학문의 대들보 구실을 하였다. 12문중이 계를 조직하여 학문을 논하기 위해 한송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그 후 한송정은 1936년 수해로 유실되어 현재는 일부만 남아 있다. 마을 이름은 한송정 정자에서 유래하였으며, 효자 이영보로 인해 효자촌으로도 불리었으나 지금은 지좌마을로 불린다.

증산면 부항리 감나무골은 새터에 살던 사람들이 1936년 수해 때 유실된 마을을 버리고 이주하면서 생겨난 마을이다. 마을 주변에 감나무가 많이 분포하여 감나무골이라고 부른다. 증산면 부항리 이전부락(移轉部落)은 1936년 수해로 새터에 살던 사람들이 이전하여 살게 되었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증산면 부항리 새마마을 역시 1936년 수해로 새터에 살던 사람들이 이주하여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새마라 불렀는데, 그곳 사람들은 마을 이름을 월도 또는 월계동으로 부르기도 했으나 통용되지는 않았다. 증산면 황정리 새뜸마을은 1936년 수해를 당한 사람들이 이주하여 새로 터를 잡고 집을 지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증산면 장전리 서무터마을은 150여 년 전 김천 지역의 천주교 발상지로서, 천주교 신자 안주원이 병오사옥[1866] 때 정착하여 살았다. 선행을 전하는 곳이라고 하여 선무기라 하였으며, 훗날 서무터로 변하였다. 현재는 8가구의 천주교 신자들이 살고 있다. 원래는 산지 쪽으로 1㎞ 떨어진 상류 골짜기에 위치했던 마을인데 1936년 수해로 유실되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증산면 황점리 원황점(元黃店)은 원래 황(璜)을 구운 마을이라고 하여 원황점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김해 김씨 중간 시조가 유황을 구워 상납한 것이 마을 조성의 단초였다. 마을 앞을 흐르는 하천의 상류부 하곡에 원래 마을이 있었는데, 1936년 수해 때 매몰되어, 지금의 위치로 이주하였다. 감문면 금곡리 안터는 1936년 수해 때 금곡 지역으로 하천이 범람하여 전답과 가옥이 모두 떠내려가고 사람이 7명이나 죽었다. 이후 안터밭에 새로 집을 짓고 살면서 마을 이름을 밭 이름인 안터로 부르게 되었다.

김천시 양금동 장승배기에서 조마면으로 가는 지방도로를 따라 300m 정도 떨어진 야산 산록에 노천리(盧川里)가 있었는데 1936년 수해로 유실되고 장승배기 남쪽 300m 떨어진 국도 3호선 변에 마을이 옮겨졌다. 새터를 잡아 이름 없이 내려오다가 새터로 굳어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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