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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198
한자 西部里
영어음역 Seobu-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81㎢
가구수 136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323명(남자 172명, 여자 151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면 소재지 서쪽에 자리 잡은 지역이므로 서부동(西部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개령군 서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부억(富億)·화목(和睦)·우량(友良)이 통합되어 김천군 개령면 서부동으로 개편되었고, 1949년 금릉군 개령면 서부동으로 개칭하였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서부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개령면 서부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동쪽 감천 변에 발달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서쪽은 호두산(虎頭山)이 솟아 있다.

[현황]

서부리개령면 소재지 서쪽 호두산 아래에 길게 자리 잡은 마을이다.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2.81㎢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36세대에 323명(남자 172명, 여자 15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김해 김씨전주 이씨 집성촌이며, 국도 59호선이 남북 방향으로 지난다. 평야가 발달하여 미곡 산지로 유명했는데 최근에는 포도와 참외를 많이 재배해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자연 마을로 부억·화목·우량 등이 있다. 서부리전주 이씨 이일소(李逸素)가 임진왜란을 피해 마을에 정착한 데 이어 김해 김씨가 입향하면서 두 집안이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어 왔다. 우량은 개령중학교와 접해 있는데 예부터 주민이 우애 있고 순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을회관이 있는 화목은 마을 주민들이 화목하고 사이좋게 살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고, 부억은 마을에 부자가 많아 붙인 이름이다. 관련 자료에 따르면 서부리에 속한 옛 마을 가운데 대나무가 많아 죽전골[竹田谷]로 불린 마을이 호두산 아래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호두산은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산을 따라 길게 뻗어 있는 형국으로 개령면의 진산인 감문산 줄기이다. 풍수적으로 볼 때 호랑이 형상의 호두산이 감천 건너 아포읍 대신리를 노려보는 형국인지라 예부터 대신리에 불길한 일이 자주 발생해 이를 막아 볼 요량으로 마을 뒷산을 ‘개를 매달아 놓은 산’이란 뜻의 구현산(狗縣山)으로 고치고 마을 이름도 함정을 뜻하는 함골[陷谷]로 고쳐, 호두산 호랑이가 개를 매달아 놓은 대신리를 향해 달려들다가 함곡, 즉 함정에 빠지게 하여 마을로 미치는 불길한 기운을 없애고자 했다고 한다.

호두산에서 신룡리 방면으로 호랑이의 긴 꼬리처럼 야트막하게 뻗어 가던 야산은 뱀의 형상인 사산(蛇山)으로 연결되는데 사산 아래 언덕배기 도로변에 김천 최대 규모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삼층석탑이 있는 곳은 원래 신라 시대에 창건된 사자사(獅子寺)가 있던 절터였는데 1473년(성종 4) 개령현감 정난원(鄭蘭元)이 절을 허물고 그 자재로 개령향교를 세웠다.

이같은 사실은 영남 지역의 역사 인문 지리서인 『교남지(嶠南誌)』 「개령군」 편에 “군 북쪽 2리에 있던 옛 사자사를 성종 4년에 현감 정난원이 군 북쪽 3리에 학제(향교)로 세우니……[在郡北二里 舊以郡西獅子寺爲學齋 成宗癸巳 縣監鄭蘭元 創建於郡北三里……]”라는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숭유 억불을 국시로 건국한 조선이 전국의 수많은 사찰을 폐하고 유교의 산실인 향교나 서원을 세웠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당시 사자사의 목재와 석물들은 대부분 향교 건축에 쓰였고 너무 커서 용도를 찾지 못한 몇 개의 석탑 잔해들만이 남아 천년 사찰 제 절터를 홀로 지키다 지난 199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탑 뒤쪽에 야산 크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구릉지는 감문국의 왕비 노로부인의 능(陵)으로 알려진 장부인릉(獐夫人陵)이다. 주변에 민묘가 들어서고 정상부가 포도밭으로 개간되어 본디 형체를 찾을 길이 없다.

노로부인 또는 장부인(獐夫人)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노로(爐盧)는 쇠를 다루는 화로(火爐)를 가리키는 것으로 감문국 시대는 원삼국 시대, 즉 철기 시대였으므로 철을 다루는 계층인 지배자를 상징하며 노로부인의 노로를 동물인 노루[獐]로 잘못 표기해 장부인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9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在郡北二里 舊以郡西獅子寺爲學齊 成宗癸巳 縣監鄭蘭元 創建於郡北三里 ->在郡北二里 舊以郡西獅子寺爲學齋 成宗癸巳 縣監鄭蘭元 創建於郡北三里
2011.07.18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교남지(嶠南誌)』 「개령군」 편에 “군 북쪽 2리에 있던 옛 사자사를 성종 4년에 현감 정난원이 군 북쪽 3리에 학제(향교)로 세우니……[在君北二里舊以郡西獅子寺爲學齊成宗癸巳縣監鄭蘭元創建於郡北三里……]”라는 기록으로 ->『교남지(嶠南誌)』 「개령군」 편에 “군 북쪽 2리에 있던 옛 사자사를 성종 4년에 현감 정난원이 군 북쪽 3리에 학제(향교)로 세우니……[在郡北二里 舊以郡西獅子寺爲學齊 成宗癸巳 縣監鄭蘭元 創建於郡北三里……]”라는 기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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