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32
한자 禮智里
영어음역 Yeji-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3.33㎢
가구수 307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706명(남자 335명, 여자 371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373년(공민왕 22) 부성부원군(富城府院君) 서산 정씨 정윤홍(鄭允弘)이 봉계(鳳溪)로 옮겨 오면서 다섯 아들 정사인(鄭斯仁)·정사의(鄭斯義)·정사예(鄭斯禮)·정사지(鄭斯智)·정사신(鄭斯信)의 이름 끝 자를 각각 따서 인의리, 예지리, 신리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파미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봉계에서 분리되어 김천군 봉산면 예지1동과 예지2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봉산면 예지동이 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예지리가 되었다. 1995년 김천시 봉산면 예지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마을 앞으로 장살들이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극락산에서 뻗어 나온 야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현황]

예지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3.33㎢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307세대에 706명(남자 335명, 여자 371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인의리, 서쪽으로 덕천리, 남쪽으로 신리, 북쪽으로 상금리와 이웃하고 있다. 예지1리·예지2리 두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연일 정씨 집성촌이다. 마을 앞으로 경부고속국도경부고속철도가 지난다. 농경지가 비옥하고 수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일찍이 벼농사가 발달하였고 최근에는 포도 재배로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문화 유적으로 1540년(중종 35) 연일 정씨 문중에서 자제 교육을 위해 세운 봉암서당(鳳巖書堂)이 있다. 봉암서당은 당초 마을 입구에 세우고 도장서당(道藏書堂)이라 했는데 100년 뒤에 각곡(角谷)이란 곳으로 잠시 옮겼다가 1757년(영조 33) 현재의 자리로 옮기고 봉암서당으로 고쳤다.

자연 마을로는 예지·송정·율리·내입석·외입석 등이 있다. 송정은 경부고속국도가 놓이면서 마을 앞의 드넓은 지성걸(地成傑)과 장사례(長沙禮)의 농지 상당 부분이 편입되고 두 지역으로 나누어졌다. 지성걸은 홍문관교리를 지내고 예지리로 낙향한 연일 정씨 정이교(鄭以僑)가 지세가 왕성하고 큰 들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장사례는 직지천을 따라 길게 모래사장이 형성된 곳을 개간하여 들판을 만들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극락산 자락에 자리 잡은 입석은 광주 이씨(廣州李氏)가 마을을 개척하면서 정승바위를 경계로 안쪽 마을을 내입석, 바깥쪽 마을을 외입석이라 하였다. 지금도 양 마을 입구에 1m 남짓한 돌이 서 있다. 정승바위는 조선 성종 때 판서·우의정·영의정을 차례로 지낸 이극배(李克培)와 관련한 전설이 서려 있다. 이극배의 아내인 숙부인 김씨가 벼슬살이로 객지에 나가 있는 남편과 떨어져 내입석에 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사무쳐 승려에게 시주를 하며 남편이 돌아올 수 있는 방도를 물었다.

이에 승려가 마당에 있는 연못에 소금 석 섬을 뿌리고 마을 입구에 튀어나온 바위를 깨뜨리라고 하니 그대로 따랐다. 그러자 연못에 살던 학이 산 너머 봉계로 날아가고, 사흘 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시신이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았던 마을 입구의 바위를 깨뜨린 덕분에 상여(喪輿)가 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율리는 원래 직지천 변에 있던 마을인데 1936년 수해 때 마을이 유실되자 밤나무 숲이었던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붙인 이름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