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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55
한자 壯岩里
영어음역 Jangam-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순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4.77㎢
가구수 163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341명(남자 181명, 여자 160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이 마을 출신으로 목사(牧使)를 역임한 허직(許稷)이 바위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후 힘센 장사에게 바위를 3층으로 쌓게 하였다 하여 장수바위 또는 삼층바위라 하였는데 음이 변하여 장바우가 되었고 한자로 장암(壯岩)이라 하였다. 이 바위를 기준으로 위쪽 마을을 상장(上壯)[일명 웃장바우], 아랫마을을 하장(下壯)[일명 아랫장바우]이라 한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상장·하장·도암[일명 새말]·예동·점동이 통합되어 김천군 조마면 장암동으로 통합되었다. 1949년 금릉군 조마면 장암동이 되었고, 1962년 장암1동·장암2동·장암3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장암리가 되었고, 1995년 김천시 조마면 장암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북쪽으로 흐르는 감천이 마을을 감싸고, 마을 뒤로는 구성면 덕대산에서 내리뻗은 지맥이 매봉산과 배산으로 이어져 뒷골·마당골·배암골·새암골을 이루며 이어져 장암교 앞 장암대(壯岩坮)로 멈추어 섰는데, 풍수지리상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고 있는 형국이다.

[현황]

장암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4.77㎢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163세대에 341명(남자 181명, 여자 160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감천면, 서쪽으로 용산을 사이에 두고 구성면, 남쪽으로 강곡리, 북쪽으로 신안리와 이웃하고 있다. 장암1리·장암2리·장암3리 세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안동 권씨 집성촌이다. 감천 변을 중심으로 장암들과 새말들 등 비옥한 충적 평야가 형성되어 예부터 조마면의 대표적인 곡창 지대로 꼽혔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에 의해 경지 정리가 이루어진 뒤 감자·파 등 채소를 주로 재배하였고, 특히 장바우감자는 김천의 대표적인 특산품으로 이름이 높다. 문화 유적으로는 정일 부부 충정각이 있다.

자연 마을로는 장바우·새말·예동·점동이 있다. 장바우는 안동 권씨 20세손 권세호(權世豪)단종이 폐위됨을 탄식하며 가족을 데리고 은거한 이래 대대로 안동 권씨가 집성을 이루고 있다. 마을 지명의 유래가 된 장수바위에는 ‘허직(許稷)’ 두 글자가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고, 관찰사를 지낸 이절후(李節後)가 이 마을을 다녀갔음을 기념하여 ‘순상국이공절후송덕불망비(巡相國李公節後頌德不忘碑)’라는 글을 바위에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장바위 옆에는 이 마을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옛 건물이 있다. 마을 앞 드넓은 장암들이 1936년 수해 때 감천이 범람해 수몰되자 자력으로 수습할 수 없는 주민들이 연명으로 제방 축조와 농지 복구를 청원하였다. 이를 접수한 조선총독부에서 연명 청원서를 농경지 포기 각서로 위조해 오사카의 유력자인 다카세라는 인물에게 이 땅을 불하하였다.

당시 부산 동래에 지점을 두고 조선 각지에 농장을 경영하던 다카세는 장암들 1,300마지기를 현대식으로 경지 정리하여 농장을 경영하였고 장암들은 다카세농장 또는 고려농장으로 불리었다. 관리인을 두어 관리하면서 수확물을 보관할 창고가 필요하자 봉계 출신으로 고종 때 김산소모사(金山召募使)와 경상남도관찰사를 지낸 조시영(曺始永)[1883~1912]의 저택을 허물고 그 목재로 지금의 창고를 지었다. 당시 쌀 600가마가 들어갔다는 창고는 광복 후 교회로 쓰이다가 지금은 마을 주민의 자재 창고로 쓰이고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9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1) 정승을 지낸 이절후(李節後)가 이 마을을 다녀갔음을 기념하여 ->관찰사를 지낸 이절후(李節後)가 이 마을을 다녀갔음을 기념하여 2) ‘순상국이공절후송덕불망비(巡相國李公後頌德不下忘碑)’라는 글을 바위에 ->‘순상국이공절후송덕불망비(巡相國李公節後頌德不忘碑)’라는 글을 바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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