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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256
한자 新安里
영어음역 Sinan-ri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1914년연표보기
변천 1949년연표보기
변천 1988년연표보기
변천 1995년연표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4㎢
가구수 238세대[2015년 12월 31일 기준]
인구(남, 여) 549명(남자 272명, 여자 277명)[2015년 12월 31일 기준]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신동(新洞)의 ‘신(新)’자와 안서(安棲)의 ‘안(安)’자를 따서 신안동(新安洞)이라 하였다.

[형성 및 변천]

조선 말 김산군 조마남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죽정(竹汀)·신동·구미(龜尾)·지동·신하(新下)·안서·신기·신촌이 통합되어 김천군 조마면 신안동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금릉군 조마면 신안동이 되었고, 1962년 신안1동~신안4동으로 분동되었다. 1976년 신안1동~신안5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동(洞)을 리로 바꾸어 신안리가 되었으며, 1995년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가 되었다.

[자연 환경]

구성면 덕대산에서 뻗어 나온 줄기가 마을 뒷산을 형성하였다. 마을 앞으로 감천이 흐르고 하천 변에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현황]

신안리는 2010년 11월 30일 기준 면적은 4㎢이며, 2015년 12월 31일 현재 인구는 총 238세대에 549명(남자 272명, 여자 27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동쪽으로 감천면 광기리·도평리, 서쪽으로 구성면 하강리, 남쪽으로 장암리, 북쪽으로 양금동과 이웃하고 있다. 신안1리~신안5리 다섯 개 행정리로 이루어졌으며, 성산 이씨·성산 배씨·화순 최씨 집성촌이다. 지방도 903호선감천과 나란히 지난다. 감천 변에 형성된 넓은 평야를 바탕으로 예부터 부농이 많이 나왔고, 최근 김천을 대표하는 쌀 브랜드인 ‘탑라이스’ 시범 단지로 지정되었다.

문화 유적으로는 마을 뒤 영탑골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1호인 금릉 신안동 석불입상이 있다. 영탑골 사찰이 폐사된 뒤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밭을 일구던 농부에게 발견되어 1987년 문화재로 지정되고 1996년 현재의 보호각이 설치되었다. 이 밖에 화순 최씨 선조를 배향한 남애정(南厓亭)과 백원당(百源堂)이 있고, 백원당 옆으로는 화순 최씨 가문에서 후학을 양성하고 선조를 추향하기 위해 운영했다는 구재서원(懼齋書院) 터가 남아 있다.

자연 마을로는 죽정·중동(中洞)·안새래·밭새래·지동 등이 있다. 죽정은 승정원승지를 지낸 성산 배씨 10세손 배한(裵閑)의 차남 진사 배윤순(裵允詢)이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 충신들이 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세상을 한탄하며 식솔을 거느리고 한양에서 신하로 입향한 뒤, 후손들이 1890년경 이주하여 대대로 집성을 이루어 오고 있다. 배윤순의 후손 배상유(裵尙瑜)가 내신[일명 안새래]으로 분동해 정착한 이래 마을에 대나무가 무성하므로 죽전(竹田)이라 했고 또 감천 변에 대나무가 많아 ‘물가 정(汀)’자를 써서 죽정이라 했는데 지금은 죽정으로 통칭하고 있다.

중동은 화순 최씨 12세손 최세영(崔世英)이 조선 선조 때 이주하여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 최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앞 큰들 귀퉁이에 마을이 있다 하여 들귀미라 부르고 한자로 구미라 적었는데, 1936년 수해 때 마을이 유실되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큰들 중앙에 마을이 있다 하여 중동이라 하였다.

뒤주골은 중동에서 조금 떨어져 한지골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세가 풍수지리상 곡식을 저장하는 뒤주처럼 움푹 패어서 붙인 이름이다. 한지골과 뒤주골에서 중동을 거쳐 감천으로 연결되었던 제방이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 꿈틀대며 흘러간다 하여 용제방(龍堤防) 또는 후룡(後龍)으로 불렸던 뒤주골의 명물 방천은 1970년대 경지 정리 와중에 사라졌다.

안새래는 마늘산 아래에 자리 잡은 마을로 만력골 입구에 있어 만력동(萬曆洞)이라고도 하였다. 달리 내신이라고도 한다. 새래라는 지명은 ‘새 신(新)’의 변음으로 여겨진다. 1658년 성산 배씨 배금겸(裵今謙)이 마을에 정착한 이래 성산 배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 안쪽에는 1617년 남편 배인범을 좇아 자진한 경주 김씨, 이순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배인범의 아들 배흥립(裵興立), 병자호란 때 공신이 된 배인범의 손자 배명순(裵命純) 등 3대를 추모하는 배흥립 삼대 삼강 정려각이 있다.

안서화순 최씨 일가가 정착하면서 편안하고 살기 좋은 마을이 되기를 기원하여 붙인 이름이다. 연산군 때 형조참의와 전라감사를 지낸 화순 최씨 10세손 최중홍(崔重洪)의 손자인 최세영(崔世英)선조 때 낙향해 정착한 이래 대대로 화순 최씨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밭새래는 입향조 최세영이 내려와 새로 정착했다 하여 신하라고 하였다가 마을이 신하로 통칭되는 마을 외곽에 있다 하여 외신(外新)이라 표기하고 바깥신하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음이 변해 밭새래가 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19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선조를 추향하기 위해 운영했다는 구제서원(懼齊書院) 터가 남아 있다. ->선조를 추향하기 위해 운영했다는 구제서원(懼齋書院) 터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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