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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진감로국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52
한자 弁辰甘路國
영어음역 Byeonjingamnoguk
영어의미역 One of the 12 Countries of Byunji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지명/고지명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
집필자 김봉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폐지 231년연표보기
비정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감문면
성격 고대 소국(小國)
관련 문헌 『삼국사기』|『삼국지』

[정의]

삼한 시대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 있던 소국(小國).

[개설]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은 현재 김천시 개령면감문면 일대에 있던 소국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231년(조분이사금 2) 신라의 대장군 석우로에게 토벌되었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조선 전기까지 이 지역에는 감문국 때의 궁궐터와 감문국 왕의 무덤인 김효왕릉(金孝王陵) 및 장부인(獐夫人)의 묘로 전하는 장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명칭 유래]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개령은 옛날 감문소국(甘文小國)인데, 신라에 점령된 뒤 감문군에서 개령군으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개령군의 영현(領縣)인 어모현(禦侮縣)은 본래 금물현(今勿縣)이었다고 한다. 감천(甘川)의 ‘천(川)’은 훈독(訓讀)하면 ‘물’이 되기 때문에 ‘감물’로도 표기할 수 있다. 이는 곧 감문국의 ‘감문’, 또는 금물현의 ‘금물’과도 연결되는 표기이다. 한편 감천의 ‘천’은 ‘내’로도 훈독이 되므로, 감천은 ‘감내’로도 불렸을 것이다. 그런데 감로국의 ‘로(路)’는 ‘노(奴)’와 같이 ‘내’로도 표기되었을 것이므로, ‘감로’는 김천시에 소재한 ‘감내’와 같은 표기로 추정된다.

[형성 및 변천]

감천 하류 감산의 남쪽 개령면소재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정치 집단이 감문국의 중심 세력일 것으로 보인다. 개령을 중심으로 한 감문국은 소백산맥을 경계로 백제와 접하고 있어 인접한 상주 지역의 사벌국과 함께 신라의 절대적인 전략 요충지이었다. 감문국은 231년 대장군 석우로에 의하여 사로국에 복속되어 군으로 되었다가 경덕왕개령현으로 개칭되었다.

[위치 비정/행정 구역상의 구분]

김천시 감천 유역의 개령면감문면 일대로 비정된다.

[관련 기록]

『삼국지(三國志)』 권30 위서동이전 한조에는 “변진 역시 12개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라 하고, 그 다음으로는 험측이 있고, 다음으로는 번예가 있고, 다음으로는 살해가 있고, 다음으로는 읍차가 있다. 이저국·부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변진주조마국·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우유국이니 변·진·한을 합쳐 24개국이다. 큰 나라는 4~5천 가구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6~7백 가구를 이룬다. 총 4~5만 호이다[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有已柢國·不斯國·弁辰彌離彌凍國·弁辰接塗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弁辰古資彌凍國·弁辰古淳是國·冉奚國·弁辰半路國·弁[辰]樂奴國·軍彌國(弁軍彌國)·弁辰彌烏邪馬國·如湛國·弁辰甘路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弁辰狗邪國·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馬延國)·弁辰瀆盧國·斯盧國·優由國.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권 제2 신라본기 제2 조분이사금 2년에는 “2년 7월에 이찬 우로(于老)로 대장군(大將軍)을 삼아 감문국(甘文國)[지금의 金泉(김천)]을 쳐 깨뜨리어, 그 땅을 군(郡)으로 삼았다[二年 秋七月 以伊于老爲大將軍 討破甘文國 以其地爲郡].”라고 되어 있고, 『삼국사기』 권 제45 열전 제5 석우로에는 “석우로(昔于老)내해이사금(奈解尼師今)의 아들이다[혹은 각간(角干) 수로(水老)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조분왕(助賁王) 2년[231년] 7월에 이찬(伊飡)으로서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감문국(甘文國)[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감문면개령면]을 쳐서 깨치고, 그 땅으로 군현(郡縣)을 삼았다[昔于老 奈解尼師今之子 或云角干水老之子也 助賁王二年七月 以伊爲大將軍 出討甘文國破之 以其地爲郡縣].”,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 지리 1 신라 상주 개령군에는 “개령군(開寧君)은 옛날 감문소국(甘文小國)인데, 진흥왕(眞興王) 18년, 양(粱)[陳(진)의 誤(오)] 영정(永定) 원년에 군주(軍主)를 두고, 청주(靑州)로 하였다가 진평왕(眞平王) 때에 주(州))를 폐하였다. 문무왕(文武王) 원년에 감문군(甘文郡)을 설치하고, 경덕왕(景德王)개령군(開寧君)으로 개명(改名)하여 지금도 그대로 일컫는다[지금의 김천시 개령면(開寧面)]. 영현(領縣)이 넷이다[開寧郡 古甘文小國也 眞興王十八年梁永定元年 置軍主爲靑州 眞平王時 州廢 文武王元年 置甘文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四].”라고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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