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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현전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485
한자 石峴戰鬪
영어음역 Seokhyeon Jeontu
영어의미역 Seokhyeon Bat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호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592년 11월 25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돌고개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돌고개
성격 전투
관련 인물/단체 모오리|최경회|민여운|김충민|억복

[정의]

임진왜란 때 김천시 구성면 상좌원리 돌고개[석현]에서 벌어진 김천의 대표적 전투.

[개설]

석현전투로 인해 고개는 돌모리로 불리게 되었으며 면 이름도 석현면으로 불리게 되었다. 석현[돌고개]은 조선 시대에는 김산군, 지례현의 접경을 이루었다. 조선 시대에는 지례현 하북면에 속한 상좌원리는 1914년 석현면에 편입되어 상좌원과 도동, 원앞을 통합하여 하원리가 되었다. 구미의 석현면 면청사가 유실되어 석현 과곡면과 합하여 지례현의 옛 이름인 구성면이라 하였다. 지금도 석현 산마루에 돌무덤이 묻혀 있다.

[역사적 배경]

경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개령현에 주둔하여 왜군 후방 사령부를 설치하여 경상도 일원의 치안을 담당하면서 군정을 실시하였다. 당시 개령의 주둔 왜병은 3만~4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에 인근의 의병 군진이 호남의 일부 의병군과 합동 작전을 통해 왜군 후방 사령부를 토멸하려고 하였다.

김면(金沔) 의병 대장을 주축으로 한 2,000명의 병역은 상좌원에 포진하고,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와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예하 1,000여 명은 웅현[거창군]을 경유하여 개령으로 집결하고, 지례에 있는 의병과 경상도의 승병은 남쪽을 돌아 개령으로 진군토록 하였다. 호서의 의병군은 우치현[우두령]에서 왜의 내원군을 막는 한편, 상주의 의병군은 상주 통로를 막는 가운데 김면의 본진군이 개령 왜군 사령부 동쪽 산에 숨어 올라가 횃불로 신호하면 김함·정유회·김몽린의 군병과 좌우 돌격장의 병졸이 일시에 공격한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11월 25일 날이 밝자 개령의 왜군이 먼저 거창을 향해 진군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이곳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고 돌고개, 즉 석현의 산 위에 매복하여 접근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석현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과]

석현의 산 위에 매복한 의병군은 미리 쌓아 두었던 돌을 산 아래 왜군에게 투척하고 활을 쏘았다. 이 전투는 쌍방 간 진격과 후퇴가 세 번이나 거듭될 정도로 격렬하게 벌어졌는데, 결국 왜군이 물러남으로써 끝이 났다. 석현의 전투에서 계원장 김충민과 함양의 정병 최운의 노비 억복이 말탄 왜장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아군의 경우도 군관 유사홍이 전사하고, 장암 의병장 권응성(權應聖)이 전사한 것으로 전해진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7.20 2011년 한자 최종 검토 작업 경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오리[毛利輝元]는 ->경상북도 지역을 장악한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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