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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령 시위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28
한자 開寧示威運動
영어음역 Gaeryeong Siwi Undong
영어의미역 Gaeryeong Demonstration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1919년 3월 24일연표보기
종결 1919년 4월 6일연표보기
발생|시작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종결 장소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김태연|허철|전종수|최영돈|문동환|홍극련|김임천|도동영|김명길|최가만|정남준|황도석|이말용|윤광어리|김타관

[정의]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에서 일어난 독립운동.

[역사적 배경]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한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으로 인해 많은 고통에 시달렸다. 제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 자결주의가 제창되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의 독립에 대한 필요성과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만세 독립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북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이용하여 만세 독립운동이 발발하는 주요 계기를 마련하였다.

[경과]

1919년 3월 24일 개령면에서는 개령공립보통학교 졸업식과 은창수 집안의 혼인 잔치가 있었다. 결혼식 피로연 자리에서 참석자 김태연의 주도로 허철·전종수·최영돈 등이 모인 사람들을 향해 독립의 필요성을 연설하고, 유동산을 향해 행진하였다. 이때 많은 마을 사람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 시위의 주도자들은 전국 각지에서 일본의 굴레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는데 우리 고장에서 이런 거사가 없는 건 수치라 하며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권고하였다.

4월 3일 시위는 개령면 동부동[현 개령면 동부리]에서 발생하였다. 이날 동부동 문정환은 다른 두 사람과 함께 마을 뒷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고창하였다. 4월 4일에는 문동환이 홍극련과 문학이(文學伊) 등과 함께 같이 횃불을 들고 뒷산에 올라가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6일 시위 역시 동부동에서 발생하였다. 이날 밤 동부동에 사는 머슴들이 횃불을 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가 만세를 고창하였다.

[결과]

3월 24일의 시위 주도자 김태연·허철·전종수·최영돈 등은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의 재판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4월 6일 시위 참가자 김임천·도동영·김명길·최가만·정남준·황도석·이말용·윤광어리·김타관(金他官) 등은 재판에서 태형 90대를 언도받았다.

[의의와 평가]

네 차례에 걸쳐 연속적으로 일어난 개령 시위운동은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만세 독립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나아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인 3·1운동은 임시 정부의 수립을 가능케 했으며, 공화정을 정착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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