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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35
한자 三一運動
영어음역 Samil Undong
영어의미역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일수

[정의]

1919년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

[개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 충량한 신민의 양성을 목표로 하는 지배 정책과 식민지 수탈을 기조로 하는 경제 정책에 의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받으면서 우리 민족은 많은 고통에 시달려왔다. 그리고 1차 세계 대전을 전후하여 세계사적으로 러시아 혁명이 발생하였고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제창이 있었다. 이런 국내외적 정세는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세계만방에 고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큰 배경이 되었다. 그에 따라 1919년에 접어들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한 운동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고, 3월 1일을 기해 전 민족적인 독립 만세 운동이 들불처럼 국내외로 번져나갔다.

김천은 일제의 한국 침략의 상징이 된 경부선이 부설되면서 만들어진 신흥 도시로 경상북도 내륙의 주요 산물이 모여들었다가 다시 대구와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의 파이프 역할을 하는 현장이었다. 이런 지역적 특성이 독립 만세 운동이 발생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김천의 3·1운동은 3월 11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 6일까지 약 한 달 동안 김천 시내를 비롯하여 모두 10차례 이상 발생하여 시위를 벌이거나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다.

김천 시내의 독립 만세 운동은 대구의 독립 만세 운동이 있었던 3월 8일부터 준비되었다. 김천 출신으로 대구 계성학교에 유학중이던 김수길(金壽吉)[금릉군 중산면 금곡리]이 3월 8월 대구의 서문밖시장에서 벌어졌던 만세 운동에 참가한 직후 곧바로 고향인 김천으로 돌아와 만세 운동을 준비하였다.

김수길황금동교회김충한을 찾아가 대구의 만세 운동과 세계 정세를 설명한 후 조선 독립의 좋은 기회임을 강조하고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역설하였다. 이 자리에는 교회 장로 최용수, 교회 조수 한명수도 함께 있었다. 김충한도 평양을 출발하여 서울로 이동하는 중에 서울의 독립 만세 운동을 목격하고 김천에 와서 만세 운동을 작정하고 있던 상태였다.

3월 8일 밤 9시에 이들은 다시 황금동교회에 모여 만세 시위의 구체적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는 주남태, 김원배, 박태인, 차경곤 등도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만세 시위를 3월 11일 오후 3시에 용두동 감천다리 부근에서 벌이기로 하고 각기 역할을 정하였다. 김충한김수길은 독립 운동에 관한 경고문을 작성하고, 최용수와 박태인은 김수길과 함께 경고문의 인쇄와 배포를 담당하기로 하였다. 태극기는 김수길이 베[布]로 만들고, 주남태와 김원배는 종이로 만들기로 하였다. 당일의 시위 순서는 독립에 관한 연설과 경고문 낭독, 시위 참가자들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가를 행진하는 것으로 하였다.

3월 10일 김충한김수길황금동교회에서 “금번 만국평화회의의 좋은 기회를 맞아 우리 조선은 독립할 운이 왔음을 고한다. 우리는 타국의 노예에서 벗어나 자유민이 되어 천부의 행복을 누려야 한다….”라는 내용의 경고문을 작성하였다. 곧이어 최용수의 집에서는 경고문 300장을 등사기로 인쇄하였다.

주남태와 김원배는 종이 태극기 50여 장을 만들어 3월 10일 오전 9시 무렵 황금동에 있는 한상태의 집에서 김천공립보통학교 학생 한정이·박희철·석동준 등에게 나누어 주며 시위 장소에 참석할 것을 권유하였다. 석동준은 다음날인 3월 11일, 태극기 16본을 김천공립보통학교 학생 김종호 등에게 나누어주면서 3시에 있을 시위에 참석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3월 10일 밤 경고문을 인쇄한 등사기를 원래 있었던 저축계 사무실로 옮기는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게 등사 원고지가 발각되었다. 이로 인해 황금동교회에 모여 있던 주동 인물 네 명이 일제 경찰에 검거되면서 시위 계획은 무위에 그치고 말았다. 검거된 시위 관련자들은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1910년 5월 3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김충한은 징역 2년, 최용수는 징역 1년 6월, 주남태·김원배·한명수·차경곤 등은 각각 징역 1년, 김재위는 징역 6월을 선고받았다.

[의의와 평가]

전 민족적 항일 운동인 3·1운동의 운동 역량을 기반으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김천 시내의 3·1운동은 실행 직전의 준비 단계에서 무위로 끝나고 말았으나 민족 독립의 필요성을 확인케 하였고, 이후 김천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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