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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582
한자 土器
영어음역 Togi
영어의미역 Earthenware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선사/선사,고대/고대
집필자 이주림

[정의]

선사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김천 지역에서 확인된 토기.

[개설]

선사 시대부터 통일 신라 시대까지 김천에서 확인된 토기는 주로 발굴 조사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이들 조사된 유적의 유물을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원삼국 시대, 삼국 시대, 통일 신라 시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신석기 시대]

송죽리 암음 유적과 송죽리 신석기 시대 유적이 대표적이다. 송죽리 암음 유적 내부 표토로부터 약 50㎝ 내외의 깊이에 해당하는 토층에서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빗살무늬 토기는 길이 4m, 폭 50㎝ 정도 되는 좁은 범위의 시굴 트렌치에서 출토되었지만 남부 지방 빗살무늬 토기 편년 상에서 중기에서 만기에 해당되는 것들로 대체로 남해안식 태선침선문계(太線沈線文系) 토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전면 시문된 횡주어골문(橫走魚骨文) 토기와 능형집선문(菱形集線文), 사격자문(斜格子文) 등이 있다. 다치구(多齒具)에 의한 단사집선문이 시문된 토기 조각도 많은 편이고 단사선문이 한두 줄 시문된 사질태토의 만기 빗살무늬 토기 조각도 있다.

송죽리 신석기 시대 유적에서는 모두 1,098점의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기종은 원저 또는 첨저형(尖底形)의 사발[鉢]과 병[壺], 항아리[甕], 잔, 사발[碗], 병(甁) 등이 확인되었다. 크기는 높이 3㎝의 소형부터 50㎝에 이르는 대형 토기가 있으며 입지름 또한 5㎝에서 38㎝가량 되는 것까지 다양하다. 유물의 시기는 신석기 시대 전시기에 해당되는데 전기 1점, 중기 744점, 후기 293점, 말기 60점이다.

전기 토기는 단면 삼각형의 여러 줄 평행 덧띠를 성형 후 붙인 융기문의 심발형 토기(深鉢形 土器)[사발 모양인데 깊은 토기]이다. 중기 토기는 전면 시문, 부분 시문, 구연 부분을 시문한 것 등으로 봉형의 단치구에 의한 압인 수법의 침선계 태선문이 많고 단치구(單齒具)와 다치구(多齒具)에 의한 압찰(押察) 시문도 확인된다. 후기 토기는 대부분 압인에 의한 간단한 문양의 반복 시문이 많고 압찰에 의한 것은 골아가리[口脣刻目]과 점열문(點列文)의 경우에만 확인된다. 구순에 붙여 짧은 폭으로 돌아가며 시문한 것, 일정한 문양 단위를 지니며 공백은 남기며 이격하여 시문한 것, 여러 문양 요소를 한 문양에 복합하여 시문한 것, 골아가리하고 내면에도 시문한 것, 이중 구연을 가진 것 등이 있다.

말기 토기는 매우 고운 사질태토로 성형 후 거친 물손질 자국이 선명한 민무늬가 대다수이며 문양의 시문도 퇴화된 이중 구연의 접합면에 한 줄 횡선을 돌린 것, 한 줄에서 몇 줄의 점열문을 시문한 것, 구연에서 약간 띄워 평행선을 이격하여 긋고 그 사이에 엇갈린 사선을 채우는 등의 단조로운 문양 구성이 대부분으로 굵거나 뾰족한 단치구로 압인, 압찰에 의한 간단한 시문이 전부이다.

문양 형태는 능형집선문, 삼각집선문, 어골문, 밀집횡선문, 조우문, 파상문(波狀文), 사격자문, 점열문, 각종 단사선문 등 매우 다양하며, 그물이나 울타리, 식물 등의 형태를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 부정형의 문양도 여러 점 있다. 그리고 골아가리 토기와 주칠 토기, 민무늬 토기, 사질태토의 두꺼운 토기편에 퇴화단사선문이 시문된 만기 빗살무늬 토기도 등도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

김천 지역에서 청동기 시대 유적이 발굴 조사된 경우가 많지 않아 발굴 조사된 송죽리 청동기 시대 유적의 토기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청동기 시대 주거지에서 출토된 토기는 청동기 초기로 편년되는 돋을띠무늬 토기[突帶文 土器]와 발형(鉢形), 호형(壺形)의 민무늬 토기, 홍도(紅陶)가 대부분이다. 돋을띠무늬 토기는 돋을띠무늬 토기와 각목돌대문토기[節狀突帶文 土器]가 모두 확인되며 골아가리 토기가 함께 공반되기도 한다. 발형 민무늬 토기는 높이가 10~40㎝ 정도의 크기로 다양하며 일반적인 형태인 심발형과 납작한 천발형으로 구분된다. 호형 민무늬 토기는 장경호(長頸壺)와 단경호(短頸壺)가 있는데 높이가 10~50㎝ 정도이며 홍도는 대부분 호형 토기로서 구형의 몸통에 목이 비교적 길게 마련된 장경호와 짧게 외반하는 단경호가 있다. 크기는 8㎝ 내외의 주머니호로부터 24㎝ 정도의 장경호까지 다양하다. 주거지 내에 출토되는 홍도는 대부분 호형인데 두터운 바닥이 불에 굽혀 터진 현상이 많은 것으로 보아 취사용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 문당동 청동기 시대 널무덤[木棺墓]에서 흑도 장경호와 무문 토기 주머니옹이 출토되었다. 널무덤은 청동기 시대 후기에 조영된 것으로 보이며 이 토기들은 목관 북장벽 목개상부 봉토에서 출토되었다.

[원삼국 시대]

원삼국 시대 유적은 김천 모암동 마을 유적이 거의 유일하게 발굴 조사되었으나 아직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다. 김천 모암동 마을 유적에서는 출토 토기를 보아 2~4세기대로 추정되는 주거지가 조사되었는데, 이곳에서 타날문단경호(打捺文短頸壺)[두드린 무늬가 있고 목이 짧은 항아리 모양 토기], 두귀항아리[兩耳附壺], 목 짧은 항아리[短頸壺], 소옹 등이 출토되었다.

[삼국 시대]

삼국 시대 김천 지역에 다수의 고분군들이 분포하고 있으며 여러 유적이 발굴 조사되었는데 이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김천 지역[감문국]은 231년에 신라에 의해 정복되었다고 하는데,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김천 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는 토기를 통해 알 수 있다. 4~5세기 김천 지역에서는 신라 양식 토기와 가야 양식 혹은 가야 양식의 영향을 받은 재지 양식의 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신라 양식 토기가 김천 지역에 유입되면서 가야 양식과 신라 양식의 토기가 다소 섞이는 특징이 있다. 이는 당시 김천 지역의 정치 문화적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시기 가야 양식[재지 양식]은 김천시 개령면 양천리, 덕촌리, 광천리, 남면 초곡리, 성내동, 어모면 옥율리, 농소면 입석리 출토 굽다리 접시[高杯],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有蓋高杯], 굽다리 긴목 항아리[臺附長頸壺] 등을 통해 볼 수 있고, 신라 양식은 감문면 삼성리, 개령면 덕촌리, 어모면 옥율리, 성내동, 농소면 입석리, 남면 초곡리 출토 굽다리 접시,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 굽다리 긴 목 항아리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5세기 후반으로 편년되는 김천 월곡리 유적에서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 굽다리 접시, 뚜껑[蓋], 뚜껑 접시[蓋杯], 굽 접시[臺附碗], 연질발, 굽다리 긴목 항아리, 굽다리 항아리[臺附壺], 긴목 항아리[長頸壺], 짧은목 항아리[短頸壺], 파배(把杯)[손잡이가 달린 술잔], 그릇받침[器臺]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 토기들도 범신라 양식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김천 월곡리 유적의 낙동강 이서에 위치하는 지리적 특징을 고려해 보면 신라 토기 양식의 확산과 발전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5세기 후반 토기 가마에서 출토된 토기도 있는데 김천 옥율리 토기 가마에서 발형 토기 2점, 남산리 토기 가마에서 짧은목 항아리, 자루 달린 항아리[把手付壺], 사발[碗], 발형(鉢形) 토기, 큰항아리[大壺], 파수부원통형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6~7세기 토기는 모암동 고분군 돌방 및 돌덧널에서 출토된 토기로 살펴볼 수 있다. 굽다리 접시, 부가구연장경호(附加口緣長頸壺)[입술 부분이 ‘ㄴ’자처럼 꺾인 장경호], 병,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有蓋高杯], 뚜껑달린 긴목 항아리[有蓋長頸壺], 뚜껑과 받침대를 별도로 갖춘 목이 긴 항아리[有蓋臺附長頸壺], 굽다리 긴목 항아리[臺附長頸壺], 굽다리 곧선입 항아리[臺附直口壺] 등 대부분 전형적인 신라 양식 토기[경주 양식 토기]이며 일부 재지적 요소, 의성 양식 토기, 백제 토기가 보인다. 김천 옥율리 유적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 등도 모암동 고분군 출토 유물과 유사하며 6세기 후반의 토기로 편년된다.

김천 용전리 삼국 시대 널무덤[土壙墓]에서 출토된 토기를 살펴보면 유개고배, 파배, 발, 단경호, 대부장경호, 대부호, 연질완, 병 등으로 고배는 대각이 낮아지기 시작하여 대각과 배신의 비율이 비슷해지고, 개는 기고가 낮아지고 드림턱보다 안턱이 발달하여 접지면이 안턱으로 된 형태가 되는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토기와 황룡사 창건기 토기와 유사하여 6세기 중반 후엽으로 편년되는 토기가 있다.

김천 대신리 유적에서는 6세기 중후반으로 편년되는 돌덧널무덤과 널무덤에서 신라 전기 양식에서 신라 후기 양식까지의 신라 양식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有蓋高杯], 뚜껑 접시[蓋杯], 개, 병, 배 등이 출토되었다.

김천 부상리 유적 돌덧널무덤에서 출토된 토기도 뚜껑 접시와와 개, 문양의 형태적 특징과 시문 수법으로 보아 신라 후기 양식 토기로 6세기 중후반~7세기 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뚜껑 접시는 이단투창고배, 일단투창고배, 무투창고배로 구분되고 꼭지는 굽형과 보주형으로 분류되며 문양은 개신에 반원점문과 병의 견부(肩部)에 수적형문이 시문되어 있다.

김천 양리 유적 분묘에서 뚜껑달린 굽다리 접시[有蓋高杯], 유개대부직구호(有蓋臺附直口壺)[덮개와 받침대가 있고 아가리가 고추 선 항아리], 뚜껑갖춤 그릇[有蓋盒.], 뚜껑 달린 굽접시[有蓋臺附碗], 개, 파배, 굽다리 긴목 항아리[臺附長頸壺], 긴목 항아리[長頸壺], 굽다리 곧선입 항아리[臺附直口壺], 굽접시[臺附碗], 짧은목 항아리[短頸壺], 병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이것도 신라 양식 토기로 신라 전기 양식 토기[5세기 말~6세기 초]와 신라 후기 양식 토기[6세기 중엽 이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시기 김천 지역 토기는 거의가 천신라 양식이며 이것으로 볼 때 삼국 시대 김천 지역은 신라의 권역으로, 신라의 중요한 거점으로 성장해 갔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통일 신라 시대]

김천 월곡리 유적 가마 및 추정 작업장에서 호, 완, 개 등이 대부분 파손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8~9세기로 편년되는 통일기에 많이 출토되는 기종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7.12 한자 오류 수정 두귀항아리[兩耳付壺] -> 두귀항아리[兩耳附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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