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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634
한자 烽燧
영어음역 Bongsu
영어의미역 Beacon Fire Stat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이주림

[정의]

조선 시대 경상북도 김천 지역의 관아에서 긴급한 상황을 중앙에 전하던 군사 통신 시설.

[개설]

봉수는 옛날에 널리 쓰인 통신 수단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149년(고려 의종 3) 병마사 조진약(趙晋約)의 제창으로 고려에서 채택하였다. 밤에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로써 산봉우리에서 산봉우리로 신호를 보내어 변경의 위급을 중앙에 통보하였다. 보통 4㎞에서 16㎞마다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고려 때에는 방정공인(防丁工人)이나 백정(白丁) 20명을 두고 토지 약 9,917㎡[1결(結)]씩을 주어 경비와 생활비로 충당토록 했다.

조선조 세종 때에는 봉수 제도를 개선하여 평상시에는 한 번, 적이 나타나면 두 번,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세 번, 국경 내로 침입하면 네 번, 적과 교전하면 다섯 번씩의 봉화를 올렸다. 구름이나 심한 바람으로 봉화 통신이 어려울 때에는 봉졸(烽卒)이 달려가서 연락했으며, 봉수에 관한 것은 공조판서 소관의 업무였다.

국가에서는 봉수를 중요시하여 여기에 종사하는 봉졸은 다른 군무를 면제해 주었고, 봉수대 둘레에 경계선을 설치하고 방화나 허위 봉화를 범했을 때에는 사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 방화나 다른 범죄가 경계선 약 180m 이내일 경우는 병조에서 직접 사건을 처리하고, 180m 밖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소관 진영(鎭營)에서 다스렸다.

[변천]

조선 초기의 김산 관내에는 고성산(高城山) 봉수대와 소산(所山) 봉수대가 있었다. 이 봉수대들에서 정규군인 봉군(烽軍)이 각각 145명, 군비 조달의 봉군보(烽軍保)가 255명씩 주둔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부터 봉수대에 주둔한 이들에게 줄 토지[公田]가 적어져서 봉수군 50명, 봉군보 150명씩으로 감소되었다. 그 뒤 조선 말기에 현대식 우편 제도가 설치되면서 없어졌다.

[직봉과 간봉]

봉수의 중요 선은 이를 직봉(直烽)이라 하여 함경도 경흥과 서울 간의 봉수선을 제1거, 동래와 서울 간을 제2거, 강계와 서울 간을 제3거, 의주와 서울 간을 제4거, 순천과 서울 간을 제5거라 하였다. 직봉 이외에 간봉(間烽)이라고 하는 보조선이 있다. 간봉에는 본봉 사이에 중간 지점을 연락하는 장거리의 것과 국경 지대의 전선으로부터 본진으로 보고하는 단거리의 간봉이 있다.

김천 지역의 봉수는 장거리 간봉으로 모두 제2거 직봉 선에 연결되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직봉이 없는 거제도, 고성, 사천 등 각 진의 기점에서 올린 봉화가 진해를 거쳐 함안, 의령, 초계, 합천, 고령, 성주, 각산, 안동 등을 경유하고 선산에 이르면 이것을 개령면의 감문산 봉수대가 받아서 4㎞ 떨어진 어모면의 소산 봉수대로 보내고, 소산 봉수대는 이를 16㎞ 떨어진 상주의 회룡산 봉수대로 보내면 함창, 문경을 거쳐 충주의 직봉인 만산 봉수대가 받아 서울로 연락하는 선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남해의 각 진에서 올린 봉화가 사천, 진주, 단성, 삼가, 합천을 거쳐 거창의 건미흘산 봉수대에 이르면, 이를 지례면의 구산 봉수대가 받아 16㎞ 떨어진 남산동 뒷산 고성산 봉수대에 보내면 이곳에서는 황간의 늘이항 봉수대로 보내어 영동, 옥천, 회덕, 문의, 청주를 거쳐 직봉인 충주 망이산 봉수대가 받아 이를 서울로 보내게 된다.

[현황]

현재 김천 지역에서는 4개의 봉수지가 남아 있다. 양천동 산 53-1번지에 위치한 고성산 봉수지, 감문면 금라리 산 74번지에 위치한 소산 봉수지, 개령면 동부리 산 63번지에 위치한 감문산(甘文山) 봉수지, 지례면 상부리 산 32-1번지에 위치한 구산(龜山) 봉수지 등이다.

1. 고성산 봉수지

현재 봉수대의 흔적을 전혀 확인할 수 없다. 고성산 봉수부곡동의 문지알 뒷산의 봉수대를 말한다. 고성산성 내 정상의 서북쪽에 위치한다. 지례의 구산 봉수를 받아 충청북도 황간 남이정산 봉수로 보낸다. 현재 고성산 봉수지 정상에 정자[팔각정]가 세워져 있다.

2. 소산 봉수지[이칭: 봉화산 봉수지, 운학산 봉수지]

소산 봉수지는 봉화산 정상[『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9 김산군 봉수조]에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봉수대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는 30×40×15㎝ 정도의 가공된 돌들이 일부 흩어져 있다. 또 봉수지의 남쪽 계곡[금라리 쪽] 30m 아래쪽에 위치한 30×40m의 장방형 대지도 봉수지와 관련된 터로 추정된다. 개령면 동부리 뒷산인 감문산, 취적봉 봉수를 받아 상주 회룡산 봉수로 보내는 역할을 했다.

3. 감문산 봉수지

감문산 봉수지는 취적봉 정상 산성 안에 있다. 지름 4×1.4m로 원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둘레는 석축을 한 흔적이 보인다. 남북으로 5개의 봉수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일 남쪽의 봉수대가 가장 크고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봉수는 선산 감산 봉수를 받아 김천시 감문면 금라리 소산 봉수로 보낸다.

4. 구산 봉수지

구산 봉수는 원형으로 구산성과 연결되어 있다. 지름은 15m이다. 둘레는 석축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북쪽은 무너져 확인할 수 없고, 남서쪽은 자연석을 거칠게 가공한 석축이 1m 높이로 확인된다. 와편과 토기 편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다. 이 봉수는 40리 떨어진 거창 거미흘 봉수에서 김천시 양천동고성산 봉수로 보낸다.

5. 기타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인근 마을에 구전되어 오는 봉수 터가 있다. 금릉군 남면 봉천2동 천동마을 뒤에 높이 320m 가량의 가파른 산인 건령산(乾靈山)이 있는데, 이를 봉화산이라고도 한다. 이 산봉우리에서 금오산(金烏山)고성산(高城山)의 봉수를 그 중간인 봉화산에서 연결하는 봉화를 올렸다고 한다.

아포읍 예리 서당마을 뒷산인 높이 300m쯤 되는 신방산(新方山)에서도 봉화를 올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감문면 금라리에서 위량초등학교 앞을 지나 은림리로 가는 길 700m 지점에서 오른편으로 건너 해발 300m 산을 봉화산이라 하는데 이 산봉우리에서 옛날 봉화를 올려 산 이름을 봉화산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정** 위 [현황] 본문에서 소산 봉수지의 위치를 '감문면 금라리 산74'라 했는데, 현재의 행정구역상으로 감문면 남곡리 산74번지 임. 역사기록을 중시하여 금라리로 표기한다면 지번을 정정하여 '감문면 금라리 산38번지'로 수정해야 할 것이므로 이에 의견을 제시함. 201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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