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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674
한자 古文書
영어음역 Gomunseo
영어의미역 Old Documents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남권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1449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1516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1550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1578년연표보기

[정의]

경상북도 김천 지역에서 조선 전기와 일제 강점기에 작성되어 전해 오는 문헌 자료.

[개설]

김천 지역에서 현재까지 전해 오는 고문서로 대표적인 것은 봉산면 신리에 위치한 덕원당(德源堂) 고문헌자료관(古文獻資料館)에 소장되어 있는 15~16세기 고문서와 김천 출신 독립운동가 이명균(李明均)[1863~1923]의 간찰을 들 수 있다.

덕원당 고문헌자료관은 창녕 조씨 찬성공파 조창현 가에서 전래되어 오는 많은 양의 고문헌과 개인적으로 수집한 고문헌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특히 16세기 이전의 분재기와 입안, 백패 등은 조선 전기 사회 구조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덕원당 자료와 아울러 현재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의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김천 출신 독립운동가 이명균의 간찰 두 건도 함께 소개한다.

[구성 및 내용]

덕원당에 소장된 분재기와 입안은 모두 다섯 종이다. 입안은 1516년(중종 11) 선무랑단성현감(宣務郞丹城縣監) 김만구(金萬鉤)의 처 김씨가 첩의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에 대해 입안 발급을 신청한 것으로, 분재기와 관련 문서가 덧붙여져 있다. 백패는 1570년(선조 3) 조희익이 발급 받은 것이다. 먼저, 1449년(세종 31)에 작성한 분재기(分財記)로, 그 내용은 어머니가 죽은 뒤 1449년 9월 3일에 큰아들 사용(司勇) 배임령(裵衽袊), 큰딸 사정(司正) 유□□(柳□□), 둘째 아들 유학(幼學) 배습령(裵褶袊)이 모여 회의하고 어머니의 노비를 분배한 내용이다.

둘째는, 1578년(선조 11) 충순위(忠順衛) 김호(金壕)의 처에게 비(婢) 언금(彦今)[22세]을 내려주고 그 소생 또한 노비로 삼게 한 별급 문기이다. 노비를 별급 받은 사람은 김호의 처인데, 가옹(家翁)이 살아 있을 때 다른 자녀들에게 재산을 별급할 때 빠졌기 때문에 이를 균등하지 못한 것이라 하여 노비 언손량(彦孫良)의 처에게서 태어난 일소생비(一所生婢) 언금을 별급하고, 또 그 소생도 가지도록 한 것이다. 문서 말미에 재주(財主)인 고(故) 통선랑(通善郞) 전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 김표(金彪)의 처 김씨의 인기(印記)와 증인인 차자(次子) 유학(幼學) 김종선(金宗善), 여서(女婿) 전 현감 소후(蘇後), 필집(筆執)인 장자(長子) 충순위(忠順衛) 김방선(金邦善)의 착압이 있다. 가족 내에서 증인과 필집을 맡아 재산을 상속했음을 보여 주는 문서다.

세 번째는, 1516년 선무랑 단성현감 김만구의 처 김씨가 첩의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준 분재기와 입안을 발급받기 위한 증인들의 진술서 및 봉화현의 입안 문서 등 네 장이 점련(粘連 )[호적에 새로운 사실을 추가할 때 원 대장(臺帳)에 붙여서 잇는 것]되어 있다. 총 다섯 건이 점련된 이 문서의 첫 번째는 관에 입안을 신청하는 소지인데, 훼손이 심하여 본문은 거의 확인할 수 없고 소지에 대한 관의 처분 일부만 확인이 가능한 상태다. 이어서 1516년 2월 13일에 작성한 분재기, 재산을 분배한 김만구의 처 김씨와 손문중(孫文仲) 외 두 사람이 같은 해 4월 10일에 작성한 진술서 두 건, 끝으로 같은 해 4월 22일에 봉화현에서 발급한 입안으로 구성되어 있다.

네 번째는, 1550년(명종 5) 안동에 거주하던 광주 김씨 김효로(金孝盧)가 자제들에게 전답을 나누어 주면서 작성한 화회(和會) 문기이다. 재산의 상속 대상은 큰아들인 관찰사 김연(金緣)[1487~1544], 둘째 아들 생원 김수(金綏), 맏사위인 전 용궁현감(龍宮縣監) 김우(金雨), 둘째 사위인 전 훈도(訓導) 금재(琴榟)이다. 권말에 상속자 네 명과 필집 김모(金某)의 착압이 있는데, 이 가운데 큰아들 김연은 고인이 되었으므로 그의 처 조씨(曺氏)가 대신 인기(印記)를 날인하였다.

다섯 번째는, 1570년(선조 3) 조희익이 발급 받은 96.0×39.0㎝ 크기의 백패 교지이다. 이 문서는 조희익이 생원시에 2등 제21인에 입격하고 받은 것이다. 조희익은 본관이 창녕(昌寧), 자는 군망(君望)이며, 영천(永川)에 거주한 인물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형이다.

김천 출신 독립운동가 이명균의 간찰 두 건은 혼례 후 신행을 가는 아들·며느리 편에 사돈에게 보내는 인사 편지이다. 1915년 이명균편강렬(片康烈)과 함께 해인사를 방문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총독의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켜 만주로 망명케 했다. 3·1운동 때 경상도의 만세 시위를 주도했고, 1920년 신태식·정순영과 함께 대한독립후원의용단(大韓獨立後援義勇團)을 조직하여 다섯 차례에 걸쳐 상해임시정부에 10만 원을 송금했다. 1922년에 이 사건이 발각되어 독립군 자금 8만 3천 원을 빼앗기고 잡혔다가 이듬해 예심 도중 병이 악화되어 석방된 후 죽었다.

육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명균의 간찰 두 건의 내용은 비슷한데, 평소 존경하던 분과 사돈으로 맺어진 것이 영광이며, 또 덕 있는 정숙한 며느리를 얻은 것이 가문의 경사라고 한 뒤, 혼례 때 좋은 예물을 받았지만 답례가 보잘것없음이 송구스럽고,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였으니 잘 살펴 주기를 바라는 등 매우 겸손하게 글을 쓰고 있다.

[의의와 평가]

덕원당 고문헌자료관에는 조선 시대 관료와 일반인들의 진솔한 생활사를 살필 수 있는 많은 자료가 소장되어 있다. 이중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분재기와 입안, 교지 등은 조선 전기의 자료가 많지 않다는 점과 또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어 당시 사대부가의 재산 분배와 입안 절차 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또 독립운동가 「이명균 간찰(李明均 簡札)」은 대한제국기의 혼례 풍습을 연구하는 데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 육군박물관(http://museum.km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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