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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시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777
한자 裵時亮
영어음역 Bae Siryang
이칭/별칭 자명(子明)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604년연표보기
활동 1630년연표보기
활동 1935년연표보기
활동 1938년연표보기
활동 1945년연표보기
활동 1950년연표보기
활동 1951년연표보기
몰년 1957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묘소|단소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수좌동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성주(星州)
대표 관직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자명(子明). 아버지는 배흥립(裵興立)이고,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영산 신씨(靈山辛氏)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은 통덕랑(通德郞) 배명호(裵明虎)와 진사(進士) 배명생(裵命生)을 두었고, 형으로 배시망(裵時望)과 배시준(裵時俊)이 있다.

[활동 사항]

배시량(裵時亮)[1604~1657]은 54세가 되던 1630년(인조 8) 식년시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아버지와 같이 무관의 길을 걸었다. 종성판관(鍾城判官)을 거쳐 1635년(인조 13) 훈련원첨정(訓練院僉正)이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해 귀향하였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좌도병마절도사 민영(閔泳)의 군문에서 종군하였다. 민영이 전사한 후 그를 대신하여 근왕병을 이끌고 충주에 이르는 과정에서 군대를 지휘하여 전공을 세웠으나, 전란이 끝났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1638년(인조 16) 숙천부사, 경상좌도우후를 거쳐 양주목사가 되었다. 이때 유탁이 반란을 일으키자 인조배시량에게 경상도와 전라도 가까운 고을의 군사를 출동시켜 적의 소굴을 섬멸하도록 유시하였다. 이때 공로를 세워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1645년(효종 5) 공청도병마절도사, 1650년(효종 1) 평안도병마절도사를 거쳐 다음 해 경기도수군절도사와 포도대장이 되었다. 1657년(효종 8) 전라도병마절도사로 각 고을을 순시하다가 장수현(長水縣)에서 세상을 떠났다.

평소 청렴하고 결백하여 내외 자손들도 감복해 하였다. 배시량이 재산 분배를 끝낸 만년에 아들을 낳자, 모친은 자식들을 불러 재산을 재분배하려 하였으나, 그는 눈물로 “내게 딸린 재물 외는 아버지의 청덕(淸德)으로 끼치신 것인데, 이제 와 자손이 되어 그 많고 적음을 계산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아버지의 높은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라며 거부하였다고 한다. 배시량이 무인이면서도 양반의 법도를 지키고 행동을 절제하였으며, 스스로 욕심을 버리고 근신하여 여러 고을을 다스리면서도 부정으로 재산을 축적하는 일이 없었다고 평가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묘소]

묘소는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수좌동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57년 배시량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은 큰 재목을 잃었다고 애통해 하며 삼도감사열읍수령(三道監司列邑守令)에게 명하여 호상(好喪)하게 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문정공 미수(眉수) 허목(許穆)이 서명(序銘)을 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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