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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02
한자 李三省
영어음역 Yi Samsung
이칭/별칭 희성(希聖)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병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564년연표보기
활동 1599년연표보기
활동 1604년연표보기
활동 1606년연표보기
몰년 1624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성격 문신
성별
본관 광평(廣平)
대표 관직 강진현감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광평(廣平). 자는 희성(希聖). 아버지는 직장 이춘란(李春蘭)이고, 어머니는 흥해 최씨이다.

[활동 사항]

이삼성[1564~1624]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향시에 수차례 합격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여 물고기를 잡아 모친을 봉양하였으며, 충의위(忠義衛)를 거쳐 찰방으로 향촌의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36세가 되던 1599년(선조 32) 기해 별시에 을과로 합격하였으며, 1600년 선조가 대신들과 명나라 군의 주둔을 요청하는 데 따른 제반 문제와 일본과의 강화 문제 등을 논의하는 자리에 승정원사변가주서(承政院事變假注書)로 참여하였다.

승정원주서, 함경북도수상도찰, 형조좌랑을 거쳐 1604년(선조 37) 울산판관(蔚山判官)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사간원에서 명망이 없으니 영문(營門)에서 위엄으로 다스리는 직임을 맡길 수 없다고 주장하여 체직되었다. 1606년(선조 39) 강진현감이 되었으나 용렬하다는 이유로 의천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간원들은 이삼성이 인품이 혼미하고 망령스러운 데다 도임한 이후로 하리(下吏)들에게 정사를 맡겼을 뿐만 아니라 근신하지 아니한 일이 많이 있었다는 점을 들어 파직을 주장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한 이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삼성의 인품을 인정하고 영천군수와 병조정랑을 내렸으나 끝내 고사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후학 교육과 육영 사업에 전념하였고,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선비의 실천력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구암재를 짓고 당대 문장가들과 교유하였다.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0.12.31 내용수정 본관을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이삼성"조의 "『광평이씨족보(廣平李氏族譜)』를 참고하여 수정한다"는 주석3에 근거하여, 본관을 “성주(星州)”에서 “광평(廣平)”으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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