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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훈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91
한자 金敎勳
영어음역 Gim Gyohun
이칭/별칭 취헌(翠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96년 12월 2일연표보기
활동 1919년 3월 26일연표보기
활동 1921년 2월연표보기
몰년 1973년 5월 31일연표보기
추모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읍 송천리 120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대구|만주 등
학교|수학지 대구
활동지 경상북도 김천|대구|만주 등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군자금 모금|송천교회 영수|양성학교 교사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김교훈(金敎勳)은 1896년 12월 2일 경상북도 김천시 아포면 송천동 120번지에[현 아포면 송천리]서 김치주(金致珠)와 권송림(權松林)의 사이에서 큰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취헌(翠軒)이다. 김교훈은 대구 계성학교에서 수학하다가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중 1917년 10월 1일 송천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김교훈은 3월 26일 구미 장날에 일어난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인근 지역 교회를 돌아다니며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때 모은 자금은 모두 최재화에게 전달했다. 당시 김교훈아포면 제석리김남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김남수는 재당숙 김성숙에게서 1400원이란 거금을 얻어 내 독립 자금을 모금하던 김교훈에게 전달하였다. 한편, 김교훈은 아포 지역에서 『혁신신보』와 『신한별보』를 입수하여 기사를 발췌한 후 이를 인쇄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다.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만주로 간 김교훈은 고산좌(孤山座)에 활동 기반을 세우고 군관 학교에 자금 지원을 하는 등 조국 광복을 위해 전력을 경주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 김교훈송천교회 영수 및 양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중 1921년 경찰에 검거되어, 1921년 2월 대구지방법원에서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22년 출옥 후 그는 다시 송천교회로 돌아와 영수로서 봉사했으나 점차 교회 생활에 소홀해 지면서 책벌을 받기도 하였다. 김교훈은 인근 지역 곳곳에 청년들의 민족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세웠는데, 김천의 대둔서림(大屯書林), 선산의 죽림서림(竹林書林), 상주의 갑장서림(甲長書林) 등이 대표적이었다. 해방 후인 1949년 백범(白凡) 김구(金九)[1876~1949)]의 시해 소식에 충격을 받아 두문불출하다가 1973년 5월 31일 향년 80세로 별세하였다.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신암동의 신암선열공원(新岩先烈公園)에 안장되었으며, 묘비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1.09.21 참고문헌 책제목 오류 <<송천교회100년사>>로 수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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