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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896
한자 崔相元
영어음역 Choe Sangwon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90년 3월 9일연표보기
활동 1906년연표보기
활동 1912년연표보기
활동 1919년 3월 8일연표보기
활동 1919년 4월 18일연표보기
몰년 1974년 7월 19일연표보기
추모 1986년연표보기
추모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김천
활동지 대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구 계성학교 교사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최상원(崔相元)은 1890년 3월 9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공부하다 1906년 선교사 부해리(傅海利)[본명 Henry Munro Bruen]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1906년 개교한 대구 계성학교의 첫 번째 졸업생이 되었다. 1912년 최상원은 모교인 계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성경·대수·산술·음악 등의 과목을 가르쳤으며, 문학회와 운동부 부장 등을 담당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최상원은 평양에서 온 평양숭실학교 학생 김무생(金武生)을 만나 서울과 평양에서의 시위 상황을 듣고 대구에서도 만세 시위를 일으킬 것을 권유받았다. 이에 최상원은 계성학교 교사인 최경학·백남채·권의윤 등과 함께 계성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 참여를 적극 권유하였다. 그리고 대구고등보통학교 4학년생인 신현욱·허범에게도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또한 계성학교 제자인 경산면 중방동의 전덕구와 함께 찾아온 경산면 삼북동 교회 목사 서성오에게도 만세 시위를 전개할 것을 독려하였다.

1919년 3월 8일 최상원이만집 목사 등과 함께 서문외 장터에서 계성학교 학생들과 함께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후 최상원은 일본 경찰의 검거를 피해 피신했으나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궐석 재판을 진행, 그에게 징역 2년을 선고하였다. 1938년 고향인 유성리로 돌아온 최상원은 이후로 교회 활동에 헌신했다고 전한다.

[상훈과 추모]

1986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계성 90년사』(계성90년사편찬위원회, 1997)
  • 「전덕수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4. 7)
  •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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