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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용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10
한자 禹龍澤
영어음역 U Hyeon
이칭/별칭 재현(在見),육봉(六峰)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68년 9월 14일연표보기
활동 1904년연표보기
활동 1907년연표보기
몰년 1940년 5월 24일연표보기
추모 1977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의성
활동지 경상북도 의성|서울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충의사 결성|대한자강회·대한협회 회원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과 함께 활동한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우용택(禹龍澤)은 1868년 9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재현(在見), 호는 육봉(六峰)이다. 개항기 참봉 벼슬에 있었다. 을미년 의병이 해산한 후 일부의 자정론자를 제외하고 의병에 참여했던 유생들은 각자의 학통과 의병 경험에 따라 현실에 참여하였다. 특히 많은 유생들이 상경하여 의병의 공로를 인정받아 관직에 나아가기도 했고, 일부는 서울에서 활동하며 사상의 변화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4년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도발한 다음 제1차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는 침략 행위를 강화하였다. 이에 우용택은 서울에서 김천 출신인 여중룡·허위·이건석 등과 함께 충의사(忠義社)를 결성하였다. 충의사는 황실(皇室)의 강녕(康寧), 민명(民命)의 보호, 군제의 초연(抄鍊), 인재의 교육 등 현재 빨리 처리해야 할 일에 힘을 써 자강지책(自强之策)을 강구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을사조약 전후로 충의사는 배일 언론 투쟁을 적극 전개하였다. 우용택여중룡·이병구·강원형 등의 유생들과 일본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는 공개서한을 각국 공사관에 발송하고 친일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규탄하다 1905년 5월 헌병대에 체포당하였다.

석방 된 뒤에도 우용택은 정부 내 친일 대신을 비판했으며, 심지어 이들을 직접 찾아가 엄히 꾸짖고 구타까지 함으로써 세인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우용택은 외부대신 이하영이 1905년 연해 하천 항행 무역권을 일본에게 넘긴 사실을 알고 그를 찾아가 얼굴에 침을 뱉고 “너의 매국 행위는 끝날 줄을 모르더니 이제는 하천까지 팔아먹고 장차는 또 무엇을 일본 놈에게 팔 작정인가? 이 역적놈아.” 하고는 빰을 후려갈기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외부대신 이하영 구타 사건 덕분에 우용택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한동안 고초를 겪었지만, 친일 매국노를 따끔하게 혼내 준 강개지사(慷慨之士)로 아름다운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1907년 우용택여중룡·이병구·지우석 등과 일본 공사관을 폭파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구금되어 8개월간 복역하였다. 출옥 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에 가입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였다.

[상훈과 추모]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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