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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수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0923
한자 崔龍洙
영어음역 Choe Yongsu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송호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865년 10월 12일연표보기
활동 1919년 3월연표보기
몰년 1926년 8월 27일연표보기
추모 1982년연표보기
추모 1990년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74-15번지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3·1 만세 시위 계획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최용수(崔龍洙)는 1865년 10월 12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산동 174-15번지에서 태어났다. 김천 황금동교회 장로였던 최용수는 1919년 3월 9일 황금동교회에서 서울에서의 만세 시위를 경험하고 돌아온 같은 교회 조사(助師) 김충한과 대구 지역 만세 시위에 가담했다가 일본 경찰을 피해 김천으로 온 김수길 등과 만나 김천 지역에서의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당시 김충한김수길은 조선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기초하기로 하고, 최용수는 이를 인쇄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경고문에는 김천 지역 조선 민족 대표로서 김충한최용수의 이름을 넣기로 하였다.

3월 10일 밤 최용수는 자신의 집에서 김천저축계 사무실로부터 빌려 온 등사판을 이용하여 「조선독립에 관한 경고문」 약 300매를 등사하였다. 당시 주남태·석동준 등은 태극기를 제작하여 김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기독교인들에게 만세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등사기를 김천저축계 사무실로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일본 헌병분대에 등사 원고지가 발각되면서 최용수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면서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다. 이 일로 최용수는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에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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