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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002
한자 崔錫采
영어음역 Choe Seokchae
이칭/별칭 몽향(夢鄕)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김종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1917년연표보기
수학 1935년연표보기
수학 1942년연표보기
활동 1947년연표보기
활동 1959년연표보기
활동 1960년연표보기
활동 1961년연표보기
활동 1964년연표보기
활동 1965년연표보기
활동 1971년연표보기
수학 1977년연표보기
몰년 1991년연표보기
특기 사항 2000년연표보기
추모 2004년 4월 21일연표보기
출생지 경상북도 김천시 조마면
성격 언론인
성별
대표 경력 경향신문사 회장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출신의 언론인.

[활동 사항]

최석채(崔錫采)[1917~1991]는 호는 몽향(夢鄕)이며, 김천시 조마면에서 태어났다. 김천초등학교[제19회]를 졸업하였다. 1935년 일본 애지현 벽남상업을 나와, 1942년 동경 중앙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으며 일본에서 보통문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해방 후 『건국공론』 편집부장, 『경북신문』 편집국 차장, 『부녀일보』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947년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1949년 당시 32세 나이로 경감에 임명되어 성주, 문경, 영주의 경찰서장을 지냈다.

부산에서의 개헌 파동 소식을 듣고 경찰서장을 사임하였다. 『대구일보』 편집부국장을 거쳐 『대구매일』 편집국장에서 주필을 맡았다. 자유당 정권이 정치 행사 때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마라’는 사설을 써 자유당 정권을 비판하였다. 이 사설로 신문사는 백주에 테러를 당하였고, 최석채는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구속되었다. 이 사건은 글을 쓰면서 두 번째로 구속된 일로, 제2차 필화 사건이라 부른다. 법정 투쟁 끝에 1956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세계가 주목하는 언론인이 되었다.

1959년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어 4·19를 전후해 언론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일보』 3월 17일자 사설에서 호헌구국운동(護憲救國運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기재하였는데, 이 논설은 4·19 발생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을 들었다. 1960년 10월 『경향신문』 편집국장, 1961년 특별재판소 재판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5·16군사혁명에 저항하였다. 1964년 언론윤리법철폐투쟁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언론윤리법」 철폐를 관철하였다.

1965년 『조선일보』 주필, 제3대 편집인협회장에 취임하였다. 1971년 제25차 유엔총회 한국대표 자문위원으로 참석하였고, 그해 MBC와 『경향신문』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1년 『대구매일』 명예회장으로 재직하면서 ‘몽향 칼럼’을 6년간 집필하여 한국 언론 사상 최장기 인물 기명 고정 칼럼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최석채의 묘비명 첫머리에 적힌 “몽향 최석채 선생은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수범을 몸으로 실천하신 대논객이요, 우리 시대 최후의 지사기실의 언론인이다”라는 구절처럼 한국을 대표하는 언론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저술 및 작품]

작품으로는 『서민의 항장』, 『일제하의 명논설집』, 『한국의 신문윤리』, 『속 서민의 항장』을 저술하였다.

[상훈과 추모]

6·25전쟁 당시 무공으로 35세에 화랑무공훈장, 50세에 독립신문 기념 언론상, 54세에 대한민국 문화예술상[언론 부문], 60세에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77년에 경북대학교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에서는 최석채를 ‘세계언론자유영웅 50’으로 선정하였다. 2004년 4월 21일 직지문화공원이 준공되었는데, 공원 내 세계도자기박물관과 백수문학관 사이에 최석채 선생 기념비와 사설비를 세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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