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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226
한자 朴夢說妻文化柳氏忠烈閣
영어음역 Bang Mongyeol Cheo Munhwa Yussi Chungnyeolgak
영어의미역 Monument Shrine to Munhwa Yu Clan, the Wife of Park Mongyeol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 411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혜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1882년연표보기
현 소재지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 411 지도보기
성격 충열각
양식 맞배지붕
정면 칸수 2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에 있는 개항기 박몽열의 처 문화유씨 충렬각.

[개설]

박몽열(朴夢說)의 본관은 밀양, 영동 초강 출신의 충신이다. 박몽열은 무과를 거쳐 황간현감으로 있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자 “나라에 녹갑을 하게 되었다.” 하고 분연히 일어섰다.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가 패하여 자결을 생각하였으나 그렇게 죽는 것은 가치 없는 죽음임을 알았지만 적이 강요하는 항복을 참는 일도 죽음만 못하지 않았다.

이를 갈며 탈출을 꾀하던 박몽열은 밤을 타 황간 냉천에 몸을 던져 수중으로 영동 심천까지 헤엄쳐 탈출하였다. 간신히 살아나 패배에 굴하지 않고 다시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성 촉석루에서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부인 문화유씨(文化柳氏)는 남편의 최후 소식을 듣고 저세상에서 남편을 모시겠다며 물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박영백이 8세 때의 일이라 이러한 충성과 열행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묻히게 되었다. 그러다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한후고사(韓侯古事)』에 이 사실을 수록한 것이 밝혀져 1882년(고종 19)에 뒤늦게 정려(旌閭)를 내리고 ‘충신열녀지문(忠臣烈女之門)’이라 극찬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김천시 대덕면 중산리 411번지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어 찾기가 쉽다.

[변천]

1882년(고종 19) 대덕 다화촌에 정려문이 세워졌으나, 후손이 중산리로 옮겨 현재에 이른다.

[형태]

기와가 있는 작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건물 입구에 붉은색 아치형의 쇠문이 있다. 건물은 정면 2칸, 측면 1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면은 홍살로 막았으나 나머지 삼면은 담으로 막혀 있다. 맞배지붕에 겹처마로 되어 있고, 건물 내부 중앙에는 비석과 편액이 걸려 있다. 돌담 바깥쪽에는 박몽열과 그 부인의 충심과 정절을 기리는 비에 대해 설명한 안내판이 있다.

건물 안에는 박몽열 부부의 두 정판(旌板)이 나란히 걸려 있는데, 바른 편에는 ‘충신증가선대부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훈련원도정행통정대부황간현감겸청주진관병마절제도위밀양박몽열지여(忠臣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訓練院都正行通政大夫黃澗縣監兼淸州鎭管兵馬節制都尉朴夢說之閭)’, 왼편에는 ‘열부증병조참판밀양박몽열처증정부인문화유씨지여(烈婦贈兵曹參判密陽朴夢說妻贈貞夫人文化柳氏之閭)’라고 쓰여 있다. 그 외에 4개의 편액(扁額)이 있다. 담 옆에 1988년에 세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현황]

도로변에 있어 찾기 쉬우며 보존 상태 역시 양호한 편이다. 다만 담 안쪽과 밖의 풀이 너무 자라 있어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6.28 인물 설명, 일부 내용 수정 박몽열은 밀양사람으로 금릉대덕 출신의 -> 박몽열의 본관은 밀양, 영동 초강 출신의 한준고사(韓俊古事) -> 한후고사(韓侯故事) 박몽열(1555-1597) -> 박몽열(1555-1593)
2011.07.27 2011년 한자 재검토 작업 정려(旌閭)를 내리고 ‘충신열녀지문(忠臣列女之門)’이라 극찬하였다. ->정려(旌閭)를 내리고 ‘충신열녀지문(忠臣烈女之門)’이라 극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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