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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가록』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01717
한자 南柯錄
영어음역 Namgarok
영어의미역 A Kind of Unofficial History
이칭/별칭 『남가몽(南柯夢)』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승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1939년연표보기
발견|발굴 1993년연표보기
성격 일기문
저자 정환덕(鄭煥悳)
표제 南柯錄

[정의]

개항기 김천 출신 정환덕(鄭煥悳)이 궁중의 비사를 기술한 일기문.

[편찬/간행 경위]

고종순종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원부경(侍從院副卿) 정환덕(鄭煥悳)[1857〜1944]이 궁궐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여러 일들의 보고 들은 바를 정리하여 비망록을 만들었고, 후에 인척에게 부탁하여 『남가록(南柯錄)』으로 간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서지적 상황]

『남가록』 원본은 6·25전쟁 때 소실되었고, 현재 알려진 『남가록』은 1993년 성신여자대학교 이현희 교수가 학계에 보고한 것으로, 정환덕의 사돈인 김종희가 1939년 필사해 보관해 왔다.

[형태]

표지에 『남가록』이라고 적혀 있으나 다음 쪽에는 『남가몽(南柯夢)』이라고 적혀 있다. 이는 남가일몽(南柯一夢)이라는 고사 성어에서 따 온 듯하다. 양면 궤지에 한문체의 글이 세로쓰기로 되어 있으며 전체 쪽수는 202쪽이다. 한 쪽은 24행, 한 줄 평균 22자로 총 5만 3330자에 이른다.

[구성/내용]

『남가록』고종순종을 측근에서 모시던 종2품 시종원부경 정환덕이 쓴 궁중 비사이다. 헤이그 밀사 선발 과정을 비롯해 민비명성황후로, 왕태자를 황태자로 추봉하게 된 경위 등 알려지지 않은 역사의 이면을 기술하였다. 성신여자대학교 이현희 교수가 발췌·번역한 『남가록』의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무효 선언 미에 전달-광무황제[고종]는 원래 일제의 을사조약 체결을 반대하여, 조약 체결을 결정짓는 어전 회의에 병환이 두텁다는 이유를 대고 애초부터 참가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이 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신 것이다. 신 정환덕은 지밀[임금이 거처하는 곳] 가까이서 9개국에 보내는 무효 선언의 원본을 직접 보고서 미흡하기에 이를 첨가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로 하여금 미국에 전달하게 하였던 것이다.

내가 은퇴 후 금릉군[정환덕의 고향]에 내려와서도 이 문서에 관해 무효라고 크게 선전한 바 있다. 그랬더니 일본 경찰이란 자가 와서 내게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을사조약의 무효를 떠들고 다니면 조선인들은 그렇게 믿을 것이니, 그것은 얼토당토 않는 허위이고 더 이상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오.’라며 함구하라고 위협했다.

을사조약이 무효임은 황제 폐하께서 직접 수결을 하지 않으셨으며 옥새도 날인되지 않은 것이기에 문서적인 요건이나 규격이 맞지 않는 것이다. 당시 무효를 알리기 위해 이동영, 이회영, 이상설, 이준, 김좌진 등 다섯 명에게 직접 통기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을사조약의 불법, 탈법, 무효임이 세계적으로 확인될 수 없었다.”

이동녕이 4명 추천-이때 마침 고종 황제에게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의 초청장이 왔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직접 그곳에 갈 수 없었다. 일제의 감시가 극심한데다가 국내 문제 역시 만만치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고종 황제께서는 신에게 이렇게 하문하셨다. ‘만국 평화 회의에 배짱 좋고 똑똑한 이를 파견해서 일제의 불법 무도한 을사조약을 세계 자유인 앞에 폭로해 일제의 반평화적인 작태를 규탄 성토해야 하겠으니 그 최선의 방도를 알리라.’

신은 이 같은 폐하의 간절한 고견을 받잡고 몹시 고심하였다. 마침 사람을 통해 북간도에서 돌아온 이동녕을 만났다. 이동녕은 자신은 적당치 못하나 이상설이나 이준이라면 매우 적당하지 않겠느냐 하는 의견이었다. 어째서 그런가 하니, 이상설은 워낙 담력이 크고 그릇이 넓은 인물이므로 낯선 곳에 가서도 조금도 주저치 않고 변설이 막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준은 외국어 능통-일찍이 을사조약 체결 당시 고종 황제를 뵙고 순사소[왕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는 상소]를 올린 의리심 중한 인물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또한 이준도 강직하고 담력이 있으며 외국어도 능하니까 적임자라는 것이다. 이어 이동녕김좌진과 남필우를 천거하였다. 김좌진이나 남필우는 다 같이 자립 자주심과 황제에 대한 충성심이 강렬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신은 이어 명망이 있고 궁중과도 친교가 있던 이회영을 만났다. 그는 이상설이위종을 추천하였다.

고종 황제는 신을 불러 헤이그에 갈 사람을 최종적으로 선임하라고 하셨다. ‘황송하오나 유력한 지도급 인사를 만나 의견을 나눈 결과 이상설, 이위종, 이준, 김좌진, 남필우 다섯 명이 특사로서 가장 적격자라고 아뢰옵니다. 폐하, 깊이 통촉하시옵소서.’ 광무 황제는 ‘다섯 명은 조금 지나친 것 같지 않겠소. 더 줄이면 어떠하오.’라고 말씀하셨다.”

“내탕금 2만 원 하사-‘혹시 중간에 어떤 변고라도 생기면 큰 차질이 빚어질지 모르겠사옵니다. 그러하오니 다섯 명을 밀사로 선임하심이 일의 성사를 위해 가장 든든하고 적당하다고 사뢰옵니다.’ 이렇게 해서 고종 황제는 친임장과 내탕금 2만 원을 하사하며 격려하셨다. ‘이상설은 일찍이 짐에게 순사함을 강조, 역설하지 않았는가. 그 애국 충정이 사사로움을 떠났으니 가상하오. 나머지 네 명도 짐이 익히 알고 있소. 김좌진, 남필우도 함께 떠나도록 하오. 함께 동고동락하며 힘차게 싸울 준비가 다 되어 있어야 하오.’ 다섯 명의 특사 중 김좌진과 남필우는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갔다가 웬일인지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남가록』은 1897년(고종 34)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부터 1910년 8월 나라를 일제에 강점당하는 시기까지 역사의 숨겨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구한말 조선 조정의 움직임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값진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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