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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2A030103
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개령면 동부리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송기동

[자수성가한 대부호 우상학]

동부2리로 들어서면 동부연당의 맑은 물이 거울처럼 빛나고, 고개를 들면 나지막한 관학산이 마을을 고즈넉이 품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을을 지나 관학산 아래로 다가서면 웅장한 기와집 일부와 드넓은 대지가 펼쳐져 있다.

동부리 60번지로 통칭되는 단양우씨 집안의 고택들이 밀집되어 있던 곳인데, 그 면적이 1000여 평[약 3305.79㎡]에 달할 만큼 넓다.

이곳이 바로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김천 일대 최대 부호이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존경받았던 아헌옹(牙軒翁) 우상학(禹象學)[1864~1942]의 대저택이 있던 자리다.

우상학은 1864년 8월 11일 단양우씨 우익선(禹益善)의 아들로 동부리에서 태어나 1942년 작고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빈농 집안에서 태어나 근면과 성실로 막대한 부를 이룬 우상학은, 개령 일대는 물론 상주와 선산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토지를 소유했다. 부를 이룬 이후 우상학은 철저하게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의 삶을 실천했는데, 이 때문에 당시 동부리는 홍씨와 문씨, 배씨, 우씨 등의 집성촌으로서 문중 간의 경쟁과 대립이 심했지만 어느 집안에서도 우상학의 행적에 대해서만큼은 높이 평가했다고 전한다. 이 같은 정서는 지금에까지 이어져서, 동부1리 남양홍씨 후손인 홍순채[1926년생] 씨는 우상학의 행적에 대해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남의 집안 분이지만 참말 대단했던 분이라. 사람이라는 것이 어렵게 이룬 재산에 대해서는 암만[아무리] 돈이 많아도 인색하기 마련인데, 그 많은 재산을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지.”

[자선의 흔적들]

우상학이 재산을 풀어 개령 일대 주민들을 구휼했다는 기록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일제 강점기에 발행된 『중외일보』 1929년 6월 9일자 기사에는 “경상북도 김천군 개령면 동부동의 우상학이 500원을 출연해 동네 기민(饑民)[굶주린 백성]을 구제했다.”라고 적고 있다.

또 1937년에 간행된 『교남지(嶠南誌)』의 ‘자선(慈善)’ 편에는 김천, 지례, 개령의 대표적인 자선가로 단연 우상학을 꼽고 있다.

여기에 보면, “우상학은 성품이 어질고 의리를 좋아하며 흉년이 들었는데 한 마을의 세금을 대납하고 하포평야와 구야평야의 제방을 쌓아 마을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개령 지역 곳곳에는 우상학의 송덕비가 세워졌는데, 개령농업협동조합 맞은편 도로변의 비각 속 3기와 덕촌리 자방마을 입구에 1기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중 1932년 3월에 동부리 주민들이 세운 ‘전참사우상학시혜불망비(前參事禹象學施惠不忘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평평하고 넓은 삼천 두락에 보를 막고 물을 끌어들여 전역에 대고 때때로 보살피는 공의 헤아림. 흐르는 개천 거듭 고치고 제방을 거듭 고쳐 쌓았도다. 거듭 보수하고 도와주되 탐하지 아니한 덕에 큰 수확을 이루니 풍요롭고 즐겁다. 받았으되 지나면 잊기 쉬운 것이 세상의 이치인지라 후대를 위하여 보고 들은 사정을 돌에 새겨 둔다.”

[개령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을 주민 배현[1962년생] 씨가 선친에게 들었다는 전언에 따르면, 우상학의 저택 행랑채에는 비워 두는 방 하나와 쌀뒤주, 큰 양푼이 있었다고 한다. 방은 지나가는 나그네 누구라도 쉬어 갈 수 있었으며, 뒤주와 양푼은 양식이 떨어진 마을 주민이나 걸인들이 쌀이나 밥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 배려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표상으로 일컬어지는 경주 최부잣집 이야기가 70여 년 전 개령 땅에도 있었던 것이다.

특히, 개령 일대에 살던 나환자들이 집단으로 마을을 돌아다니며 구걸을 하는 바람에 주민들이 걱정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우리 집에서 매일 밥을 줄 터이니 다른 마을에 가서 천대받지 말아라.”고 하며 수년간 나환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는 이야기는 동부리 주민들이면 거의 다 알고 있는 우부잣집의 전설이다. 이에 감동받은 나환자들이 마을 입구에 감사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수가 없다.

[개령의 명문가로 기록되다]

우상학은 슬하에 우돈규(禹燉圭), 우기식(禹沂植), 우문(禹文), 우돈식(禹墩植), 우윤식(禹潤植) 등 아들 5형제를 두었는데, 하나같이 큰 족적을 남겨 아버지가 쌓은 자선가로서의 덕을 더욱 빛나게 했다. 큰아들 우돈규는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검사와 판사, 변호사로 있다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둘째 아들 우기식은 3·1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개령면장을 지냈으며, 셋째 아들 우문은 프랑스 파리대학을 졸업한 후 1950년 제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넷째 아들 우돈식은 일본 경도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개령면의회 부의장을 역임했으며, 다섯째 아들 우윤식은 교육자였다. 우돈식의 큰아들인 우종팔[1936년생] 씨는, “할아버지는 늘 돈보다는 지식이 앞선다고 하시면서 공부를 많이 하라.”고 하셨다며 지난날을 회상하였다.

개령 동부리의 자긍심으로 기억되고 있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 주자 우상학. 우상학이 살았던 예전의 웅장한 저택은 2002년 태풍으로 무너져 내렸지만, 그 나눔의 정신은 마을 앞 비각 속에 아직도 거울처럼 남아 있다.

[정보제공]

  • •  홍순채(남, 1926년생, 개령면 동부리 주민, 내신정 관리자)
  • •  우종팔(남, 1936년생, 개령면 동부리 주민)
  • •  배현(남, 1962년생, 개령면 동부2리 주민, 전 이장)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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